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 서거, 그 후 500년
지난여름 방문한 이탈리아는 굵직한 미술 행사로 가득 차 있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같이 동시대 미술을 만나볼 기회는 물론이고 서양 미술사를 장식한 예술가를 재조명하는 자리도 많았다. 그중 기억에 남은 것은 이탈리아 곳곳에서 열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 서거 500주년 기념 전시들이었다. 고향인 빈치의 레오나르도 박물관에서는 다빈치를 연구하는 학회가 다음달 15일까지 열린다. 작가로 성장한 피렌체에서는 우피치 미술관, 대표작 ‘최후의 만찬’이 위치한 밀라노에서는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했다.
#세기의 걸작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가 탄생하기까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 교외에 자리 잡은 빈치에서 태어났다. 빈치는 도나텔로, 베로키오 화파 등이 있어 회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그는 영향력 있는 공증인인 세르피에르를 아버지로 두었지만, 적자가 아닌 혼외자였다. 다섯 살 때까지는 어머니가 키웠고 그 이후로는 아버지 집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졌다.
평탄치 않은 성장 과정에서 그의 곁을 지켰던 것은 할아버지였다. 다빈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자연을 거닐었다. 몸을 숙여 풀과 나무를 살펴보던 습관은 훗날 작품에서 드러나는 면밀한 관찰의 바탕이 됐다. 관찰의 정도가 깊고 결과물이 정확해 건축가, 과학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넉넉한 아버지 집에서 자라며 다양한 주제를 공부할 수 있었다. 수학, 물리학, 음악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지만 그가 특히 즐긴 것은 미술이었다. 세르피에르는 아들의 소묘 몇 점을 피렌체에서 대가로 칭송받던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1435∼1488)에게 보냈다. 혼외자여서 대학에 갈 수 없기에 찾은 행보라고 보는 이도 있다. 그렇게 다빈치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베로키오 공방에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됐다. ‘비너스의 탄생’(1485)으로 유명한 보티첼리 역시 이 공방 출신이다.
다빈치도 처음에는 다른 문하생들과 같이 바닥 청소 같은 허드렛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서야 안료를 빻고 붓을 닦는 일을 시작으로 그림에 손댈 수 있었다. 그의 손놀림은 점차 놀라운 작품들을 완성하기 시작했다. 스승인 베로키오가 제자가 자신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일화는 유명하다. 그 충격이 커서 더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조각에 몰두했다고 한다.
다빈치는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독립한 뒤에도 피렌체에서 활동했다. 서른이 된 다빈치에게 삶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스포르차 가문의 공작이었다. 밀라노에서 자신의 건축가이자 전속 화가로 일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다빈치는 이주 이후 토목공사를 주로 하며 회화와 조각 작업을 선보여 크게 성공했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에 ‘최후의 만찬’(1495~1497)을 그린 것도 이 시기다.
밀라노에서의 삶은 만족스러웠다.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머무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잦은 전쟁 여파로 그는 그곳을 떠나 피렌체, 로마 등지에 머물러야 했다. 로마에서는 성스럽게 여길 만한 일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에 참여하게 됐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브라만테와 함께 건축은 물론 천장화 등 예술적 부분을 맡았다. 예순한 살이었던 그는 서른여덟 살인 미켈란젤로, 서른 살의 라파엘로와 세대 간에 갈등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 이 시기에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가 다빈치의 재능에 감복해 자신의 땅에 와서 살기를 바랐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해주는 이를 만난 기쁨에 늦은 나이지만 이국에서의 새 삶을 시작했다. 이때 꾸린 이삿짐 안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으로 불리는 ‘모나리자’(1503∼1506)가 들어있었다. ‘모나리자’가 이탈리아의 어느 미술관이 아닌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경로다.
#드로잉을 통해 보는 다빈치의 ‘과학적인 미술’
믿기 어렵지만 다빈치가 평생 남긴 회화 작품은 열다섯 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유명 작품들이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주문 받은 일감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다양한 관심사를 가진 탓에 하나에 매달리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스무 시간을 깨어 있었지만 그림을 그리다 곧 밀쳐 두고 기하학 문제를 풀거나 건축자재를 실험하기 일쑤였다.
이런 연유로 그가 남긴 것 중 회화는 일부고 드로잉이 대부분이다. ‘오른쪽을 향한 성모마리아의 옆모습’(1510∼1513)은 다빈치가 남긴 드로잉 중 특히 아름답다. 그는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는 이 드로잉을 완성하기 위해 분필과 목탄을 번갈아 사용했다. 목탄의 번짐으로 얼굴의 굴곡과 깊은 눈매 등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했다. 이후 상대적으로 딱딱하고 뾰족한 분필로 머리카락 등을 예리한 획으로 그어 완성했다.
다빈치가 자주 남긴 드로잉의 전형은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돌보는 장면을 그린 구성 스케치’(1480∼1485)에서 볼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 중인 ‘암굴의 성모’를 그리기 전에 사전 연구를 한 흔적이다. 대상이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모습을 남겼다. 드로잉의 우측 하단에 선을 그어서 만들어 낸 각도로 보는 이의 시각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그는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그림을 그렸다. 사람과 동물을 그릴 때도 실제를 반영하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했다. 직접 시체를 해부하고 장기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스케치로 남기기도 했다. ‘모나리자’의 신비로운 미소가 어쩌면 안면 근육의 구조를 나타내는 과정에서 생겼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 이유다.
#이번 가을, 루브르 박물관에 가고 싶은 이유
다빈치는 프랑스로 삶의 터전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예순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 1519년 5월2일의 일이었다. 다빈치는 자신이 머물던 클로 뤼세 성(城) 소유자의 팔에 안겨 숨을 거뒀다. 하지만 훗날 최초의 미술사가 중 한 명인 조르조 바사리 등에 의해 프랑수아 1세의 품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각색한 이 모습을 남긴 그림들이 여러 점 존재한다.
다빈치는 이렇게 누군가의 품에 안겨 생을 마감했다. 주변을 둘러싸고 지켜보는 이도 많았다. 그가 마지막 남긴 말은 “내가 해야 할 만큼의 예술을 해내지 못해 신과 인간들에게 죄를 지었다”였다. 그는 완성한 작품의 숫자로 평가할 수 없는 업적을 세상에 남겼지만, 어떤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더 완벽하기를 추구하는 천재적 인물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서는 다음달부터 4개월간 다빈치 특별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개최한다. 다빈치 서거 500주년 행사의 백미일 것이라 예상하며 사람들의 기대가 쏠리고 있다. ‘모나리자’등 루브르 소장품 외에도 런던, 아부다비 등으로부터 회화를 빌려온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22점의 드로잉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이제 여행의 맛에서 벗어나 현실에 집중할 때가 지났는데도 이 이야기를 들으니 어느새 파리행 비행기를 찾게 된다. 아마 가지 못하겠지만 전시장 한가운데 서서 다빈치의 회화에 둘러싸여 있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 감동이 몰려온다. 가을 파리에 여행을 간다면 꼭 권하고 싶은 전시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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