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급해하지 마라.”
지난해 12월 경찰청 첫 여성안전기획관으로 부임한 조주은(53) 기획관에게 대학원 은사님은 이 같은 조언을 전했다. 여성안전기획관은 경무관에 해당하는 고위공무원단 나급 직위로, 늘어나는 여성 대상 범죄를 종합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신설됐다. 자리의 무게가 있는 만큼 ‘큰 그림을 그리라’는 스승의 충고다.
‘세계 여성의 날’인 8일 서울 중구 통일로의 사무실에서 만난 조 기획관은 ‘첫 여성안전기획관으로서의 각오’를 묻자 “은사님 조언대로 조급증부터 버릴 것”이라고 운을 뗐다. 조 기획관은 “여성 관련 수사와 피해자 보호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인프라를 까는 정지작업부터 차근차근 해나갈 계획”이라며 “올 상반기 안에 여성 안전 5개년 장기계획도 내놓을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조 기획관은 “여성안전기획관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규정된 여성폭력의 유형은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디지털성범죄, 데이트폭력, 스토킹 등 6가지다. 이들 범죄를 경찰청 본청에선 8개과가 나눠 맡고 있다. 흩어진 여성 대상 범죄 업무를 총괄해 조정하는 것이 여성안전기획관의 첫 번째 역할이다.
두 번째는 여성단체와의 소통이다. 조 기획관은 취임 후 여성단체 간담회도 이미 한 차례 진행했다. 그는 “여성 대상 폭력 방지 법률이 만들어진 역사를 보면 여성단체의 역할이 매우 크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이유”라며 “‘우문현답’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인데, 여성 폭력과 관련해 현장에 맞닿아 있는 여성단체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에 언제든 의견을 듣고 같이 정책을 수립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청에서 올해 가장 역점을 두고 진행하는 사업 중 하나는 ‘경찰관 성 인식 개선’이다. 조 기획관은 “세계일보에서 지난달 13일 보도한 ‘텔레그램 N번방 신고 반려’ 기사처럼 특히 사이버수사 부분에서 ‘2차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며 “4월부터 지방청별 사이버수사 전담팀 경찰들을 대상으로 2차 피해 예방 교육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간 피의자 위주로 사용해온 예산도 피해자 중심으로 바꿀 계획이다.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한 공간에서 조사받지 않도록 분리하는 ‘인권친화형 조사 환경’이 대표적이다. 2017년도부터 지금까지 지방 255개 관서 중 40곳에 인권친화형 조사 환경이 구축됐다. 올해까지 예산 18억원을 들여 175개 관서로 확대할 예정이다.
성폭력 피해자 중심 수사를 위해 ‘인공지능(AI) 음성 인식 조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경찰관이 조서를 쓰느라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으면 피해자에게 정서적 지지를 해줄 수 없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업이다. 올해 4억1400만원의 예산이 투입됐고 내년도 예산은 8억원 이상으로 늘릴 예정이다.

이화여대에서 사학을 전공하고 여성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조 기획관은 2009년 3월부터 2018년 10월까지 9년6개월간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근무하며 여성·가족·청소년 지원업무를 맡은 바 있다. 그는 “입법조사처를 나오기 직전 미투 국면을 맞아 성폭력, 디지털 성범죄 등에 관한 보고서를 아주 많이 썼다”며 “업무 실적을 인정받아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정년을 보장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후 조 기획관은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여성가족부 장관일 때 정책보좌관으로 11개월간 일하기도 했다. 그는 “주변에선 정년이 보장된 입법조사관 자리를 두고 정책보좌관으로 옮기는 것을 만류했지만 두려움 없이 뛰어들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조 기획관은 자신의 삶의 궤적을 설명하며 “남들이 무모하다 할 만큼 앞뒤 안 재고 뛰어든 순간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공장에 다니는 남편과 결혼해 울산에서 생산직 노동자의 아내로 5년을 살기도 했다.
그는 “남편을 도와 열심히 살면 평등하고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믿었던 것과 달리 현실의 남성 노동자들은 매우 가부장적이고 여성 인권은 너무 낮았다”며 “그때 ‘여성은 이 시대 최후의 식민지’라는 걸 깨닫고 아이 둘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여성학 공부에 뛰어들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때로는 인생이 추락하거나 같은 길을 남들에 비해 돌아가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었다”며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를 낮추며 새로운 환경에 뛰어든 것이 도움이 됐다. 나를 내던진 지점에 늘 새로운 길이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청 첫 여성안전기획관으로 본인을 또다시 내던진 조 기획관은 인터뷰를 마치며 환하게 웃었다.
김선영·박지원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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