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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뉴스속 그들과 기타, 지금은…> 죽거나 옥살이하거나 흩어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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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이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3년이 된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승객과 승무원 476명(안산 단원고 2학년 325명, 단원고 교사 14명, 일반승객 108명, 선원 29명)이 탄 세월호는 진도 맹골수도 해역서 침몰, 295명의 사망하고 9명을 찾지 못하는 등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

희생자 중 꿈많았던 10대 단원고 학생이 250명이나 돼 온 국민은 안타까움을 발을 동동 굴렸다.

대한민국 탄생이래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큰 충격파를 던졌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뉴스에 가장 등장했던 주인공들은 지금 어떻게 됐을까. 

◇ 박근혜, 대통령에서 지금은 파면당해 구치소 독방신세 

세월호와 관련한 각종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이는 당연히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4월 16일 9시53분 세월호와 관련해 첫 서면보고를 받았다.

이후 7시간 22분이 흐른 오후 5시15분 중앙대책본부에 도착, "장비와 인력을 총동원해 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사진=YTN 캡처>를 내렸다.

세월호와 관련해 국민들이 처음으로 박 전 대통령 모습을 본 순간이다.

대형 재난 때면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분초를 다퉈가며 직접 메시지를 전달, 희망과 격려· 단결 등을 호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세월호 7시간'논란을 낳았다. 

박 전 대통령은 다음날인 4월 17일 진도를 찾아 "책임이 잇으면 누구라도 처벌하겠다"고 가족들앞에서 약속했지만 '세월호 7시간'으로 신뢰를 잃은 뒤였다.

박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사상 최초로 파면당한 불명예를 기록했으며 3월 31일 구속영장이 발부돼 서울구치소 독방에 갇힌 신세가 됐다.   

◇ 정홍원 국무총리, 물벼락-책임지고 사퇴-후임자 못구해 10개월 뒤 물러나, 최근 팽목항 찾아 가족들 위로 

세월호 당일 박근혜 정부 초대 국무총리였던 정홍원 총리는 파키스탄과 중국 방문을 마치고 그날밤 10시 무안공항에 내린 뒤 대책본부가 꾸려진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았다가 분노한 가족들에 의해 상의가 벗겨지고 욕설과 물세례<사진=SBS TV 캡처>를 받았다.

가족들은 당국의 실종자 집계오류와 소극적인 구조 방법에 대해 항의를 "우리 아이들 살려내라", "잠수정을 왜 투입하지 않느냐" 정 총리 일행을 둘러쌌고 분노를 터뜨렸다.

정 총리는 "책임있게 (구조작업을) 하겠다"고 약속하며 현장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몇몇 사람이 던진 생수병에 맞아 머리와 옷이 젖었다.

정 총리는 사고 11일 뒤인 2014년 4월 27일 "사고 희생자들에 머리 숙여 조의를 표하고, 유가족 여러분께 마음 깊이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며 "내각을 총괄하는 총리로 책임 지고 물러나겠다"고 사의를 표명했다.

하지만 정 총리는 10개월여 뒤인 2015년 2월 16일에서야 물러나 게 됐다.

후임으로 내정된 안대희, 문창극 후보가 줄줄이 낙마한 까닭에 총리직을 이어갔으며 그 기간 중 25일가량 진도에 머물렀다. 그의 후임은 이완구 총리.

정 전 총리는 세월호 인양작업이 완료된 직후인 지난 3월 26일 오후 4시5분쯤 진도 팽목항 분향소를 찾아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났다.

정 전 총리는 가족들에게"항상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며 고개 숙였다.

◇ 이주영 해수부 장관, 217일간 팽목항에서 가족과 함께, 지금은 한국당 공동선대위원장

세월호와 관련해 가장 힘들었던 정부 관계자 중 한명이 당시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이었다.

4선 국회의원으로 있던 그는 2014년 3월 6일을 해수부 장관에 올라 물러날 때까지 해양 참사, 사고와 관련된 일에 매달려야만 했다.

취임 첫날 경남 남해 우이산호 침몰 유류피해 현장을 찾았던 이 장관은 세춸호 참사 직후 진도에 꾸려진 범정부사고대책본부 본부장을 맡아 11월 18일까지 217일간 팽목항에 머물렀다. 

팽목항을 떠날 때 이 장관은 "해수부 장관으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음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사고 발생 다음날부터 본부장으로서 업무를 시작했다"며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아파할 틈도 없이 실종자 수색 구조 활동과 가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기 위해 현장을 지켰다"고 심경을 피려했다.

또 "실종자 가족과 함께 팽목항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는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슬픔에 절규하는 가족들을 보면서 마지막 한 분이라도 놓치지 않고 수습하겠노라고 입술을 깨물었다"고 회상했다.

세월호와 관련해 여러차례 사의의사를 나타냈던 이 장관은 2014년 12월 24일 사표가 수리돼 퇴임했다.

그 후임은 81일 뒤인 2015년 3월 17일에서 유기준 장관으로 정해졌다.

이 전 장관은 20대 총선에서 5선에 성공, 현재 자유한국당 공동선대위원장, 국회 개헌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 해경, 동네북 신세가 된 끝에 독립 18년만에 해체, 최근 부활 목소리도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구조를 책임졌던 해양경찰은 가장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전 예방도 보고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뒤에도 갈팡질팡해 막을 수도 있었던 희생을 막지 못했다.

국민적 분조가 들끓자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해경 해체'를 선언했다.

지난 1953년 12월 16일 내무부 치안국 경비과 소속 해양경찰대 로 탄생한 해경은 1996년 8월 8일 해양수산부 소속 외청으로 경찰로부터 독립했지만 세월호 참사로 2014년 11월 19일 공식 해체와 동시에 국민안전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흡수됐다.

세월호 당시 해경을 총지휘했던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은 11월 18일 퇴임식에서 세월호 구조 실패를 뼈아프게 자성하면서 조직을 지키지 못한 잘못을 사과했다.

세월호 참사 책임을 해경에게만 지웠다는 시선과 중국어선 등의 불법조업 등 여러 이유로 지금은 해경을 다시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다음은 해경의 주요 연혁이다 .

* 1953.12.16 내무부 치안국 경비과 소속 해양경찰대 신설

* 1955.02.07 상공부 해무청 해양경비대로 개편

* 1962.05.05 내무부 소속 해양경찰대로 개편

* 1991.08.01 경찰청 소속 해양경찰청 개청

* 1996.08.08 해양수산부 소속 외청으로 해양경찰청 개편

* 2008.02.29 국토해양부 소속 외청으로 해양경찰청 개편

* 2014.11.07 정부조직법 개정안(국민안전처 신설) 국회통과

* 2014.11.19 국민안전처 출범

 

◇ 이준석 선장, 혼자 빠져 나왔지만 무기징역 옥살이 중

세월호 참사당시 자신을 포함해 476명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졌던 이준선 선장은 승객들에게 대피하라는 지시도 내리지 않고 속옷바람으로 혼자<사진=YTN캡처> 빠져나갔다.

부작위 살인죄와 유기치사·상, 업무상과실 선박매몰, 해양환경관리법, 선원법 등으로 기소된 이 선장은 1심에서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아 징역 36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15년 4월 28일 항소심은 살인죄를 인정, 무기징역형을 내렸다.

이 선장은 2015년 11월 12일 대법원에 의해 무기징역을 확정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 유병언, 세월호 선사 청해진해운 실소유주로 체포피해 떠돌다 야산 밭에서 숨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자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 해운과 세모그룹, 그리고 유병언(1941년 2월 11일 ~ 2014년 5월에서 6월 사이) 전 세모그룹 회장에 대해 관심이 집중됐다.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를 이끌던 유 회장(사진)은 4월 23일 "내 재산은 2400억원이 아닌 100억원뿐이며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하지만 차일 피일 약속을 미뤘고 검찰 소환에 불응했다.

이에 2014년 5월 16일 세월호 실소유주 비리 수사에 나선 인천지검 특별수사팀(팀장 김회종 2차장검사)은 수백억원대 횡령·배임 및 조세포탈 혐의로 유 회장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체포에 나섰지만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수사당국은 5월 25일 전남 순천 별장을 급습했으나 검거에 실패했으며 대한민국 형사범 사상 최고 현상금인 5억원을 내걸고 유병언 회장을 수배했다.

밀항설 등 각가지 소문이 떠돌던 가운데 2014년 6월 12일 순천 별장 근처에서 노숙자로 추정되는 남성 시신이 발견됐다.

부패가 상당히 진행됐고 해골만 남아 발견초기 유병언이라는 생각오 못하는 등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7월 21일 ,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DNA검사 결과 유병언임을 확인했다"고 수사기관에 통보했다.

이어 다음날인 7월 22일 유병언 사망이 공식 발표됐다.

유병헌 회장에 대한 장례는 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 총본산 금수원에서 2014년 8월 30,31일 이틀에 걸쳐 치러졌다. 

◇ 노란 리본, 세월호 하면 떠 오르는 무사귀환의 상징

세월호 참사 이후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뜻으로 노란 리본 캠페인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졌다.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큰 기적을'이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 리본은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확산되면서 전 국민적 캠페인으로 확산됐다

이후 노란 리본은 세월호 희생자와 아픔을 어루만지는 위로이자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노란 리본은 17세기 영국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영국 시민전쟁(1642~1651) 당시 청교도 군대가 노란 리본과 띠를 두르고 전쟁터에 나갔으며 이후 미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선 남북전쟁(1861~1865) 때 3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남자가 애인에게 자신을 잊지 않았다면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달라는 부탁을 담은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러한 노란 리본에 얽힌 이야기는 몇몇 책에서 다뤄졌고 1973년 토니 올랜도와 돈의 빅 히트송인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 이후 기약의 상징으로 보다 널리 인식됐다.

1979년 미국인 52명이 이란 주재 미 대사관에 인질로 잡혀있을 때 노란 리본 달기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 주목을 끌기도 했다.

세월호 2주기 때인 2016년 4월16일 전남 순창고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대형 노란 리본(사진)을 만드는 등 지금도 노란 리본은 우리곁에 머물고 있다.

박태훈 기자 buckba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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