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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대한민국 ‘공평무사의 리더십’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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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23 06:00:00 수정 : 2017-04-22 17: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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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지식인’ 홍일립 박사 “요즘 대통령 선거 과정을 보면, 마치 초등학교 반장 선거하는 모양새가 연상됩니다. 공평무사의 사회, 공정한 사회 룰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도자의 덕목이지요.”

현대 사회 사상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홍일립(61) 박사. 1970∼80년대 학생운동권의 이론가로 흔치 않은 이력을 지닌 그는 장관 자리도 거절한 지식인이다. 최근 ‘인간 본성의 역사(1184쪽, 에피파니)’를 출간한 홍 박사를 만나 다양한 견해를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20일 경기 성남 분당에 있는 개인 서재에서 2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대학 시절부터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모친께서 어려운 가정을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회적 현상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겨났다. 집안의 장손으로 자라면서 팍팍한 가정 상황을 보며 성장했으니 일찍 철이 들었을 것이다. 초등 5학년 때부터 신문을 읽었으니까. 같은 반 아이들 가운데서도 부잣집 아이들과 그렇지 못한 아이들 간의 차이를 조금 일찍 깨달았다. 중3 때부터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 생계를 도왔다. 대학에 입학했을 무렵엔 기관 요원이 접근해 협박하는 바람에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집 주변에선 맨날 감시하는 눈초리가 번뜩이던 걸 느꼈다. 잡혀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공부해서 뭐 할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막말로 고시 공부라도 해서 하루빨리 모친을 도와드려야 할 처지였는데도 말이다.”

―정보기관 요원이 따라붙었다니 집안 내력에 무슨 ‘딱지’라도 붙었나.

“모친께서는 기관원들의 감시에 몹시 시달렸던 걸 기억한다. 고모님이 한 분 계셨는데, 6·25전쟁 때 북으로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남로당 계열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도여자사범대학을 졸업한 당시로선 인텔리 여성이었다. 월북해서 꽤 높은 직위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다 보니 항시 감시당하면서 성장했던 것 같다.”

―당연히 대학 시절에 이른바 데모 대열의 선두에 섰을 것 같다.

“어떻게 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살 수 있을까 고민했다. 어릴 때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미 대학에 가기 전 혁명이란 용어에 눈을 떴다.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분노에 빠져들곤 했다. 그래서 지금도 평등주의는 나의 신념 맨 앞에 있다. 대학에 가보니 정말로 숨도 쉴 수 없었다. 그 시절 이름 없이 사회운동에 뛰어들어 자신을 희생하고 사회개혁에 몸 바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운동권 출신 계급장을 달고 자랑스레 왔다 갔다 하는 지금 정치권의 몇몇 인사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순수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람다운 삶, 최소한의 인간 자유를 추구했다. 출세보다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정 또는 인간의 기본 생존권에 더 관심이 많았던 사람들이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신간 ‘인간 본성의 역사’를 출간한 홍일립 박사는 “공정하고 공평한 룰이 적용되는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제현 기자
―마르크스 혁명이론에 공감했다가 돌아섰다는데.


“독일 철학자 칼 마르크스는 인류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임에 틀림이 없다. 계급의식의 고양 및 자각을 통해 인간을 개조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의 초기 믿음이다. 주체사상을 통해 인민을 개조한다는 북한 김일성도 그런 맥락이다. 지난 세기 공산주의자들은 사상개조를 통해 인간 본성을 개조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20세기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적 견해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고, 지나치게 소박한 인간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분명 19∼20세기를 풍미한 사상가였다.

“물론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은 지금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돈 즉, 자본이 신이 되어 가치가 전도되어 버린 상황, 그럼으로써 부자와 빈자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 자본에 의한 이윤추구는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라고 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당시로선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지금도 마르크스 이상으로 속물 자본주의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인 사람은 없다.”

―한때 현실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무엇인가.

“사회변혁 운동의 연장선상에서일 뿐 정치할 생각은 없었다. 2000년 전후 상황은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는 중대한 시기라고 믿었다. 해방 이래 정권을 장악한 보수 정부가 아니라 진보 세력이 국가를 이끌어간다면 아마도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이 제대로 된 삶을 영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치에 대한 나름대로 소망이었다.”

주위에선 노무현 정권 탄생에 일등공신이었다는데.

“김대중 정권 중반 무렵, 모 월간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보수 진영의 대항마로 진보 인물을 제안했다. 총선에서 떨어지고 당 부총재로 밀려나 있었던 노무현씨가 유력후보로 떠올랐다. 전화 연락을 했더니 놀라는 눈치였다. 그 역시도 자신이 어떻게 대권 후보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반신반의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그의 경솔한 언행을 우려했다. 그가 초래한 불안정성은 높은 지지세를 다 까먹고 궁지를 자초했다. 나는 노무현측 협상대표로 나서 당시 정몽준 후보 측과 단일화를 성사시켰지만 막상 본선은 이기기 힘든 게임이었다. (노무현, 이회창 후보 가운데) 누가 이기든 정당성을 담보하기 어려웠다. 15년이 지난 이야기를 새삼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한국 정치사상 초유의 사태였기에 여러 실책들이 있었다. 룰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상대(이회창 후보) 측에서 좀 더 많은 실수를 했고, 결과적으로 노무현 측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당연히 장관도 할 수 있었는데, 왜 박차고 나왔나.

“나는 생리적으로 권력 주변에 얼쩡거리는 행태를 싫어한다. 할 일이 끝났으면 자리를 떠야 하는 거 아닌가? 가령 인수위 시절이었다. 노무현 당선인이 사석에서 농담하는 것까지 꼬박꼬박 받아 적는 이들을 보면서 ‘웃기는 정부’가 되겠다 생각했다. 나의 성정이라고 할까. 우려했던 대로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일년 만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집권 기간 동안 좀처럼 회복하지 못했다. 정치는 그 판에 맞는 인사들이 하는 것 같다. 요즘 일부 대선 후보의 행태를 보면 마치 초등학교 반장선거를 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뽑는 데 너무 과한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현대 대의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심각한 딜레마가 이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루이 알튀세는 ‘역사는 아주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 사태도 그렇다. 이번 탄핵은 과거몽상형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이 역사를 역류시키려는 인위적인 시도를 하다가 역사의 물줄기에 떠밀려 쓰러진 꼴이다. 하지만 다소간의 불만이 있더라도 민주정치의 역사는 큰 틀에서 보면 조금씩이나마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면에서 희망을 가져보자.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삶은 그 밑거름이 되고 있다.”

―북한이 연일 미사일을 쏴대는데 어찌해야 할 것인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핵문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 원천 배격―평화 보장’이라는 대전제 아래 해법을 찾아야 한다. 북한을 경제적, 물리적으로 압박한다고 해결될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원점 타격이니 불바다를 만들겠다느니 하는 것들은 말장난이다. 국제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극우적 모험주의는 무책임한 발상이다. 극단적인 발상은 배제되어야 한다. 21세기형 햇볕정책을 재구성할 때이다.”

―삶의 진로를 고민하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나이 먹었다고 해서, 또는 많은 경험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할 만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장자크 루소의 견해를 빌리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순진함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단일한 기준만을 가지고 다양한 삶을 일률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우리가 함께 모여 사는 사회적 공간에서, 룰을 지키면서 상생과 공존의 가치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개인의 사적 경험을 앞세워서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거나 간섭할 필요는 없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청년들에게는 분명 기회가 올 것이라 믿는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홍일립은

△1956년 서울 출생 △1975년 연세대 사회학과 입학 △도서출판 세계, 현대리서치, (주)클리오 창업 △노무현 후보 대선총괄기획실장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객원연구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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