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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산동네에 서린 ‘아부지·어무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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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07 19:25:25 수정 : 2016-04-07 19: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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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원도심 속살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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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가더라도 부산은 여행객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광안리와 해운대 해수욕장, 태종대, 자갈치시장 등 찾을 곳이 많다. 볼거리에 먹거리, 놀거리까지 하루 이틀로 다 돌아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곳을 돌다 보면 일정이 정신없이 지나간다. 하지만 이런 곳만이 부산의 전부는 아닐 듯싶다. 일제 식민지배와 전쟁통 피란 생활을 겪으며 지금의 부산을 이룬 ‘아부지, 어무이’들의 힘겨웠던 삶의 터전을 한번쯤 들여다보는 것도 부산의 숨겨진 모습을 알 수 있는 기회다. 자칫 시간이 더 지나면 개발이란 이름으로 부산에 남은 몇 안 되는 옛 모습들이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산 산복도로에서 본 부산 전경.

◆산복도로로 이어진 ‘아부지, 어무이’의 삶

일제 때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뒤 광복을 맞아 돌아온 이들 중 일부는 부산에 도착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어 전쟁이 터지자 전국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땅은 한정돼 있는데 사람이 넘쳐나면서 피란민들은 몸 뉠 곳을 찾아 산으로 점점 올라갔다. 특히 부산역과 부산항 등 일거리가 있을 만한 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그나마 빨리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낮은 곳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늦은 이들은 산 정상 부근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부산 하면 떠오르는 모습 중 하나인 산기슭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은 이렇게 조성됐다.

부산에 가면 어디서든 쉽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막상 그곳을 가보지 않고는 ‘아부지, 어무이’가 살았던 모습을 실감하기 힘들다. 지금은 산 중턱에 있는 이 마을들을 잇는 산복도로가 뚫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갈 수 있다. 부산에선 가장 잘 알려진 산복도로는 부산 원도심인 동구 범일동에서 수정동, 초량동을 거쳐 중구 영주동 일대를 거치는 망양로다.
부산 유치환우체통 전망대에서 보이는 부산 시가지와 부산항대교 전경. 유치환우체통에서는 1년 후 배달되는 엽서를 써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이곳에 오르면 부산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환 시인을 기린 유치환우체통 전망대, 스카이웨이 전망대 등을 지나게 된다. 꼭 전망대가 아니더라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길이다 보니 차를 타고 가며 바다가 보이는 멋진 풍경에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하지만 예전 우리 부모들은 이곳을 매일 걸어 올랐다. 잘 닦인 도로나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초량동을 지나면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168계단’을 만난다.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과 부산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부산 초량동에 있는 168계단. 산복도로에서 부산항을 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다. 남자들은 부둣일을 하기 위해 이 계단을 전 속력으로 뛰어 내려갔다. 여자들은 계단 아래 우물에서 식수를 받기 위해 매일 물항아리를 짊어지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남자들은 바다를 바라보다 부산항에 배들이 입항하면 지게 하나를 지고 전 속력으로 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가족들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부산항에 입항한 배의 짐을 옮기는 부둣일이라도 해야 하는데 늦으면 그 일마저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계단 아래 우물에서 식수를 받기 위해 매일 물항아리를 짊어지고 계단을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그나마 168계단 근처에 살면 나은 삶이었다. 
이보다 더 위에 살던 부모들은 더 많은 계단을 매일 살기 위해 오가야만 했다. 식수조차 없는 곳에 화장실이 있을 리 없었다. 화장실이 없으니 빈터에 남자들이 변을 보고, 여자들은 요강을 비웠다. 당시 부산 사람들은 초량동 산복도로 위쪽 산 부근을 ‘똥산’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을 지나 산복도로 아래로 내려가면 국제시장과 부평깡통시장으로 이어진다.
 
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묘비를 이용해 담장을 쌓은 모습.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비석마을

산복도로로 대표되는 부산의 옛 흔적을 가장 뚜렷이 간직하고 있는 곳은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다. 비석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곳은 묘지였던 곳이다. 일제 때 부산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묻은 곳이었다. 말 그대로 화강암 납골묘로 된 공동묘지였다. 광복 후 일본인은 떠났지만 묘는 그대로였다.
 
전쟁이 터지자 몰려든 피란민들에게는 천막 한 장과 거처할 주소 하나가 전부였다. 그 주소를 따라 찾아간 곳이 아미동이었다. 난리통에 가릴 처지가 안 됐다. 그나마 이곳은 부산항에서 멀지 않아 일거리 찾기가 다른 곳보다 나은 편이었다. 묘의 비석과 상석을 치우면 어른 두 명은 누울 만한 공간이 나온다. 그 위에 천막을 치면 거처가 됐다. 죽은 자들의 안식 터와 산 자들의 생존 장소가 교차하는 곳이 된 것이다. 아직까지 집 아래 주춧돌 역할을 하는 무덤의 모습과 집을 짓기 위해 자재로 사용된 비석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 공동화장실이 눈에 띈다. 방 한 칸에 부엌으로 사용할 작은 공간 하나가 고작인 이들에게 화장실은 사치였던 셈이다.
부산 아미동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납골묘 위에 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이층집. 일층 보다 조금이라도 넓은 공간을 사용하기 위해 폭을 넓혀 지었다.
비석마을에 있는 집을 보면 일반적인 집과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일층보다 좀더 폭을 넓혀 이층을 쌓아 올렸다. 땅은 주인이 있지만, 하늘엔 주인이 없었기에 이층 공간을 조금이라도 넓게 쓰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 지붕으로 사용한 슬레이트 위에 그대로 이층을 올렸다. 지금 기준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당시로선 성장한 자녀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앞에 바다가 펼쳐진 절벽 위의 동네 흰여울문화마을. 강한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는 곳이어서 대풍(大風)포로 불렸다.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은 절벽 위의 동네다.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봉래산 기슭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얀 거품을 내 흰여울마을이 됐다. 난리통에 늦게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다. 부산항에서 거리가 멀지만 걸어서 영도대교를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기에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진 절벽 위의 집을 생각하면 멋진 풍경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태풍이 지나는 길이자, 앞에 막힌 곳이 없어 강한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는 곳이었다. 
이에 이 지역은 대풍(大風)포로 불렸다. 태풍이 치면 집이 무너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지금이야 정비를 했지만 당시엔 흙길뿐이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곳 역시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전형적인 피란민촌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수리시설이 없는 시절엔 공동화장실에서 변을 보면 절벽 아래로 떨어지도록 돼 있었다고 한다. 
산복도로와 비석마을 등에 대한 해설해주는 부산여행특공대 손민수 반장은 “젊은 세대는 부모들의 힘겨웠던 삶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부모 세대는 고생은 했지만 이웃들과의 정이 있었던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곳이 부산 산복도로와 비석마을”이라며 “산복도로와 원도심에서 힘들지만 희망을 갖고 살아온 부모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또 다른 부산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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