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룡(79) 전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은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야당 시절에 18년간 비서(비서실장 8년)를 했다. YS의 문민정부에서 정무장관 2회, 여당(민자당) 사무총장을 하며 YS를 지근에서 보필했고, YS 서거 후엔 (사)김영삼 민주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배신과 권모술수, 중상모략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호남 출신 김 전 수석부의장과 영남 출신 YS가 평생 서로 의지하며 믿을 수 있었던 근원은 무엇일까.
김 전 수석부의장은 인터뷰에서 “민주화의 대장정에서 김 전 대통령과의 만남은 우연 같지만 우연이 겹쳐 필연이 돼 버렸다”며 자신과 YS의 인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또 “당시 야권 지도자로 호남 출신의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이 있었으나 YS의 인간적인 면모와 풍모에 마음이 끌렸다”며 “그분은 정치를 떠나 마음의 여유가 있고 푸근했다”며 세 사람 중 고향이 다른 YS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어 “대도무문(大道無門)은 YS를 상징하는 표현”이라며 “한번 결심을 하면 돌파하는 추진력이 대단한 정치지도자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면서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40대 기수론 관철, 40대의 첫 정당 대표, 23일간 목숨을 건 단식투쟁, 1987년 6월 민주항쟁, 문민정부를 만든 3당 통합 등을 성공적으로 이끈 것은 YS이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YS와 정치를 하며 힘든 일도 적지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는 “호남사람들한테는 배신자라는 모함을 들었고, 영남사람들한테는 비서실장 등 요직을 맡자, 질투와 시기를 당해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경우도 많았다”며 “그러나 민주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의식이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소회를 밝혔다.
김 전 수석부의장은 “정치인은 물론 기업인이나 일반인들이라도 사회생활을 하며 ‘지금이 어느 때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정치인이라면 시대정신을 알고 소명의식과 책임감을 갖고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며 “YS와 나는 일생을 그런 정신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그는 “정치인은 역사 앞에 당당하고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며 “정의의 편에 서서 국민에게 부끄럽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고 정치권에 당부했다. 이어 “정치인은 대립된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피를 철철 흘리더라도 공동선의 방향에 서서 국민을 설득하고 시류에 영합하지 않아야 한다”며 “나 혼자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것이 아니라 나 하나라도 바로 서는 게 개혁의 시작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할 때”라고 덧붙였다. 지난 28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김 전 수석부의장의 사무실인 ‘덕린재’에서 인터뷰가 진행됐다.
―YS와의 인연이 궁금하다.
“서울대 재학 시절인 1963년 6대 국회 개원식에서 서울대 동문 여야 의원 24명 가슴에 꽃을 하나씩 달아준 것이 YS와의 첫 대면이었다. 그 후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자격으로 문리대 대학축제인 ‘학림제’에 문리대 선배인 당시 여당 대변인 구태회 의원과 야당 대변인 김영삼 의원 두 분을 초청해 선후배 간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6·3 굴욕외교 반대 서울대 투쟁위원장을 맡아 구속되고 제적을 당했을 때 당시 김영삼 원내총무는 나를 불러 식사를 하며 위로했다. 이후 청년들의 생각을 알고 싶다며 1년에 한두 차례 만나는 등 인연이 계속되면서 비서직 제안이 있었으나 사양했다. 7대 국회의원 총선 때는 공천을 줄 테니 출마하라고 권했으나 ‘정치인으로 설 만큼 스스로 갖추지 못했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럼에도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노인 정당이나 다름없는 신민당에서 40대 기수론을 주장하고, ‘초산 테러 사건’ 같은 탄압과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자랑스러운 선배로 존경했다.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관철시킨 YS는 1차 투표에서 앞섰으나 과반에 21표가 모자라 결선 투표에 들어갔다. YS는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의 배반으로 결선에서 DJ에게 역전패를 당했으면서도 흔쾌히 승복했다. ‘김대중의 승리는 나의 승리’라며 무주 구천동에서 거제까지 DJ를 위해 열심히 뛰는 YS를 보며 감명을 받았다. 경선에서 진 YS는 ‘비서실에 꼭 와 달라’고 거듭 요청해 이런 분을 도와야겠다 싶어 정식으로 비서로 입문했다.”
―3김씨와 함께 정치 활동을 했다. 장점을 소개하면.
“YS는 자기주장을 펴기보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편이다. DJ는 자신의 입장을 조리 있게 설명, 설득하는 재주가 대단했고, 신중했다.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경륜이 있는 정치인으로 멋과 매력을 중시하며 상대에게 자신을 기억시키는 능력이 뛰어났다. YS는 시간개념이 철저했다. YS가 당 총재가 되기 전 야당의 회의는 오전 10시에 개의한다고 공지해놓고 11시에 열리는 게 일쑤였다. 그러나 YS가 당 총재 취임 후 회의는 정시에 시작됐다. 또 비서들과 약속을 해도 5분 전에 항상 먼저 와 계셨다. 특히 매일 아침 경남 거제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화로 문안 인사를 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했다. YS는 비서의 건강까지 챙기는 등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정치는 남의 희생을 강요하고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강한데 YS는 그렇지 않았다. 한마디로 인간적이었다.”
―김 전 수석부의장은 보안이 철저하다.
“시대 상황이 그렇게 요구했다. ‘지퍼’라는 별명도 들었다. 독재 탄압과 정보정치에서 기밀을 지켜야 할 일이 많았다. 비서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어떤 의미에선 얼굴과 입이 없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입장에 변함이 없다. 야당 시절에는 집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와서 저녁에 못 들어갈 수도 있고, 또 언제 구속될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전화번호와 일정을 수첩에 적지 않았다. 당시 전화가 많지 않았지만 머릿속에 200~300개 집 전화번호를 입력시켜놓았다. 일정은 작은 메모지에 간단히 적었다가 나중에 찢어 없애버렸다.”
―군사독재 시절에 겪은 일화를 소개하면.
“1980년 5·18 광주사태 후 신군부가 들어서자 YS는 23일간 생명을 건 단식을 했다. 그 후 민주화 세력의 단합을 위해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민추협은 재야운동권과 힘을 합쳐 87년 6월 항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등 이 나라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으나 아직도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를 못하고 있어 아쉽다. 그 민추협의 모태는 민주산악회다. DJ는 구속돼 있었고, 1년간 자택에 연금된 YS는 풀려났으나 조직 결성은 물론 사무실조차 구할 수 없어 등산을 시작했다. 우리가 민주산악회를 발족했으나 기록을 하지 않아 맨 처음 등산 한 날을 몰랐다. 그런데 남산의 안기부에 끌려가 이틀간 밤잠을 못 자며 조사받는 과정에서 수사관들이 ‘민주산악회가 1981년 6월 9일, 도봉산에 첫 등산을 했다’고 말해 비로소 우리 ‘생일’을 찾았다.
또 정치규제에 묶여 있던 나는 여권을 만들 수 없었다. YS, DJ, JP, 김상현 전 의원 등 정치규제 대상자 14명이 12대 총선 직후인 85년 3월에 마지막으로 풀렸고, 거기에 내가 포함됐다. 당시 40대는 나 혼자였고 정치인 중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정치규제에서 풀려난 후 여권을 받아 86년 미 국무부 초청으로 첫 외국 땅을 밟았고, 일본과 영국 외무부 초청으로 다녀왔다. 그때 미국, 영국, 일본 정부의 초청으로 연수를 한 이는 내가 유일할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84년 방한했을 때 비신자이면서 고통받는 정치인을 대표해 교황을 알현했다.”
―문민정부에서 정무장관 2회, 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소회는.
“사심 없이 일했기에 부끄럽지 않다. 개인적 이득을 챙기고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거나 출세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무 소심하고 정치적 야망이 없다는 얘기를 주변으로부터 듣기도 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은 있다. 문민정부가 차분히 마무리를 잘했더라면 정권을 재창출해 정책의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야당의 반대로 금융·노동개혁 등을 제대로 하지 못해 IMF를 맞았다. 지금 내가 지혜롭거나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정치 신조가 있다면.
“정치하며 민주화, 정치개혁, 국민통합과 민족화합 등 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민자당 사무총장을 하며 한국정당사에 첫 당 부설 연구기관으로 여의도연구소(현 여의도연구원)를 설치했다. 지금은 정당의 국고보조금 가운데 30%를 정책개발비에 쓰도록 규정하고 있으나 당시엔 그런 의무조항이 없어 30억원을 조성해 연구소 기금으로 지원했다.
또 호남 출신으로 그동안 영남당에 있으며 여러 갈등과 역할에 한계를 많이 느끼면서도 영·호남 갈등 해결과 국민통합을 위해 앞장섰다고 자부한다.
750만 해외동포는 대한민국의 큰 자산으로 국가발전의 동력과 국가경영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1위 경제 대국과 세계 6위의 수출 대국이 된 데는 190여개국에 나가 있는 750만 해외동포의 역할이 컸다. 정부와 정치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해외동포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는데 앞으로는 이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현재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복수 국적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 현행 헌법 제2조에 규정한 ‘국가는 재외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는 조항을 ‘재외국민을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로 바꾸어야 한다.”
―정치의 요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정치는 국민을 통합하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또 선의의 경쟁을 하며 타협해야 한다. 그러면서 국가공동체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며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정치는 실종됐다. 여당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야당은 대안 없이 반대만 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번 총선 후에도 희망이 없다는 내 예측이 틀리기를 바라지만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아 걱정이 앞선다. 총선 후 개헌에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고 있다. 개헌을 하면 정치권의 토양자체를 변화시켜 새로운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대화와 타협의 정치, 연합의 정치, 협치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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