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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의세상보기] ‘워킹 부부’의 진정한 워라밸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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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9-11-25 22:33:07 수정 : 2019-11-25 22:3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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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일 균형 중시하는 트렌드 / 이젠 젠더 차이보단 세대 이슈 / 신세대 중심 ‘워킹부부’ 확산 속 / 시스템 정비·새 프로그램 필요

일전에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귀하는 워킹 부부를 위한 워크숍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 참석자는 모두 12명. 그중 워킹 맘이 7명이었고, 나머지 5명은 ‘워킹 대디’였다. 일단은 아빠 비율이 예상외로 높다는 사실에 고무됐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워킹 대디 호칭이 왠지 어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최 측에서는 워킹 맘도 있고 워킹 대디도 있으니 ‘워킹 부부’라 불러 달라 했고, 이 자리에 참여한 ‘워킹 대디’들은 나름 자녀 양육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면서 아내와 책임을 공평하게 나누고 있음을 애써 강조하기도 했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워킹 맘을 넘어 워킹 부부를 대상으로 육아휴직 후 이들의 적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음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라 생각한다. 워크숍 자리에서 제기됐던 대표적 민원은 단연 업무 배치와 관련된 것이었다. 육아휴직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새로운 부서 배치에 새로운 업무 할당까지 이루어졌는데, 업무 자체가 육아휴직 전 자신이 해왔던 업무와는 거리가 있기에 ‘그럼 나가라는 소리인가’라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한다는 호소였다. 예전 워킹 맘 입장에선 수시로 경험했던 상황이었을 텐데 이제 아빠들이 직면하게 됐으니, 사내에서도 중요한 이슈로 부상할 것이 틀림없고, 뒤를 이어 조만간 합리적이면서도 유연한 해결 방안이 제시될 것 같다.

아빠 육아휴직제도 도입 초기에는 육아휴직을 신청한 용감한(?) 아빠를 바라보는 시선이 항상 긍정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육아휴직 신청해놓고 자신은 로스쿨 시험 준비해서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는 둥, ‘아이는 장모에게 맡겨 놓고 자신은 승진 시험을 준비했다’는 둥 제도의 오·남용을 둘러싼 도덕적 해이를 비판하는 스토리가 떠돌아다니곤 했다.

한데 정작 아빠 육아휴직 제도의 복병은 따로 있었다. 막상 아빠 육아휴직 제도를 신청하려 하면 인사담당자의 까다로운 면접을 통과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제자가 직접 들려준 이야기인즉, 남편이 육아휴직 신청서를 제출하니 인사과에서 ‘육아휴직 신청자가 엄마가 아니라 아빠가 맞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또 확인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마지막에는 ‘만일 복귀한 후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육아휴직을 감행할 생각인지’ 위협과 회유가 섞인 이야기를 오래도록 들어야 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호주의 여성 저널리스트이자 정치평론가인 애너밸 크랩의 저서 ‘아내 가뭄’이 2016년 출간과 더불어 여러 국가에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음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크랩이 ‘아내 가뭄’이란 제목하에 함축적으로 담아냈던 것은 ‘지금까지 고위직에 진출한 여성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여성에겐 고위직 진출을 도와줄 아내가 부족했다’는 현실이었다.

나아가 크랩이 주목했던 또 하나의 현실은 ‘남성들도 때로는 밥벌이 역할을 멈추고 집으로 들어와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여성에겐 취업이 문제요 남성에겐 실업이 문제’라는 성차별적 인식에서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한 현실이야말로 심각한 반성을 요한다는 것이 크랩의 문제의식이었다. 직장에서 자녀가 있는 남성은 신뢰의 대상이지만 자녀가 있는 여성은 불신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비합리적인가를 환기하면서 말이다.

‘일 우선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직시하면서 자신의 삶과 일 사이에서 균형을 중시하고자 하는 트렌드가 신세대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음은 진정 반가운 일이다. 처음 ‘워라밸’ 개념이 소개되던 당시에는 워킹 맘의 일·가정 양립에 초점을 맞춘 젠더 이슈로 자리매김됐다면, 오늘날 워라밸은 신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 갈등을 유발하고 협상을 요구하는 세대 이슈로 이행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세대에게는 라이프가 일이고 일이 라이프였는데, 신세대가 주장하는 워라밸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는 기성세대의 주장에 대해, ‘우리는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 라이프가 필요하다’는 것이 신세대의 전형적 반응이다.

최근의 워라밸 관련 조사에 따르면 워라밸이 유지되지 않을 경우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탈진하는 ‘번 아웃’이 증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나는 좋은 아빠라고 생각한다’는 항목에 동의할수록 자신의 인생 전반에 대한 만족도도 높아지고 특별히 자아 존중감이 높아진다는 조사 결과는 매우 고무적이다.

워킹 부부가 넘어야 할 산이 하나 더 있다. 요즘 ‘CC’는 캠퍼스 커플이 아니라 컴퍼니(사내) 커플을 지칭한다는 것은 상식이라는데, 사내 커플로 만나 워킹 부부가 된 경우 직장 탁아 및 육아휴직을 위시해 자녀양육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부부의 커리어 관리에는 의외의 복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부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는 만큼 부부 중 한 사람만 ‘밀어줄 수 있는데’ 이때 당연히 수혜자는 가장인 남편이 된다는 것이다. 한국식 가족주의가 미묘한 방식으로 사내 커플의 커리어 관리에 영향을 미치는 셈이다.

이제 워킹 부부가 의미 있는 트렌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특히 신세대를 중심으로 젠더 차이보다 세대 공통점이 보다 두드러지는 상황에서, ‘아내 가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구태에서 벗어나 워킹 부부의 워라밸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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