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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미지·자유·선택·꿈… 삶의 동반자다

입력 : 2016-10-29 03:00:00 수정 : 2016-10-28 20: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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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삶 선택한 집시 유랑의 길, 도서관 그 속에서 열리는 책의 길… / 길에 관한 역사이야기 인문학적 사색 / “끊임없이 갈라지는 길 가야하는 가장 복잡한 길 미로는 삶과 닮아”
김재성 지음/글항아리/3만2000원
미로(美路), 길의 인문학/김재성 지음/글항아리/3만2000원


정착은 어느 순간 인간의 지배적인 생활양식이 되었다. 따라서 정착하지 않는 것은 아주 불편하고 힘들어 보이며 불결하거나 무질서한 모습으로 비쳐져 눈에 거슬리기도 한다. 하지만 반문도 가능하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때마다 주어지는 먹이에 안주하며 고분고분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열정, 순수, 꿈 어쩌면 그 모든 것을 찾아 떠나려 했던 길, 그 자체가 아닐까.”

집시는 길 위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걷는 길 위에는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원의 삶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잉여에서 비롯된 지배와 피지배를 거부하고, 정주민들이 안정을 위해 포기한 자유를 만끽한다. 집시의 고향은 인도 북부 라자스탄의 조그만 왕국 라지푸트. 5세기경 왕국이 몰락하고 길고긴 길 위의 삶이 시작됐다.

집을 나오면 길이다. 따라서 길은 인간에게 평생의 동반자다. 인간은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고 땅을 뚫어 길을 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은 인간의 삶을 연상시킨다.
글항아리 제공
지금 전 세계에 흩어져 살아가는 집시는 2000만명 정도다. 유럽에 600만명이 있으며 중동과 아시아, 아메리카, 호주에도 많은 집시가 산다. 정착의 삶을 살지 않았기에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난은 컸다. 중세에는 마녀사냥의 희생자가 되기 일쑤였고, 2차대전 때는 유태인과 함께 수십만명의 집시가 희생됐다. 편견과 멸시가 여전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집에 수많은 물건을 쌓아놓고 정주의 안락한 꿈에 젖어 있는 우리를 가볍게 여길지” 모른다. 집시의 삶이 보여주는 ‘떠남에의 충동’은 인류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일 것이며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멋진 길과 다시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길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역사 속 이야기와 사색을 펼쳐내는 책이다. 집을 나오면 길이듯 인간에게 길이란 동반자다. 길을 만들기 위해 산을 깎고 바다를 메웠으며, 하늘과 지하에도 길을 뚫었다. 물리적 실체감을 가진 것 말고라도 길은 많다. 저자가 책의 1부에 올려놓은 길은 도서관을 소재로 한 ‘생각의 길’이다.

책은 자체로 하나의 길이다.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이끄는 아름다운 길이다. 도서관에는 수많은 길이 숨겨져 있다. 책을 집어드는 순간 그 길이 열리며 길 끝에 이르렀을 때 만나는 것은 막다른 벽이 아니라 가슴을 채우는 감동이다.

“책 속의 모든 길은 마치 켜켜이 쌓이는 지층과 같아 걸으면 걸을수록 단단해지고 읽는 이의 가슴에 뚜렷하고 명징한 길을 만든다.”

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길이기도 하다. 찬란했던 문명이 이룬 궁전과 도시는 한순간에 사라지기도 하지만 문명의 정수를 담은 책과 그것을 보관하는 도서관이 있는 한 단절 없이 이어진다. 수메르인들은 서기전 3000년경부터 설형문자를 새긴 점토판을 따로 모아둔 방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가장 유명한 도서관일 것이다. 저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장서는 기원전 48년 로마 내전 중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수많은 비극 중에서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고대의 지식을 간직한 도서관의 소멸이 아닐까 싶다”고 말한다.

가장 복잡한 길 미로를 두고는 수없는 선택의 갈림길에 서야 하는 삶을 이야기한다.

“미로는 삶과 닮았다. 앞을 볼 수 없다는 것도 그렇지만 끊임없이 갈라지는 길을 대책없이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미로는 혼돈처럼 보인다. 모퉁이를 돌면 마주하는 갈림길은 아무런 규칙 없는 것 같다. 길과 길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속에도 질서는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혼돈으로 가득하지만 중력을 따라 궤도를 도는 행성, 가지런히 피어나는 나뭇잎, 해마다 반복되는 계절 등 신이 세계를 설계할 때는 혼돈 속에서 질서가 흘러나오도록 계획했다.

고대의 최고 권력자들이 자신의 거처에 미로를 만든 것은 신을 흉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미로를 보며 자신이 정복하고 지배하는 세계의 축소모형이라 여겼을 것이고, 그 안에서 헤매는 인간들을 보며 마치 신이 된 듯한 기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머리말에 “나는 인류가 만들고 걸어온 길을 따라 먼 길을 떠나려고 한다. 그 길에서 적지 않은 틈과 벽을 만나게 되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잇기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목숨을 바친 숱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적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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