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힘들고 화날 때마다 사랑하는 이의 사진을 보면 팍팍한 삶 위안이 되지 않을까 누군가 예술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것은 허황된 것일까. 만일 그가 컬러풀한 그림처럼 화려한 삶을 생각한다면, 가뜩이나 팍팍한 우리 현실을 외면한 것으로 비난받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술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을 펼쳐낸다는 뜻에서라면, 하나의 멋진 발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황당한 꿈을 꾸자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안에 있지만 실현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조차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 자기가 보지 못한 세상의 모습 등을 담아 내 보는 것이다. 이런 일들에 예술이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루가 다르게 끔찍한 일, 불안한 일, 참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험난한 세상이다. 신문을 펼쳐 보기조차 두렵다. 나는 이럴 때일수록 현실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을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일에 적합한 매개체가 예술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 나는 원시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예술작품에 담긴 인생관과 세계관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예술을 통해 우리 안을 다시 들여다보기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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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
예술의 시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 발견된 원시시대의 ‘들소’ 그림은 지금 그림 못지않게 사실적이다. 색 조절을 통해 입체감을 나타냈고, 앞다리와 뒷다리와 볼기 부분을 부조 형태로 실감 있게 묘사했다. 하지만 이것이 감상이나 장식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곳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속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깊은 산속까지 찾아가 작품을 감상하지는 않았을 터. 사람들이 들소를 향해 돌과 창을 던지며 두려움을 없애려 했고, 사냥에 나갔을 때 들소가 쉽게 굴복되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던 것이다.
이런 근거로 미학에서는 예술이 주술적인 목적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원시인들이 그들의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원하면서 미술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림의 이미지가 현실과 똑 같은 힘을 갖는 대용품이 된다는 원시적 심성이 깔려 있었다. 예술세계가 현실세계의 연장이며, 예술적 경험이 현실적 경험과 직접 연결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시시대에만 그랬을까. 만일 우리가 누군가의 사진을 바닥에 놓고 날카로운 바늘로 찌른다고 상상해 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섬뜩함을 느낄 것이다. 사진 이미지가 실제 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를 섬뜩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리 내면에 이미지를 현실의 대용물로 생각하는 원시적인 심성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간직하면서 실제적 만남을 대신하고 그리움을 달래 보는 것은 그런 이치이다. 해서 하는 말인데, 올해에는 사랑하는 사람 사진을 간직하고 다니면서 화나고 힘들 때마다 한 번씩 들여다보고 마음을 다스려 보면 어떨까. 그 사람과 항상 함께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팍팍한 삶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예술적 사고가 담긴 삶의 시작이 될 것 같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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