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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거부를” 고종에 상소 올린 독립운동가 이상설

입력 : 2016-12-31 03:00:00 수정 : 2016-12-30 19: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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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지음/채륜/1만8000원
보재 이상설 평전/김삼웅 지음/채륜/1만8000원


1905년 을사늑약의 비준을 앞둔 시점에 고종 앞으로 상소가 올라왔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격정에 찬 글은 고종에게 죽음으로 을사늑약의 비준을 거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당시 신문은 이 상소를 두고 “자고로 난세를 당하여 직신(直臣)의 간언은 있어왔지만 막중한 군부(君父)의 목숨을 끊는 순사직을 간한 신하는 그에게만 있었던 충언”이라고 평가했다.

상소의 주인공은 보재 이상설 선생이다. 이상설의 이름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대개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에 파견된 헤이그 특사의 일원 정도로 기억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책은 그를 “우리가 반드시 기억하고 독립운동사에 그리고 역사교과서에 고딕체로 기록해야 하는 독립운동의 독보적인 선구자”라고 평가한다.

독립을 위한 이상설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북간도에 최초의 민족교육 기관인 서전서숙을 세워 항일 교육을 실시했고, 해외 최초의 독립운동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했다. ‘13도의군’ 창설, ‘권업회’와 ‘성명회’의 조직, 독립군사관학교 ‘대전학교’ 설립 등은 그가 주도한 해외 독립운동의 초기 성과였다.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1919년)되기 5년 전에는 해외에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의 자리를 맡기도 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일제와의 무력투쟁을 주장했다.

여순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던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각계 인물을 평가하면서 이상설을 “세계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고 평했다.

“이상설은 재사(才士)로서 법률에 밝고 필산(筆算)에 통달하고 영·불·러·일어에 통한다. … 또한 동양평화주의를 갖는 데 있어서는 동인(이상설)과 같이 친절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드물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찾아온 이동녕, 이회영, 박순 등의 동지들에게 그는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고 당부했다. 또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며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말했다.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는 수이푼 강에 뿌렸다. 48세를 일기로 이상설이 세상을 떠난 것은 1917년 4월 22일이다. 내년은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아직 국적조차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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