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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스탈린그라드에서 1980년 광주까지…배우 크레취만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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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9-21 16:30:00 수정 : 2018-09-21 1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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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아픔 연기한 배우, '광주의 恨' 말하다 프랑스의 우승으로 끝난 올해 러시아 월드컵 예선전 경기가 열린 도시들 가운데 ‘볼고그라드’라는 곳이 있다. 잉글랜드 대 튀니지(잉글랜드가 2대1 승리), 나이지리아 대 아이슬란드(나이지리아가 2대0 승리), 사우디아라비아 대 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가 2대1 승리), 폴란드 대 일본(폴란드가 1대0 승리) 이렇게 4경기가 볼고그라드에서 치러졌다. 경기가 열릴 때마다 이 도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거대한 조각상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가 중계 화면에 잡혔다.
러시아 서부 대도시 볼고그라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인 조각상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의 야경. 높이가 85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조각상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2∼1943년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의 옛 이름) 전투에서 전사한 소련군의 희생을 추모하고 기념하고자 만들었다.
◆러시아 월드컵 열린 볼고그라드 옛 이름은 ‘스탈린그라드’

‘지난 대회 우승국 독일과 개최국 러시아가 한 조에 속해 볼고그라드에서 경기를 한다면 너무 잔인한 일이 될까.’ 월드컵이 개막하기 전 이런 생각을 해본 축구 팬이 많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일과 러시아는 서로 다른 조에 속했고, 볼고그라드에서 두 나라 대표팀이 맞붙는 그런 ‘끔찍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24일 러시아 전문 사이트 등에 따르면 볼가강 유역의 대도시 볼고그라드의 원래 이름은 ‘차리친’이었다. 러시아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한 이후인 1925년 당시 소련 국가원수이던 스탈린의 이름을 따 ‘스탈린그라드’로 개명됐다. 그리고 1961년 독재자 스탈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도시 이름을 다시 ‘볼고그라드’로 바꿔 오늘에 이른다.

볼고그라드가 스탈린그라드이던 1942∼1943년 이곳에서 벌어진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투가 도시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위세가 꺾이고 소련 등 연합국이 승기를 잡는 결정적 계기가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다. 1942년 7월 시작해 1943년 2월까지 200일 넘게 벌어진 전투에서 패자인 독일군과 승자인 소련군을 더해 무려 20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 이후 독일에선 한동안 스탈린그라드가 아예 금기어가 되다시피 했다. 러시아인들은 2차대전 당시 같은 연합국이었던 미국, 영국 사람들과 만나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러시아의 희생이 없었다면 전쟁에 이기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85m 높이의 조각상 ‘조국의 어머니가 부른다’는 바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치른 희생을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영화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과 싸우다 사실상 전멸한 독일군 부대 장교로 분장한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왼쪽).
◆2차대전 최대 격전지… 독일군·소련군 합해 200만명 전사

지난해 여름 개봉해 12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영화 ‘택시운전사’에는 벽안의 독일인 배우 한 명이 등장한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취재한 독일 언론사 기자 위르겐 힌츠펜터 역할을 맡은 토마스 크레취만(56)이다. 그 크레취만이 1993년작 독일 영화 ‘스탈린그라드 : 최후의 전투’의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스탈린그라드’는 국내에는 1997년 소개됐는데 개봉 당시 관객 수가 500여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탈린그라드’는 2차대전의 여러 전투 가운데 가장 끔찍하고 참혹했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수작이다. 이 영화에서 크레취만은 독일군 중위 ‘한스 폰 비츨란트’로 출연했다. 그가 연기한 비츨란트는 명문 귀족 집안 출신으로 장교의 명예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며 원칙을 지키려고 애쓰는 젊은 군인이다.

영화는 막 스탈린그라드 전선에 투입된 비츨란트가 겪는 수난으로 시작한다. 소련군 포로를 가혹하게 대하는 몇몇 독일군 병사의 악행을 고발하려던 그는 되레 상관으로부터 ‘그런 쓸데없는 일에 신경 끄라’는 핀잔만 듣는다. 공장 건물 안에서 벌어진 시가전 도중 소련군 측에 ‘양측이 시신을 수습하고 부상자를 후송할 수 있도록 잠시 휴전하자’는 제안을 했다가 일부 부하의 반발에 무위로 돌아간다. 원칙과 탈법,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던 비츨란트는 결국 탈영을 결심하지만 그 또한 불발에 그치고 만다. 결국 독일군 대부분이 소련군에 항복한 1943년 2월 그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비츨란트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한 독일인 기자로 분장한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1980년 봄 광주, 1942∼43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와 비슷"

지난해 ‘택시운전사’ 개봉에 맞춰 내한한 크레취만은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이 비츨란트 중위 역으로 출연한 ‘스탈린그라드’와 ‘택시운전자’를 비교하며 비슷한 영화라고 표현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택시운전사’와 유사한 작품 ‘스탈린그라드’에 출연한 적이 있다”면서 “‘스탈린그라드’ 영화를 본 러시아 관객들이 마지막 30분 내내 우는 걸 보고 오히려 내가 더 감동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택시운전사’는 내가 근래에 참여한 작품 중 가장 임팩트 있고 유의미한 영화”라고 극찬했다.

‘스탈린그라드’의 주인공들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징병돼 전장에 뛰어든 이가 대부분이다. 전쟁만 아니었다면 따뜻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 또는 여인과 오붓하게 크리스마스를 즐겼을 젊은 남자들이 1942년 12월 스탈린그라드의 그 매섭고 참혹한 추위 속에 하나둘 쓰러져갔다. 전장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은 병사들이 독일어권 국가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장 널리 불리는 동요 ‘오 탄넨바움(전나무) 오 탄넨바움’을 부르는 장면은 너무나 애절해 눈물을 참기 힘들 정도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젊은이가 자기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막강한 공권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돼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하지만 세계인이 다 아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달리 광주민주화운동은 한국 밖에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스탈린그라드’의 주인공이었던 크레취만은 국내 언론에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는 이제 (스탈린그라드처럼) 세계적으로 더 잘 알려져야 한다”고 밝혔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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