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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28〉 전통시대 초학교재 ‘천자문’ 읽기

입력 : 2017-01-06 21:21:17 수정 : 2017-01-07 13: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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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천, 따 지” 운율 살려 정리한 1000자… 한문공부 길라잡이 돼 조선왕실에서 사용하던 천자문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왕실 천자문은 해서체(楷書體)의 한자 원문에 한글로 훈과 음을 달고, 적·청·황·홍·녹·백색의 여섯 가지 색지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제작했다. 얼마 전 필자는 연구팀과 함께 장서각에 소장된 왕실 천자문을 쉽게 풀이한 책을 냈다. 한문학자와 국어학자가 왕실 천자문의 원문에 대한 번역과 함께 해설을 붙이고, 한자의 음과 훈에 대한 국어사적인 설명을 담았다. 천자문이 왕실뿐만 아니라 양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초학교육의 교재로 널리 활용되었음은 여러 기록을 통하여 확인된다. 따라서 옛 문헌자료 중에서 천자문만큼 현대인에게 익숙한 것도 없을 성싶다. 필자 또한 어릴 적 천자문을 배웠기에, 역해작업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감회가 새삼스러웠다. 어릴 적 천자문을 배울 때의 경험, 최근 천자문을 풀이하는 작업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한문공부를 생각해 본다. 


천자문 표지와 본문. 조선왕실에서 사용하던 천자문이다. 왕실 천자문은 해서체의 한자 원문에 한글로 훈과 음을 달고, 적·청·황·홍·녹·백색의 여섯 가지 색지를 사용해 화려하게 제작했다.
◆운율 따라 읽어 외우기에 적합한 천자문

천자문은 중국 양나라의 주흥사(470?~521)가 무제(武帝)의 명을 받고 하룻밤 사이에 지어 올리느라 수염과 머리털이 다 희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부른다. 책 제목 그대로 1000자의 서로 중복되지 않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당초의 것은 ‘여모정결’(女慕貞潔)과 ‘환선원결’(紈扇圓潔)의 ‘결’(潔)자가 겹쳤으므로 실제로는 999자였다. 후대인들은 중복되는 글자를 피하고 제목대로 1000자로 만들기 위해 ‘여모정결’의 ‘결’자를 ‘열’(烈)자로 바꾸었다 한다. 천자문은 운문 형식으로 2구절마다 압운(押韻·같은 운자를 일정한 곳에 규칙적으로 반복하여 운율을 조성하는 수법)을 해 두어서 외우기에 적합하다. 


◆진로를 결정하게 한 어릴 적 한문 교육

나는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가학(家學)을 통하여 천자문을 뗐다. 당시에는 천자문이라 하지 않고 ‘천자책’이라 불렀고, 어렸던 터라 글자 수가 1000자인 줄도 모르고 읽었다. 6살부터 7살까지 1년 이상 읽은 것으로 기억된다. 천자문을 떼고 나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외우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6년간의 수업은 국어가 가장 재미있었다. 천자문을 공부한 덕분에 우리말에 많이 있는 한자어를 이해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한글 전용론과 국한문 혼용론의 대립이 심했다. 교과서가 국한문으로 표기되다가 한자가 괄호 속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한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자연스럽게 한문 과목은 경시되는 경향을 보였고, 대학 입학시험에서도 1~2문제밖에 출제되지 않았다. 모든 학생들이 한문을 소홀히 했고, 나 또한 특별히 한문을 더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나 스스로는 한문교육의 피해세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릴 적 한문교육은 질기게 내 인생에 영향을 줬다. 당시 대학은 학부별(계열별)로 학생을 모집했다. 1학년 때 교양과목을 수강하고, 2학년 올라가면서 전공을 선택했다. 1학년 말이면 전공 문제로 갈등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소질은 무엇이며, 재미있는 것이 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질문의 답은 천자문과 한문이었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한문교육과로 결정하였다. 친구들은 “케케묵은 그거 해서 뭐 하느냐”며 의아해했다. 한문교육과 지원자는 고작 8명으로 수가 가장 적었다. 비인기학과였지만 소신 지원의 결과였다. 훗날 그중에서 3명이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2명이 교수가 되었다. 천자문은 나의 공부와 삶의 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학에서 한문교육과를 선택함으로써 한문학 전공 교수까지 되었다. 결국 ‘천자문’ 덕에 먹고살게 된 셈이다. 

모당홍이상공평생도. 조선시대의 어린아이들은 천자문을 통해 문자를 배웠다. 색동옷을 차려입은 어린아이가 책을 집어들고 있다.

◆사투리로 배운 한문, 훗날의 혼란 예고(?)

천자문을 처음 배운 시절을 돌아보면 지금의 한문교육이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나는 아침식사 후 겸상을 갖다놓고 아버지와 마주앉아 천자문을 배웠다. 아버지가 먼저 읽고 내가 따라 읽기를 수십 번 한 뒤에, 그날 배운 글자의 훈과 음을 혼자 제대로 읽을 수 있어야 공부가 끝났다. 하루에 8자씩 배웠는데, 공부시간은 30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로는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천자문을 한 번 읽어야만 밖에 나가 놀 수가 있었다. 그래서 빨리빨리,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가며 읽고는 했다. 선인(先人)들이 바람직한 독서법으로 여겼던 방식에 비춰보면 좋은 건 아니다. 옛 사람들은 낮은 소리로 많이 읽되 고함을 질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높은 소리로 읽게 되면 기운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오래 지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천자문을 사투리로 배우고 읽었던 건 지금 생각해보면, 훗날의 혼란을 예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훈장인 아버지는 정확한 표준발음을 알려 주거나 동사의 원형을 설명해 줄 능력이 없었다. ‘律呂調陽’을 ‘범 율, 범 여, 고로 조, 빈 양’으로 가르쳤고, 그대로 외웠다. 대학 때 천자문의 끝 구절 ‘잇기 언(焉), 잇기 재(哉), 온 호(乎), 잇기 야(也)’의 훈에 대한 국어학적인 의미를 알고는 헛웃음이 나왔다. 아버지가 ‘이끼’라고 읽는 것을 그대로 따라 읽었고, 돌에 새파랗게 끼는 선태식물을 가리키는 줄 알았다. 앞 구절 ‘위어조자(謂語助者)’와 함께 풀이해 주기만 했어도 그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초학자들에게 한자의 훈과 음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느낀다. 

김건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천자문 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른다”

천자문에는 획수가 많아 쓰기 어려운 글자가 많다. ‘짤 함(鹹)’, ‘이지러질 휴(虧)’, ‘빽빽할 울(鬱)’ 등이 대표적이다. 한문학 전공 교수인 지금도 이런 글자들을 쓰는 데 헛갈린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대학교 4학년 2학기 때 교생실습에서 생긴 일이다. 첫 시간에 어떤 학생이 “선생님, ‘거북선’을 한자로 어떻게 써요?”라고 질문을 하고, 또 다른 학생은 “‘울릉도’를 한자로 좀 써 주세요”라고 했다. 아이들은 ‘초짜 선생’인 나를 상대로 ‘거북 귀(龜)’자와 ‘빽빽할 울(鬱)’자를 쓸 줄 아는지 시험한 것이다. 내가 칠판에 두 글자 모두 약자로 썼더니, 학생들은 정자로 써 달라고 했다. 그날 학생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이후 어려운 글자를 유의해서 연습하였고, 지금도 강의에 들어가기 전에 난해한 글자를 특별히 예습하고 있다.

천자문에 담긴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데, 그러질 못하고 가르쳐주는 대로 낱글자를 외웠다. 시경체(詩經體)의 옛날 시에 어려운 고사와 1~2구절마다 역사적 배경이 있는 줄은 훗날 해설집을 보고서야 알았다. 특히 ‘추위양국(推位讓國), 유우도당(有虞陶唐), 조민벌죄(弔民伐罪), 주발은탕(周發殷湯)’에 대한 주석을 읽고는 식은땀이 났다.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탕왕, 무왕이 주왕과 걸왕을 친 이야기였다. 천자문은 중국의 역사와 문물제도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글이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어문학자이자 당대 최고의 운서 연구 대가인 최세진은 “고사가 너무 많아 아동의 문자 학습교재로 부적당한 느낌이 있다”고 하였고, 정약용도 “천자문 한 권을 다 읽어도 무슨 뜻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혹평했던 것이다.

◆한문공부의 왕도는 외우기

한문공부는 무모할 정도로 외워야 한다. 어학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삼다(三多), 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외우는 이를 당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요즘 한문을 배우는 학생들은 한꺼번에 많은 양을 배우려 하면서 읽고 쓰기를 게을리한다. 컴퓨터에서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뭐 하러 골치 아프게 배우고 외우느냐고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 한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다시피 하는 데다가, 컴퓨터에서 불러다 입력하니 쓸 줄은 더욱 모른다. 외워서 입에 붙어 한문 구절이 줄줄 나올 수 있으면 누가 그 사람을 대가라 인정하지 않겠는가.

김건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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