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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의 문자로 보는 세상] 분노·분열에 춘래불사춘… '침묵의 귀' 가져야 봄을 듣는다

입력 : 2017-02-12 14:00:00 수정 : 2017-02-13 11:3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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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소란의 겨울 다음은 침묵의 봄으로 입춘이 지났다. 가는 겨울, 오는 봄이다. 생기가 없는 자연의 겨울은 침묵의 계절이고, 만물이 소생하는 자연의 봄은 소란의 계절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번 겨울은 국정농단과 탄핵 정국으로 인하여 침묵이 아니라 ‘소란의 겨울’이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침묵의 봄’을 맞이하자는 얘기다. 대통령 탄핵 결정이 인용이든 기각이든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온 국민이 차분한 마음으로 개헌과 대선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헌재의 결정을 앞두고 국론분열의 상황이 단순한 염려에서 심각한 우려의 수준으로 치닫고 있어, 소란과 광분의 봄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이에 대하여 여야 원내대표는 물론 여러 지도층 인사들도 염려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런 판국에 일부 정치인들은 헌재의 숭고한 결정을 진지하고 차분하게 기다리기는커녕 집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고 소란과 분열을 부추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법을 세워야 할 국회의원은 마땅히 사법부의 판단을 남보다 더 존중하고, 탄핵심판의 결과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법을 흔드는 일은 없어야겠다. 국민들 역시 법치국가의 국민답게 헌재의 결정에 묵묵히 따를 줄 아는 성숙한 국민의 자세를 보여주어야 한다.


문자학적으로 ‘소란’과 ‘침묵’은 어떠한 의미일까.

‘소란(騷亂)’의 사전적 의미는 ‘시끄럽고 어수선함’이다. ‘시끄러울 소(騷)’ 자는 ‘말(馬)이 벼룩(蚤)처럼 마구 날뛰는 모습’에서 ‘떠들다, 시끄럽다, 걱정하다’ 등의 뜻이 있고, ‘어지러울 란(亂)’은 틀에 감긴 실이 어지럽게 헝클어진 것을 두 손으로 풀다가 끊어진 모양에서 ‘어지럽다, 무질서하다’의 뜻이 되었다. 날뛰는 말(馬)에서 시끄러운 말(言)의 뜻이 나오고, 인간이 만든 실에서 어지럽다는 뜻이 나왔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지금 중국에서는 요란한 혀(舌)와 끊어진 실(乙)로 어지러움(亂)을 표현하고 있다.

갑골문을 보면 ‘침묵(沈默)’의 ‘가라앉을 침(沈)’ 자의 원형은 강물 속에 소를 빠뜨려 수신(水神)에게 제사 지내는 모양이었는데, 금문에 와서는 소 대신에 사람을 넣어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침(沈)’과 같은 뜻의 ‘빠질 몰(沒)’은 본래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 사람이 빠져 허우적거리며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침(沈)’ 자가 사람의 성씨로 쓰일 때는 ‘심’으로 읽는데, 심청전(沈淸傳)의 주인공 심청(沈淸)이 인당수 맑은 물에 몸을 던지는 내용을 보면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작명도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침(沈)’ 자에는 ‘담그다, 절이다’ 등의 의미가 더해지는데, 이에 근거하여 ‘김치’는 ‘침채’(沈菜: 채소를 소금물에 담그다)에서, ‘김장’은 ‘침장’(沈藏: 소금물에 담가서 오래 둔다)에서 온 말로 보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살필 일은 ‘침’이란 발음 속에 ‘조용하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잠잘 때는 누구나 조용하므로 ‘잠잘 침(寢)’이 된다. 잠잘 때 필요한 도구인 베개도 ‘침(枕)’으로 발음한다. 사실 침대에서 조용히 취침할 때 가장 침략당하기 쉽다. 여기에서 ‘침략할 침(侵)’자 나온다. 환자가 침을 맞을 때에는 따끔하지만 함구무언(緘口無言), 곧 침묵해야 하므로 침도 ‘침(鍼)’으로 발음한다. 의료용 바늘은 물론 재봉용 바늘도 ‘침(鍼)’이다. 그런데 정작 침은 ‘1’처럼 간단하지만 글자가 복잡하므로 ‘침(針)’으로 생략하여 쓰기도 한다.

‘액체가 조용히 스며들다’는 뜻의 ‘침투(浸透)’나, ‘지반이 빗물이나 냇물에 조용히 몰래 깎이는 현상’을 뜻하는 ‘침식(浸蝕)’에도 ‘담글 침, 잠길 침(浸)’ 자를 쓴다.


다음으로 ‘고요할 묵(默)’ 자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검을 흑(黑)’과 ‘개 견(犬)’의 합자이다. ‘검을 흑(黑)’ 자는 ‘불 때는 사람의 검은 얼굴’ 또는 ‘부엌 창에 붙은 그을음’으로 보기도 하는데, 여기에 ‘개 견(犬)’ 자가 붙어서 ‘고요할 묵(默)’ 자가 되는 것을 보면, ‘얼굴이 검은 불목하니의 뒤를 개가 조용히 뒤따르다’라고 풀이함이 옳다고 본다. 하기야 부엌의 개는 불이 무섭기도 하려니와, 먹을 것도 많으니 침묵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면 너무 작위적인 유추인가.

‘검을 흑(黑)’ 자의 금문을 보면 사람의 얼굴에 그을음이 찍혀있음은 물론, 몸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흑(黑)과 비슷한 글자로 ‘그을릴 훈(熏)’ 자가 있다. 이 글자의 금문이나 소전 형태는 흑(黑) 위에 ‘싹 돋을 철(屮)’ 자 모양이 얹혀있는데, 여기에서 훈(熏) 자는 ‘연기가 올라가 그을리다, 훈제품을 만들다’의 뜻이 된다.

‘날씨가 훈훈(薰薰)하다’라고 할 때의 ‘훈훈할 훈(薰)’ 자는 ‘훈(熏)’ 위에 풀[?]을 얹어놓은 모습이다. 따라서 훈풍(薰風)은 여름바람이 된다. 그리고 힘써 열나게 일해야 공훈(功勳)을 세울 수 있으니, 여기에서 ‘공 훈(勳)’ 자가 탄생한다.


우리는 해를 넘기면서 다섯 차례나 마음을 새롭게 할 기회를 맞이한다. 첫째가 ‘동지(冬至)’로 이때는 음기가 극성한 가운데 양기가 새로 생겨나는 때이다. 양력설 ‘신정(新正)’이 그 두 번째이고, 조상신을 모시고 새해를 맞이하는 ‘설날’이 그 세 번째이다. 천문(天文)의 새해이자 봄이 시작되는 날인 입춘(立春)이 그 네 번째이며, 학년이 바뀌고 신학기를 맞이하는 배움의 새해, 3월 개학일이 다섯 번째라 할 수 있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을 염려해서인지 몰라도 해가 바뀔 때마다 다섯 차례나 다짐의 기회가 오는 것도 복이라면 큰 복이다.

정녕 봄은 오는가. 지금은 24절기의 시작이자 봄의 첫 절기인 입춘(立春) 철이다. 입춘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사르륵, 눈 녹는 소리. 후드득, 고드름 꼭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 얼었던 마음까지 녹는 소리가 몽환적으로 들려온다. 고양이의 머리 위에서는 봄 햇살이 살짝 내려앉아 졸음을 재촉하고 있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시샘(jealousy)’과 같은 묘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샘, 시새움, 심술, 암상, 시기, 질투, 투기’ 등과 같이 ‘시샘’과 비슷한 말이 많은 것으로 볼 때, ‘시샘’이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의 중요한 감정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감정 이입된 표현이겠지만, 자연에도 시샘이 있다. 이를테면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라는 말은 꽃에 대한 날씨의 시샘이라고 볼 수 있다.

봄이 오는 소리가 있을까. 초목이 움트고, 씨앗이 발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봄보다 더 소란한 계절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침묵과 명상의 귀를 가진 자만이 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시간적 봄은 왔지만 아직도 춥다. 그래도 창(窓)을 열고 잠시나마 창공(蒼空)을 바라보자. 모든 ‘창’이란 발음을 가진 글자는 창과 관련이 있다. 창을 열고 화창(和暢)한 날씨를 즐기자. 창을 열면 마음도 열린다. 그래서 ‘창 창(窓)’ 자에는 ‘마음 심(心)’이 붙어있다.

창은 공기뿐만 아니라, 빛도 받아들인다. 아침이면 창은 벽보다 먼저 훤히 드러난다. 그래서 ‘드러날 창(彰)’이다. 공적이나 선행이 드러나면 표창장(表彰狀)을 받게 된다. 창을 통해서는 재산의 보고인 창고(倉庫)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가끔은 창가를 서성거리며 애창곡(愛唱曲)을 흥얼거리기도 하고 창조(創造)를 위한 구상도 해 본다. 옛날 움집의 창은 ‘향(向)’이었다. 처음에는 ‘북향 창’을 가리켰지만, 나중에 ‘방향’의 뜻으로 바뀌었다. 올봄은 정치, 경제, 외교적 난관에 AI(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까지 창궐하여, 다방면에서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려운 때일수록 소란 대신 침묵으로 자신과 나라가 나아갈 방향(方向)을 똑똑히 살펴가며 희망의 봄을 얘기하자.

권상호 서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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