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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단의 두 거목, 가슴 시린 삶을 이야기하다

입력 : 2015-10-22 20:41:00 수정 : 2015-12-22 16: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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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노장들이 나란히 ‘문학동네’에서 장편소설을 펴냈다. 산문이란, 시와 달리 노년에 접어들수록 체력이 달려 생산을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 장르라는 통념이 있다. 실제로 청장년시절 왕성하게 집필활동을 벌였던 이들 중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창작물을 보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번에 장편을 펴낸 소설가 한승원과 박범신은 많지 않은 노년의 현역 작가들, 그들 중에서도 생산력이 가장 왕성한 편이다. 우리네 세는 나이로 한승원은 희수(77세)를 맞았고 박범신은 칠순에 막 접어들었다.


# 한승원 ‘물에 잠긴 아버지’


“남을 이용하여 이익을 보려는 생각이 없는 시인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정직하지 못한 대표적인 것이 국가였다.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 얼굴은 정직함을 지향하는 체하고, 다른 한쪽 얼굴은 검은 세력과 내통하고 있었다.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치가들은 수시로 국민을 속였다. 김일성의 군대가 탱크를 앞세우고 밀고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을 사수한다고 방송해놓고 부산으로 도망갔고, 세월호가 가라앉을 때 선내방송으로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해놓고 선장은 선원들과 더불어 도망치듯이 퇴선해버렸다.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세월호가 침몰한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삼백몇 명의 인명 피해가 난 비극성을 넘어, 한국이란 나라의 구조적(마피아적)인 비굴하고 더러운 모습이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발언이다. 이 정도는 우리가 근년 들어 숱하게 듣고 생각해 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이런 발언을 한승원의 소설 ‘물에 잠긴 아버지’는 평생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겨우 시인이 된 그의 일곱 번쩨 아들이 최근 들어서야 발설한 이야기다. 튀지 않고 밑으로, 아래로만 흐르는 물처럼 평생 처신한 그이, ‘김오현’이었다. 남로당원이었던 김오현의 아버지는 6·25전쟁 이후 인민군을 따라 퇴각하지 못하고 빨치산으로 투쟁하다 죽었다. 그이 어머니와 할머니, 4명의 형들도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전남 해남 집필실 앞바다를 산책하는 소설가 한승원. 그는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라고 다짐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 소설의 미덕은 그동안 많이 나온 빨치산 혹은 월북자 가족들의 수난사를 뛰어넘어 세밀한 그 시절의 에피소드들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대목에 있다. 물이라는 모티프를 잡아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한 점도 산뜻하다. 산아제한 시대에 김오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최대 저항은 아이를 많이 낳는 도발이었다. 그는 11남매를 낳았다. 교련 시간에는 ‘전체주의’ 트라우마의 간섭으로 바보가 되었고, 어린 나이에 결혼해 자신의 아내를 넘보는 이웃집 ‘악마’에게는 소리없는 울음으로 저항해야 했다. 그가 물처럼 흐르고 흘러 낮아지면서도 쟁취해내려 한 삶의 진정한 승자는 “늦게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최후의 승자이고, 더욱 큰 승자는 자기를 괴롭힌 사람을 착한 마음으로 용서해주는 사람”이었다. 원색적인 좌우익의 갈등 국면에서 연좌제로 고통받아야 했던 남은 이들의 설움이 21세기, 작금의 국면에서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화해일 것 같은데요. 그 아픔들이 어떤 형태로든지 승화돼야 하지 않겠어요? 화해한다는 것은 물처럼 용해되고 화엄세상으로 나아가는 승화, 그런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글을 쓰는 한 살아 있고 살아 있는 한 글을 쓸 것”이라면서 “생물학적 삶과 작가적 삶, 어느 한쪽만 무너져도 생은 끝나는 것인데 젊어서부터 바람벽에 ‘광기’라는 두 글자를 써놓고 살아왔다”고 덧붙였다.

#박범신 ‘당신’


‘당신’이라는 말만큼 울림이 큰 말 있을까. 소설가 박범신이 등단 42년 만에 통산 42번째로 펴낸 장편소설 ‘꽃잎보다 붉던 당신’은 죽어가는 ‘당신’에 대한 헌사다. 윤희옥이라는 여자와 주호백이라는 남자. 그들은 6·25전쟁 무렵 코흘리개로 만나 엇갈리는 연애사를 겪다가 부부의 연으로 생을 끝낸 관계이다.

6·25전쟁과 4·19혁명과 5·16군사 쿠데타, 5·18광주항쟁 등 한국 현대사의 고비를 관통한 그들 세대는 사랑도 그 구비들과 무관치 않았다. 희옥은 주호백보다 혁명을 지향했던 김가인이라는 남자를 사랑했다. 그 남자의 아이를 잉태했지만 가인은 그네를 남겨두고 잡혀가 끝내 죽고만다. 처녀가 애를 밴 희옥을 두말 없이 받아들인 사람은 주호백이었다.

고향 인근 충남 강경 옥녀봉 위에 오른 소설가 박범신. 그는 “평생에 걸쳐, 거기,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 지었소”라고 새 장편에 썼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소설은 주호백이 죽자 사체를 매화나무를 심기 위해 파놓은 마당 구덩이에 파묻고 경찰에 찾아가 그가 실종됐다고 희옥이 신고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치매에 걸려 오랜 시간 희옥의 간병을 받아야 했던 호백. 그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상태에서 과거의 기억을 헤맨다. 수두에 걸린,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적의 딸을 놔둔 채 그 아이의 친아비를 찾아가 두 달씩이나 집을 비웠던 희옥. 돌아온 그네에게 당시에는 모든 감정을 억누른 채 점잖게 대했지만 치매에 걸린 그는 한참 뒤늦게 불같이 화를 낸다.

“네년이 그러고도 에미야? 수두에 걸려 죽을 둥 살 둥 하는 어린것을 팽개치고 사내놈을 만나러 집을 나가?”

사랑이란, 이성으로 통제되는 한 사랑이 아닌가. 적어도 이성으로 그네를 조용히 받았들였던 주호백의 억눌린 감정은 치매의 틈으로 빠져 나왔다. 희옥은 오히려 자학적인 태도로 뒤늦게 주호백을 깊이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그가 죽었어도 영원한 실종 상태로 만들고, 그네 또한 치매로 기억의 미로를 떠돌면서 그를 기다리기로 한다. 다시 언젠가는 돌아올 실종된 남편을. 그네는 말한다, “죽은 게 아니다. 영원한 실종이다. 갚아야 할 죄가 있다면 남은 인생에서 다 덜어내어 살아 있을 때 그와 수평을 이루고 싶다”고.

박범신은 이 장편과 더불어 중단편문학전집 7권과 문학앨범 ‘작가 이름, 박범신’도 함께 펴냈다. 중단편문학전집은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데뷔작 ‘여름의 잔해’부터 2006년 발표한 단편 ‘아버지 골룸’까지 7권에 걸쳐 모두 85편이 망라됐다. ‘토끼와 잠수함’ ‘흉기’ ‘앤도르핀 프로젝트’ ‘흰 소가 끄는 수레’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빈방’ ‘쪼다 파티’가 그것이다. 제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가 엮은 이 앨범에는 해제를 붙인 문학적 연대기, 김병덕 김은하 남진우 강상희 김미현의 작품론, 사진으로 보는 인생 이력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작가 이순원 한지혜 이기호 백가흠의 에세이, 좌담 등으로 꾸려졌다. 그는 신작 장편 앞머리에 본문 중 한 대목을 이렇게 뽑아놓았다.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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