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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황제 무측천, 악녀인가 영웅인가

입력 : 2016-12-24 03:00:00 수정 : 2016-12-23 20: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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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시받던 여성 신분으로 중국 최초 여황제에 / 14세 궁녀로 입궐후 황후·황제·황제모후로 / 시대 뒤흔든 무측천의 삶… 대중 눈높이로 재조명
멍만 지음/이준식 옮김/글항아리/2만3천원
여황제 무측천/멍만 지음/이준식 옮김/글항아리/2만3천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624~705)의 전기다. 베이징 중앙민족대학 역사학과 교수인 저자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무측천의 삶을 재조명했다. 무측천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여인으로 꼽힌다. 그간 그녀에 관한 전기가 다수 출간되었지만 역사적 사료에 의한 사실적 서술이 돋보이는 전기물이다. 무측천은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한낮 궁녀(재인)로 당 궁궐에 들어왔다. 2대 황제 당태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이어 아들인 당고종의 황후가 되었으며 마침내 최초 여황제에 올랐다. 이후 두 차례 이어진 황제의 모후가 되었다.

무측천 하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권력 장악을 위해 자식과 형제의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빼앗은 비정함, 공포정치로 반대파를 제압했던 잔혹함, 말년까지도 젊은 남총을 거느리며 향락에 도취했던 음란함…, 마치 권모술수와 타락의 전형인 양 그녀에겐 부정적인 형상이 대부분이다.

중국 뤄양 룽먼 봉선사 본전에 있는 불상 ‘노사나대불’은 무측천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네모난 이마와 넓은 턱, 장엄하면서도 자비로운 분위기의 이 불상은 무측천이 거금을 들여 만들었다고 한다.
글항아리 제공
하지만 이는 역사의 일면일 뿐이다. 저자는 측천을 ‘모순의 공존’으로 재조명한다. 측천을 칭찬하되 비판도 놓치지 않는다. 비판하되 긍정의 실마리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전기로서 공평성과 객관성 위에 놓으려는 역사가로서의 노력이다.

당시에 여아가 태어나면 흙으로 구운 실패를 노리개로 주고 대놓고 천시했다. 이 때문에 여아는 재울 때도 침상 아래에 뉘였다. 유교사회였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습속이다. 측천의 시대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여성은 혼자 힘으로는 희망이 없었고 남성의 사랑을 받아야만 활로가 열렸다. 그 사랑을 받는 방법이란 게 남성의 가치판단에 달렸다. 나긋나긋하고 예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당시 통념에 부합되어야 했다. 다시 말하면 여성에겐 독립적인 인격이 없었고 정신적으로 인간과 동물의 중간쯤에 위치했다.

그런 시절 14살의 어린 소녀가 구중궁궐로 들어갔다. 재능이 뛰어났던지 태종은 직접 그녀에게 무미라는 이름을 내렸다. 측천의 운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알고 보면 황제의 잣대도 지극히 편협했다. 일대의 성군이라는 태종조차 천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측천이 시종 예쁜 체하며 일생을 살았더라면 결국 말년에는 태종처럼 쇠락의 비극을 맛보았을 것이다. 반대로 총명함과 강인함을 드러내는 순간 그녀는 권력의 칼날에 사라졌을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판이다. 아마도 측천은 12년간의 재인 생활을 통해 이런 궁궐의 교훈을 통절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권력이 쥐여진 순간, 결연하게 무미라는 이름은 내팽개쳤다. 미모 하나만 가지고는 그녀의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불가능을 믿지 않았다. 지략, 체력, 정력 모든 것이 자신만만했다. 투쟁과 건설의 역량, 그리고 창조력에서 그녀는 하나하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더 이상 당 태종의 노리개감 혹은 고종의 아내가 아니었다. 당 중종과 예종의 어미도 아니었다.

당시 그녀가 이룩한 정치적, 사회적 성취로 인해 당대의 제도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무측천 이후 1000여년 동안 여성 대신조차도 나오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룬 성취는 중요했다.

측천은 스스로 만든 ‘주나라’의 황제로 군림했던 15년간을 비롯해 황후와 모후로 있던 40여년간 수많은 개혁적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과거시험의 제도화, 물가 정책, 서민들도 관리가 되는 각종 개혁들이 시행되었다.

특히 여권 신장은 괄목할 만한 조치였다. 그렇다고 측천이 여성주의자는 아니었다. 여성주의란 현대적 개념은 19세기 이후에 나온 것이다. 측천이 추구했던 것은 정치권력이었다. 측천은 비록 여성주의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만약 지금 세상에 살아 있다면 그녀는 분명 여성주의자일 것이다.

옮긴이 이준식 성균관대 중문과 교수는 “책을 번역하면서 역사 인물의 전기는 결코 역사학의 범주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거듭 실감했다”면서 “인물의 전기는 통치학이자 인간학이며 사회학이자 동시에 경영학이기도 하다”고 풀이했다. 이 교수는 “역사 이야기를 어떻게 학습하고, 어떻게 해석하며, 또 역사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는 교훈 서적”이라고 말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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