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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오뚝이 인생’ 김두관 “늘 가보지 않은 길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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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17 21:21:15 수정 : 2017-03-17 21: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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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꾼’ ‘전문대 입학, 4년제 대학 편입’ ‘시골 동네 이장, 군수, 장관, 장관 해임, 도지사, 국회의원’ ‘10전 4승 6패’

더불어민주당 김두관(58) 의원이 살아온 길이다.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이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끊임없는 도전과 시련 끝에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지난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김 의원은 자신의 성장과정, 성공과 실패의 경험담을 솔직 담백하게 털어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어물전을 하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자란 그는 국민대에 합격했으나 입학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고교 졸업 후엔 마늘농사를 짓는 농부로 변신했다.

주위의 권유로 뒤늦게 경북 영주에 있는 경상전문대학(현 경북전문대학)에 입학한 그는 조그마한 일로 좌절을 겪었다. 김 의원은 “모 전문대 여학생과의 미팅을 앞두고 친구들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4년제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다”며 “4년제 대학을 나와야 사람 노릇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미팅 불발건’은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그는 “서열과 신분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당초 공무원을 하려고 했으나 편입해서 진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했다.

동아대에 편입 후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에 가입해 직선제 개헌을 위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정국의 최대 이슈였다. 1986년 청주에서 개최된 민주헌법쟁취 충북도민결의대회에 참여한 그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의원은 “3개월간 교도소에 있으면서 농민운동, 사회변혁운동을 전개해 농촌과 지역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민통련 인사들이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 가야 한다’며 ‘서울행’을 끈질기게 설득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고향에 정착해 남해 농민회를 결성했고, 사무국장을 맡아 농민운동을 본격 펼쳤다. 이듬해엔 이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행정과 주민을 연결하는 고리 역할에 충실했고, 빗자루를 들고 마을청소를 하는 등 동네일에 솔선수범했다.

농부 시절 마늘을 경운기에 싣고 있는 김 의원.
김 의원은 가보지 않은 길을 가기로 했다. 언론에 문외한이었던 그가 지역주민 주주공모 형식으로 주간 남해신문을 창간한 것이다. 김 의원은 “지방자치제 실시 전이었지만 지방의 중요성, 지역 주민의 알권리 충족과 소외계층을 대변할 매체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며 신문 창간 동기를 설명했다. 그는 “신문을 운영하며 이보다 더 힘든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웠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지역신문에 열정을 쏟았고, 그의 적극적이며 활달한 성격은 자연스럽게 지역주민과의 소통으로 연결됐다. 김 의원은 “신문을 직접 배달하면서 편집에 대한 평가와 기사 주문을 받는 등 구독자와 대화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지역신문을 통해 농어민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했고, 이는 지역민의 지지와 신뢰를 얻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95년 제1회 전국 지방 동시선거가 실시되자 지역에선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김 의원은 “많은 지역 선배들이 ‘김두관처럼 깨끗한 사람이 군 행정을 맡았으면 좋겠다’고 출마를 간청했다”며 “처음엔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다. 1988년 13대 총선에 민중의당 후보로 출마한 전력이 있는 그는 기초단체장 선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여당인 민자당 텃밭이나 다름없는 경남지역에서 무소속 후보로 나서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주변의 거듭된 권유로 출마 결심을 한 그도 “당선될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고 6대4로 질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동안 농민운동, 이장, 신문사를 운영하며 쌓은 군민과의 스킨십은 위력을 발휘했고, 예상을 뒤엎고 전국 최연소로 지방자치단체장에 당선됐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김 의원은 취임 후 군수 관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민원인 주차장을 만들고 담장을 없애는 등 군청을 개방했다. 이어 어장이설권, 마을버스 운행 허가권 등 첨예하게 엇갈리는 주민 이해관계 조정기구로 민원공개 법정을 개설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행정 경험이 일천했지만 군수를 하며 귀와 마음은 늘 열려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자치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지방언론과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소신에 따라 군청 기자실을 폐쇄해 버렸다. 지방언론의 거센 반발에도 그는 “군수를 끌어내릴 사람은 주민밖에 없다”며 언론과 타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재선에 성공했고, 2002년 군수 임기를 마치고 전국자치연대 공동대표로 경남도지사 선거 채비를 서둘렀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당 소속 경남지사 후보로 김 의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 의원은 민주당 불모지인 경남지역에서는 야당보다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는 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노 후보가 3번 전화를 하며 민주당 간판으로 나서 줄 것을 요청했고, 마지막엔 ‘도대체 누구와 정치를 하려느냐’고 역정을 내다시피 했다”며 “결국 노 후보와 한배를 탔다”고 했다. “민주당에 입당하면 선거에 절대 불리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노 후보의 철학과 의지에 의기투합해 정치적 인연을 맺었다”고 그는 기억한다. 그전에 농민운동 할 때와 기초자치단체장 19명이 만든 모임인 ‘머슴골’에서 노 후보를 초청해 강연을 들은 바 있어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 노 후보는 해양수산부 장관 재직 때 남해군 사업 신청을 위해 찾아간 김 의원에게 ‘김 군수, 언론과 어떻게 치열하게 싸웠어요’라며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행정자치부 장관 때 언론브리핑을 하는 김 의원.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쓴잔을 든 그는 노 후보의 당선을 위해 조직특보로 활동했다. 노 후보 지지율이 하락해 당선가능성이 낮아지자 경남지역 대선본부장을 맡으려는 사람이 선뜻 나서지 않았다. 그는 “노 후보는 ‘내가 여론조사에서 3등을 하는데 누가 경남본부장을 맡겠어요. 김 군수가 하세요’라고 해 떠맡았다”고 했다. 김 의원은 “그땐 조금이라도 득표에 도움이 되는 인사가 선대위에 들어오면 자리를 양보했고, 그런 정신이 노 후보를 당선시켰다”고 회고했다. 그는 “선거는 후보보다 참모 등 주변 사람들이 더 진정성과 겸손함을 갖고 일해야 승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후 김 의원은 행정자치부 장관에 발탁된다. 시골 이장, 군수 출신인 그의 장관 임명은 파격 그 자체였다. 하지만 장관 취임 7개월 만에 물러나야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경기도 포천에서 훈련을 하던 미군부대 사격훈련장에 진입해 전쟁반대 시위를 했고, 야당은 이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행자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해 버렸다. 그는 “해임안 의결 후 바로 사의를 표명했으나 노 전 대통령은 ‘야당의 부당한 횡포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며 즉각 수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의원은 “행정 권력을 갖고 있는 대통령과 의회 권력을 장악한 야당이 장관 해임 문제로 부딪히면 국정운영에 부담이 돼 사표를 고집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이 원내 제1당이었고 여소야대 국회였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9월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국회 해임건의안 의결을 거부한 데 대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 의결을 존중 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노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나와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국회 해임을 각각 수용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2004년 17대 총선(열린우리당), 2006년 경남도지사 선거(열린우리당), 2008년 18대 총선(무소속 후보)에 출마한 그는 연거푸 낙선했다. 2002년 경남지사 선거를 포함해 4차례 도전했고 결과는 전패였다. 고난의 행군이 계속돼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2010년 경남도지사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는 저력을 보였다. 도지사 도전 3번 만에 뜻을 이루었다. 자유한국당 전신인 한나라당의 아성인 경남에서 지방선거 실시 후 첫 야권 성향 무소속 후보가 도백 자리를 꿰찬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김두관 의원은 지난 10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가진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고등학교 때는 멋진 스포츠 해설가가 되고 싶었다”며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고 축구, 농구, 배구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의원회관 사무실에 비치된 권투 글러브를 끼고 포즈를 취했다.
이재문 기자
‘큰 뜻’을 품었던 그는 2012년 지사직을 던지고 민주통합당 대선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으나 3위에 그쳤다. 그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김 의원은 의정활동을 통해 공부를 더 하겠다며 지역을 옮겨 2014년 경기 김포 보궐선거(새정치민주연합 후보)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2년간 와신상담한 그는 20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할 수 있었다. 13대 총선에 첫 출마 후 5번의 시도 끝에 금배지를 단 것이다.

5년 전 대선후보 경선에 참여한 그가 이번에 왜 불참했는지 궁금했다. 김 의원은 “고민을 많이 했다”며 “원내 진출 문제로 시대적 과제와 역사적 책무를 수행할 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연습, 경험 삼아 나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그러면서 “(나 보다) 더 많이 준비한 사람이 하는 게 옳다”며 “민주진보개혁진영의 대선승리를 위해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김 의원은 자신의 성향에 대해 “이념적으로 접근해 생각하지 않는다”며 “현장 행정을 오래 해 개혁적 실용주의”라고 강조했다. 쉼없이 달려온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다”며 “한반도 통일시대를 열어 함경북도 온성에서 사는 게 꿈”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집단 지성, 다수의 지혜를 모아 현재보다 더 나은 정치체제를 마련하는 데 힘을 보탤 것”이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그의 끈질긴 도전정신은 어디서 나올까. 포즈를 취해 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 정장 차림을 한 김 의원은 사무실에 비치된 권투글러브를 스스럼없이 끼고 공격 자세를 갖췄다. 오뚜기 인생, 김두관의 승부 근성이 엿보였다.

황용호 선임기자 dragon@segye.com

◆ 김두관은…?

△1959년 경남 남해 출생 △남해종합고 졸, 경북전문대 행정학과 졸, 동아대 정외과 졸, 명예 정치학 박사(동아대)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이장, 남해농민회 사무국장, 남해신문(주) 대표이사 사장 겸 발행인·편집인, 1·2기 남해군수(무소속) △행정자치부 장관,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노무현 대통령 정무특별보좌관, (사)자치분권연구소 (사)민부정책연구원 이사장 △경남도지사(무소속·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6·4지방선거대책위 공동위원장, 제20대 국회의원(현), 남북관계개선특별위원회 위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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