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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들 부표 없이 부유… 시대 윤리 좌표 삼아 나가야”

입력 : 2015-12-21 19:59:16 수정 : 2015-12-21 19:5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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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호의 나마스테!] ‘만년 청년’ 소설가 이제하
“내 페친들은 10대 어린 중학생에서부터 나이 든 분들까지 세대가 다양해요. 사회생활을 하면 자연스레 어른들 세계에 편입돼 제도권 패턴을 따르게 되는데, 나는 직업이 없이 제멋대로 살아왔으니까 젊은 사람들과 얘기를 해야 뭔가 되고 나이든 사람들과는 고루해서 이야기가 안 돼요. 어떻게 보면 정신연령이 어리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요.”

문학은 물론 미술 음악 영화에 걸쳐 전방위 예술가로 살아온 소설가 이제하(78). 팔순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그이야말로 ‘만년 청년’이요 나이와 무관한 자유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웬만한 청년들보다 먼저 페이스북을 시작해 그림을 덧붙인 빈번한 포스팅으로 많은 페친들을 거느리고 있고, 영화 칼럼리니스트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요즘도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원주 토지문화관에 들어가 젊은 벗들과 숙식을 함께하고 있으며, 전람회 준비를 위해 캔버스 앞을 지키기도 하고 공연 요청이 들어오면 기타를 들고 무대에 선다. 그렇기는 하되 그가 스스로 한국 예술계에서 주류를 자처하며 나선 적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변방에서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정체성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자신이 스스로 명명한 ‘환상적 리얼리즘’ 작가로, 교과서에도 실린 그의 소설 ‘초식’이나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가 웅변하듯 한국 문단의 중심 작가이면서도 왜 늘 아웃사이더의 포즈일까. 대학로 ‘카페 마리안느’에서 그를 만났다. 평창동에서 시작해 이곳으로 옮겨 10여년째 그가 운영하는 카페다. 

홍익대 서양화과 출신 소설가 이제하가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그림 ‘잔다르크를 기다리며’.
“어머니는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고 아버지는 굉장히 현실적인 분이었습니다. 일제 때 아버지는 외지로 많이 떠돌아 2~3년 만에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버지에 이어서 나도 2대 독자였는데 어머니와 누나 둘 밑에서 귀하게 대접받다가 웬 낯선 사람이 집에 들어와 화를 내니까 줄기차게 울었는데 그 아버지가 나를 설거지하는 개숫물통에 집어넣었어요. 그때 이후로 아버지가 보기 싫어 겸상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밥을 먹을 정도였습니다. 강력한 오이디푸스 성향이 날 외곬으로 몰아 방에 처박혀 책이나 읽게 되면서 문학 쪽으로 빠진 거지요. 나중에 아버지도 소시민이요 연민의 대상임을 깨닫게 되면서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가 사회 현실에 대한 저항적 성찰로 소설로 연결된 거지요.”

이제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거론되는 단편 ‘초식(草食)’은 국회의원 선거 때만 되면 채식을 시작하면서 출마하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 아버지는 매번 낙마하는데 4·19혁명과 5·16을 통과하면서 혈서까지 쓰지만 결국 환멸에 직면한다. 돌아보면 이제하의 예술인생은 이른바 ‘민중’을 구호처럼 내걸었던 이들보다 저항적이고 끈기 있는 일관된 행로였다. 아버지 콤플렉스가 그 뿌리였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마산중고등학교 시절 이제하는 문학 천재였다. 그가 당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청소년 문예지 ‘학원’에 투고만 하면 매달 산문이 게재됐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전국 청소년들로부터 팬레터가 10여통씩 답지했다.

그중 경복중학교 학생이던 시인 유경환(1936~2007)으로부터 ‘친구 하자’는 편지를 받고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처음 쓴,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라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로 이어지는,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가 ‘학원문학상’ 대상을 차지해 전국 소년소녀의 가슴을 다시 움켜쥐었다. 팬레터뿐만 아니라 ‘마산 시골 학생’에게 책을 보내주던 정신여고 여학생은 그가 서울로 올라와 대학에 입학하자 시를 달라고 하더니 미당에게 찾아가 보여주었고, 서정주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이후 다시 ‘신태양’과 한국일보 신춘문예를 거쳐 소설가로 자리 잡았다. 홍익대 미대에 들어가 처음 접한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화집을 보면서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첨단 미술사조를 소설에 도입해 추구한 스타일을 스스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거니와 당시 비평가들은 코웃음을 치더라고 이제하는 말했다.

“해방 직후부터 좌우가 투닥거리는 거 하나도 안 달라졌어요. 그때도 골목에서 병 깨지는 소리 들렸는데 왜 이런 꼴만 보면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민족이에요. 조금만 지혜가 있었더라면 벌써 통일이 되든지 무슨 수를 냈을 텐데 권력에 눈이 멀어 심지어 동서로까지 분열이 된 겁니다.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아나키스트를 자처합니다. 내 주변에도 이런 친구들이 많아요. 이쪽 저쪽 편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꼴들이 너무하니까.”

그의 반골기질은 50년 역사를 넘긴 전통 문예지 ‘현대문학’과의 애증관계로도 이어져 근년에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3년 현대문학 신인문학상을 거부한 뒤 40년 만인 2013년 그의 연재소설이 ‘박정희’와 ‘유신’이 거론된 탓에 거절됐다고 페이스북에 올린 이래 문인들이 집단으로 반발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1973년에는 문단 권력을 향한 집착으로 씁쓸한 모습을 보인 당시 주간 조연현 때문에 문학상을 거부했다고 술회했다. 연재 거부 파문으로 주간과 편집위원들이 사퇴하는 결과로 이어진 연전의 사태와 관련해서는 “나에게 페이스북은 문예지 역할을 하는 매체이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면서 “잠시 딴 길로 갔다고 유서 깊은 잡지가 없어져서는 안 된다”고 ‘현대문학’에 대한 애증을 피력했다. 그는 올 여름 대산문화재단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동란 후에 폐허가 된 잿더미에서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인간적인 정신을 잃지 않고 그 정서의 연결고리를 끊지 않으려 하는 그런 문화공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신경숙 표절 파문으로 올 한 해는 문학이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습니다. 모두 의기소침해져서 의욕을 잃어버린 듯 보여요. 요즘 소설 쓰는 후배들을 보면 싸워야 할 대상을 확실히 못 잡아서 부유하는 것 같습니다. 서사가 약하고 디테일 쪽으로만 가고 있어요. 시대적인 윤리, 그 하나의 기둥을 세워 놓고 좌표를 삼아 나아가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이 기둥에다가 자신만의 ‘알파(α)’를 추가해야 합니다.”

페이스북에 그가 올리는 글들에는 대부분 그의 전매특허처럼 등장하는 말 그림이 따라붙는다. 야생의 생명력을 실내로 가져올 때 생기는 긴장감을 즐긴다는 그의 태도는 제도에 매이지 않고 생명력을 추구하는 성정을 그대로 반영한다. 1998년 회갑 때 지인들의 강권으로 그의 작사 작곡으로 CD음반을 만들었고, 그중 ‘모란 동백’은 조영남이 가져가 단골 레퍼토리가 됐다. 요즘도 ‘노래하는 시인들'을 모아 토지문화관 무대에 서기도 했고 가끔 지역의 문인들 무대에 초청돼 노래한다. 그가 ‘빈 들판’을 경상도 억양의 숙명 때문에 ‘빈 덜판’으로 부르는 바람에 조영남은 디너쇼 때마다 이를 흉내내어 좌중을 웃기기도 한다. ‘아웃사이더’ 이제하는 “제대로 된 걸 몇 개 더 써야 하는데 몇 년이나 남았는지 초조하다”면서 곁을 떠나지 않는 하얀 털북숭이의 등을 연신 쓰다듬었다. 이제하의 말투에는 카페 마리안느 하오의 적막이 묻어 있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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