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성(48·〃) 전 청와대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에게 조자룡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뒤늦게 불거진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특활비) 상납 혐의를 순순히 자백하는 그의 모습은 ‘모든 건 내 탓’이라던 기존 입장과 상반된다. 안봉근·이재만 두 전직 청와대 비서관이 “박 전 대통령 지시에 따라 국정원 돈을 상납받았다”고 진술한 상황에서 이제는 정 전 비서관마저 등을 돌리는 모양새다.
“대통령께서 재판받는 참담한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증언을 일절 거부합니다.”
공무상 비밀누설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정 전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그야말로 ‘둘도 없는 충신’으로 통했다. 박 전 대통령이 ‘비선실세’ 최순실(61·〃)씨에게 국가 기밀문서를 “컨펌(확인) 받으라”고 지시한 혐의에 대해서도 “그건 대통령이 아닌 내가 잘못한 것”이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정 전 비서관은 ‘청와대 문건유출’을 박 전 대통령의 ‘애국심’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지난달 25일 법정에서 “실무진에서 기획한 대로 했으면 대통령께서도 편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더 잘해보시겠다는 생각에 (최씨에게) 조언을 구하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지인에게 의견을 묻는 건 정상적인 통치행위라고 생각했다”며 시종일관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정 전 비서관의 충심에 감복한 박 전 대통령은 눈물을 보이며 목례로 화답했고, 유영하 변호사는 울먹이며 생수를 들이켰다. 지켜보던 박 전 대통령 지지자들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부장판사 김세윤) 심리로 재판이 열린 417호 형사대법정은 한바탕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신파극장으로 변했다. 법정 경위들은 원활한 재판 진행을 위한 정숙 유지를 당부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정 전 비서관은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직후 자취를 감춘 안봉근·이재만 두 전직 비서관과 달리 ‘옛 주군’의 결백을 주장하는 유일한 ‘충신’으로 급부상했다. 박 전 대통령의 지지세력은 “역사가 당신을 재평가할 것”, “차기 국회의원감”이라며 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그랬던 그가 결국 돌아섰다. 정 전 비서관이 국정원 특활비를 받아 챙긴 사실을 검찰에 자백했다. 두문불출하던 안봉근·이재만 전 비서관이 지난 3일 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된 시점과 맞물려 벌어진 일이다.
국정원의 특활비 상납 정황이 새롭게 포착되면서 정 전 비서관 본인은 물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추가 조사도 불가피해졌다. 서초동은 ‘박근혜정부 비자금 사건’이라는 블록버스터급 사건을 맞이하게 됐다.
역대 대통령 중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형사처벌 받은 인물은 1995년 11월 특가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돼 징역 15년에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은 노태우 전 대통령 이래 없었다.
최측근인 ‘문고리 3인방’의 자백에 이은 박근혜정부 시절 역대 국정원장들이 줄줄이 수사받는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 혐의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영원한 ‘조자룡’이 되는 길을 포기한 정 전 비서관의 1심 선고 공판은 오는 15일 열릴 예정이다. 앞서 검찰은 그에게 징역 2년6개월을 구형했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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