고위 공직자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 재직 당시의 일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구나 외교 업무를 담당한 자의 경우 그러한 불문율은 더욱 엄격하게 적용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존 볼턴 전 백악관 안보보좌관의 부적절한 처신과 북핵 문제의 정확한 분석은 당연히 분리되어야 한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 퇴임 이전의 일을 가지고 공론화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지적이 북·미 협상 과정이 왜곡된 채로 알려져도 좋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일이라는 게 때로는 잘못 알려지기도 하고, 또 일을 하다 보면 때로는 선(善)한 왜곡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전개된 북핵 협상은 한국전쟁 이후 70년 동안 남과 북이 민족의 이름으로 지불해 온 고통과 안보불안의 대가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정치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 분단된 독일, 중국, 베트남, 한국, 예멘, 이렇게 5개 나라 중에서 한반도는 아직 분단 상태로 남아 있는 전 세계 유일의 냉전 잔재의 고도(孤島)이다. 1948년 두 개의 코리아 이후 최초로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마주 앉아 새로운 관계와 평화를 만들어 보겠다고 성명서 발표하고 문서에 사인까지 했다. 그 과정에 어떤 왜곡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건대 가장 중요한 부분은 1차 북·미 정상회담이 어떻게 이뤄졌는가에 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동된 두 가지 사안이다. 하나는 정의용 안보실장이 2018년 3월 5일 평양을 방문하고, 3월 9일에는 백악관을 방문해서 북·미 정상회담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했는가의 문제이다. 두 번째는 이와 연동되어 정상회담의 핵심 전제조건으로 북·미 사이에 ‘비핵화 합의’와 ‘관계 정상화’ 부분이 있는 그대로 교환되었는가의 문제이다.
첫 부분은 정 실장을 대면한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과의 대화’를 강조하긴 했지만 정상회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그리고 또 정 실장을 대면한 트럼프 대통령 역시 먼저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과 대화를 하겠다’는 북한의 입장과 ‘북한이 원한다면 언제든 응하겠다’는 미국의 입장 사이에서 청와대가 평화라는 이름의 선(善)한 의도로 ‘정상회담’이라는 부가가치(value added)를 얹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추론이다. 청와대가 ‘우리는 정상회담 아이디어를 결코 먼저 꺼낸 적이 없다’고 공식 발표를 하지 않는 이상, 이 부분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부분에 있다. 싱가포르 1차 정상회담의 공동성명서 1항에서 북·미는 ‘새로운 관계’(New Relations)를 만들겠다고 합의했는데, 그러기 위해서 미국은 ‘평화 체제’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2항에서 강조했고, 북한은 ‘비핵화’를 위해 책임져야 한다고 3항에서 강조했다. 정확하고 공정한 확인을 위해서는 북한에만 엄격해서는 안 되고, 미국에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 먼저 미국의 입장에서 어떤 조건에서 관계 정상화를 이룰 것인지에 대해서는 최초의 순간부터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 로드맵’에 합의한다면, 모든 게 가능하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다. 문제는 북한의 입장에서 ‘비핵화 의지’가 분명히 있었는가의 부분이다. 북한 정상을 만나기로 한 미국 행정부는 ‘비핵화를 결심했다’는 우리 정부의 메시지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부터 시작된 협상의 시간 이전까지 국제사회의 대체적인 시각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의심국가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 누구도 북한이 핵무기보유국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비핵화 의지가 없었던(?) 김정은 위원장이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차려진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북한은 모두로부터 인정받는 핵무기보유국이 된 셈이다. 문재인정부의 ‘비핵평화프로세스’의 결과가 북한 핵무기의 공식 확인이라는 비극적 결말로 이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평화는(peace) 단단한 조각(piece)들로 이뤄진다는 믿음으로 북한의 속셈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따져볼 때이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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