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대표작가 격인 윤후명은 ‘핀란드역의 소녀’에서 러시아 여행을 갔다가 폴란드 비자를 받기 위해 핀란드역을 서성이던 기억을 담아냈다. 그곳에서 결국 비자를 받아내지는 못했지만 북에서 도망친 듯한 남녀를 대신해 표를 사주었던 에피소드를 떠올린다. 작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걸린 켄지에르스키라는 폴란드 화가의 작품 ‘워비치의 소녀’를 마주보며 독백을 한다. 흰 스카프를 두른 푸른 눈의 그 소녀는 세상을 수줍고도 용감하게 바라보는 듯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 소녀와 탈북 남녀의 이미지가 겹치는데 워비치의 소녀는 푸른 눈을 깜박이며 작가에게 손을 흔들면서 “이제는 모두가 자유를 이야기해도 좋을 시간”이라고 안부를 전한다.
소설가 윤후명이 북한 인권을 말하는 단편 ‘핀란드역의 소녀’에서 모델로 삼은 폴란드 화가 켄지에르스키의 ‘워비치의 소녀’. |
다시 남쪽 작가 이청해는 ‘어디까지 왔나’에서 구사일생 남쪽으로 온 여자 금화의 사연을 이야기한다. 금화를 훈이라는 남자가 좋아하는데 노래방에 가서 웃음을 팔고 오는 그네를 타박하자 금화는 울부짖는다. 남한 사회에 적응해 살아가야 하는 많은 새터민들의 고통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대사다. 그네는 “어쩌다가 죽지 못했던 것뿐”이라고 서럽게 항변한다.
북쪽에서 온 작가 도명학은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창작과를 수료했다. 그는 ‘책도둑’에서 기막힌 북의 현실 한 대목을 소개한다. 도작가동맹위원장이 어렵사리 모은 책을 도둑 맞고 사색이 되는데 그 책을 훔친 장본인은 알고 보니 그의 아내였다. 남편이 밥도 안 먹고 잠도 이루지 못한 채 보름이 지나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동료에게 전하는 작가의 푸념이 애처롭다. “들어보니 그 책들을 팔길 잘했지 안 그랬으면 다 굶어죽었을 뻔했더군. 세상이 완전 개판 됐어. 에에, 더러워서 원!”
이번 남북한 작가 공동소설집을 기획한 소설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삼수갑산’에서 월북한 백석 시인의 말년을 그리며 남북한 양쪽 체제의 글쓰기 환경을 성찰한다. 방 교수는 “백석이 말년에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체제의 억압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진정성을 유지할 글을 쓸 수 없는 환경에 대한 절망 때문이었을 것”이라면서 “남쪽도 발표 지면은 넘쳐나지만 정작 진정성이 충만한 글들은 얼마나 되는지 되돌아볼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쪽 작가들이 남쪽 문인들의 글쓰기 방법을 배우려고 노력하는데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문장이 정갈하고 다채로운 어휘를 구사해 남쪽 작가들이 배울 측면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업은 서울대 통일기반구축사업으로 서울대 통일평화원구원이 주관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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