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농기구를 잠시 빌릴 일이 있어 농장 울타리 건너 이장님댁에 들렀다. 마침 마당 한편 평상(平床)에 앉아 계시던 이장님 어머님께서 하시는 말씀, “내 나이 열여덟에 6·25동란이 났었는데, 그때보다 지금이 한결 더 무섭고 더 난리”라 신다. 얼굴에 늘 웃음이 떠나지 않던 분이셨는데 지금은 넋 나간 표정으로 “마실도 못 다니고, 갑갑해서 죽겠다”는 푸념만 되풀이하셨다.
예전 글로벌 여행객들 사이에 한국인의 별명이 ‘악어’로 불린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동물 중에서도 유독 안면근육이 발달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악어는 눈을 끔벅이거나 입을 쩌억 벌리는 것이 유일한 안면 운동이라는 것이다. 그런 탓에 악어에게서는 ‘눈을 뜨고 입을 벌린다’, ‘눈을 뜨고 입을 닫는다’, ‘눈을 감고 입을 벌린다’, ‘눈을 감고 입을 닫는다’, 이렇게 4가지 표정만이 관찰된다고 한다. 한국인을 만나면 악어가 연상된다는 말은 그만큼 한국인들의 얼굴 표정이 굳어 있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지 싶었다.

요즘은 너도나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탓에 사람들 표정 읽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얼굴 표정이 중요한 이유는 몸짓이나 손짓, 몸동작이나 자세 등과 더불어 표정 또한 핵심적인 비언어적 의사소통 도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통을 할 때 언어 혹은 단어만을 주고받지 않는다. 대신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을 다채롭게 활용하게 되는데, 나의 생각 및 감정을 상대방에게 보다 정확하게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임은 물론이다.
그런 만큼 다양한 얼굴 표정 속에 우리네 생각과 감정이 때론 솔직하게 때론 과장되게 때론 거짓을 숨기고자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일이다. 얼굴 표정의 중요성에 착안하여 연구를 진행했던 일군의 학자들이 있다. 얼굴 표정 연구의 선구자 폴 에크먼(Paul Ekman)과 그의 동료들은, 1978년 우리의 안면근육이 특정한 감정을 표현할 때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일명 ‘안면행위부호화 시스템’을 개발한 바 있다. 에크먼은 뉴기니 원시부족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원시부족의 이런저런 표정들이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지 서구인들에게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서구인들은 원시인들의 얼굴 표정 속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 정확하게 맞혀냈다.
이 결과를 토대로 에크먼은 얼굴 표정을 통해 전달되는 6가지 기본 감정은 문화적으로 보편성을 띤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6가지 기본 감정은 기쁨, 슬픔, 분노, 혐오, 두려움 그리고 놀라움을 지칭하는데, 이들 6가지 감정을 담은 표정은 모든 문화권에서 동일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은 물론, 신생아의 표정과 성인의 표정 연구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한국인들의 경우 너무 기쁠 때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슬플 때면 허탈한 웃음을 짓기도 하지만, 우리네 표정에 담긴 감정 또한 문화적 보편성을 띤다는 사실에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얼굴 표정에 주목한 일군의 학자들이 발견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웃음은 기쁜 감정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음을 표현하는 평화의 제스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덕분인가, 대부분의 사회에서 약자 집단이 더욱 자주 웃음을 보인다는 연구도 있다. 실제로 여자가 남자보다 잘 웃고,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자주 웃으며 유색 인종이 백인보다 잘 웃는다고 하니, 이 또한 그럴듯하게 여겨진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순식간에 빼앗아가더니, 얼굴 표정마저 가차 없이 빼앗아간 듯하다. 마스크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마스크를 벗어도 표정 없는 얼굴을 만날 때가 빈번하다. 서로의 익명성이 보장되는 대도시에서야 코로나19 이전에도 무관심과 무표정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을 테지만, 지금의 무표정은 도시 농촌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는 듯하여 걱정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는 단골 미용실 원장의 얼굴에도, 맛집으로 소문나 손님이 줄을 이었건만 지금은 알바 도우미도 그만두게 했다는 비빔밥집 사장의 얼굴에도, 동네 소식을 꿰뚫고 있던 네거리 마트의 직원 얼굴에도 표정이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이제 내일이면 4·15 총선이다. 사전 투표율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소식 앞에서 여야는 저마다 자신들 편에 유리하리란 논평을 내놓았다. 국민들은 잠시 표정을 잃었지만, 이번 선거에도 예외 없이 민의를 반영한 절묘한 선택을 할 것이요,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경구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선거 결과 앞에서 잃어버린 우리네 표정이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그 표정 속에 코로나19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으리란 기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경제위기를 신속하고도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으리란 희망, 나아가 사회적 갈등과 분열과 편가름 대신 공생과 공존과 공감의 가치를 적극 실현해갈 수 있으리란 다짐이 담길 수 있었으면 한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