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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일상 톡톡]"용모단정, 예쁜 언니 구해요"…갑의 횡포라고?

입력 : 2015-08-28 05:00:00 수정 : 2015-08-28 0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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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준비생 박모(26·여)씨는 서울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뒤 대기업에 입사원서를 수십번도 넘게 냈지만 서류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학점도 우수했고 토익점수·자격증도 다 갖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실제 현실은 달랐다. 박씨는 얼굴과 몸매가 별로라 탈락한 것은 아닌지 등 온갖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사측으로부터 탈락한 이유를 통보받은 적이 없어 패인을 찾지 못했지만, 요즘 입사지원서를 쓸 때마다 찝찝한 기분이 든다”고 토로했다.

입사 서류전형 단계에서 가족사항이나 신체적 특징을 묻는 기업체 관행들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상반기 공채에서도 여전히 상당수 대기업들이 지원자의 직무능력과 무관한 가족사항이나 신체사항 등을 기재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D그룹 지원자는 키나 몸무게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연령과 직업·출신학교·직장명·직위 등을 다 써야 했다. B사와 O사는 혈액형(RH- 혹은 RH+)을 비롯한 신체사항(키·몸무게)과 가족사항(연령·근무처·직위 등)을, H사와 L사는 가족사항을 묻고 있다.

온라인 취업포털 사람인이 최근 구직자 106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10명 중 4명이 가족 재산이나 직업·직위(37.1%·복수응답) 기재 요구에 불쾌했다고 응답했다. 또 10명 중 3명은 가족 구성원 학력(33.6%), 키와 몸무게·혈액형 등 인적사항(28.5%) 기재 요구를 불편했던 것으로 꼽았다. 어학성적 등 스펙 관련 우대조건(28.3%), 주민등록번호 등 민감한 정보 기재 요구(27.6%) 등에 대한 불만이 뒤를 이었다.

국내 기업은 직무능력과 관계없는 지원자의 가족사항이나 신체적 특징이 왜 그렇게 궁금한 것일까. 또 회사에 들어올지 안 들어올지 알 수 없는 지원자들의 개인정보를 과다하게 요구하고 보유하는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일부 대기업은 으레 해오던 관행일 뿐이라며 애써 의미를 축소하고 있지만, 정말 그런 것인지 알 수 없다. 오히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당락에 영향을 줄 것이란 불안감마저 형성돼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채용과 관련해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파악하기 위한 용도다. 회사 차원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문제인식이 있지는 않다”면서도 ”다만 향후 전반적인 채용 시장에서 해당 항목을 쓰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제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30대 그룹(시가총액 상위 30대 기업)에 속한 주요 대기업들은 이 같은 채용 문화에서 조금씩 탈피하고 있는 모습이다.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을 비롯 LG·SK·CJ·현대자동차·KT 등 국내 상위 30대 기업들은 최근 입사지원서 양식을 상당부분 수정했다.

실제 LG그룹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 공채부터 LG전자와 LG유플러스 등 각 계열사에 공통으로 가족관계와 신체사항 항목을 기재하지 않게 했다. 이밖에 주민등록번호는 생년월일로 대체했다. SK 역시 대졸자 공채 시 전 그룹사 공통으로 지원 서류에 사진과 주민등록번호·가족관계 등의 정보를 삭제하게 했다.

그러나 대졸 신입 공채가 아닌 수시 채용이나 경력직을 모집할 때는 얘기가 달라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L사는 올 상반기 대졸 공채부터 지원자 사진도 받지 않았다. 직무능력과 창의성을 보유한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올해부터 ‘스펙태클 오디션’ 채용을 시행하면서부터다. 이 기업은 이를 위해 입사 지원서 서류 접수 시 이름·이메일·주소·연락처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만을 기재하고 해당 직무와 관련한 주제에 대한 에세이만을 받아 서류합격자를 선발했다고 밝혔다.

물론 최근 대기업들이 채용과 관련해 내건 기치는 ‘스펙’ 타파다. 이런 분위기에서 스펙을 초월한 ‘직무능력’ 채용을 하겠다는 기업들도 늘었다.

예를 들어 SK그룹은 스펙 없이 지원자의 ‘스토리’로만 평가하는 오디션 형식의 ‘바이킹 챌린지’를 시행한다. 지원서에 이름·나이·성별·연락처·졸업연도만 적은 뒤 자신이 지원한 직무에 적합한 인재라는 것을 심사위원들에게 10분 내외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보여주면 된다.

현대자동차는 인성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새로운 방식의 장기 채용 프로그램 ‘The H’를 2013년 6월부터 도입했다. 기업이 인재를 직접 캐스팅한 뒤 4개월의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인성을 평가, 최종 신입사원을 선발한다.

하지만 서류작성 시에는 스펙을 쓰지 않더라도 결국 면접에서 볼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공채 면접관을 지낸 한 대기업 부장급 인사는 “면접을 볼 때 스펙 사항을 사실상 다 물어보게 된다”고 전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도 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률로 취업준비생들은 숨 막히는 취업 전쟁터에 이력서를 무기로 몸을 던졌다. 특히 과열된 스펙 쌓기 경쟁 속 '외모'는 스펙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취업준비생들을 성형외과의 문턱까지 내몰고 있다.

아울러 외모 중심 사회의 '성역' 같았던 일용직이나 아르바이트에서도 외모는 이제는 간과할 수 없는 취업의 중요 요소로 작용하게 됐다. 실례로 '용모단정' '예쁜 언니 구해요' 등의 자격 조건을 내세운 구인 광고를 종종 마주하면서 해당 업체 지원에 주저하기도 한다.

이처럼 취업에 있어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외모로 인한 인권 침해 피해 사례 역시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평소 외모가 취업의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확신하는 김모(28·여)씨는 "취업을 위해 현재 치아교정을 한 상태다. 취업을 위해서는 성형수술도 마다치 않고 있다"며 "못난 외모로 어렵사리 취업에 성공해도 직장 내 외모로 차별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소연했다.

취업준비생 최모(25·여)씨는 "아르바이트로 수술 비용을 모아 성형수술을 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며 "아르바이트를 하려 해도 외모가 준수한 구직자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한 온라인 취업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온 뚱뚱한 외모 때문에 겪게 된 아르바이트 면접 비화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해당 게시글 작성자는 서울의 한 음식점 서빙직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에 적극적으로 임했지만 "뚱뚱한 몸으로 민첩하게 일을 할 수 있겠냐"는 핀잔만 듣고 돌아서야 했던 씁쓸한 사연을 전했다.

실제 최근 한 취업포털이 인사담당자 539명을 대상으로 '채용 시 지원자의 이력서 사진 평가' 여부를 조사한 결과, 담당자 75.7%가 '반영한다'고 답했다. 특히 조사에 응한 인사 담당자의 45.6%가 '이력서 사진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 가산점을 주거나 합격시킨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전문가들은 "세계적으로 전례 없는 천박한 외모지상주의 풍토가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오래 전부터 자리 잡고 있다"며 "업무적 소양이나 능력보다 부차적인 외모의 정도로 고용 여부를 운운하는 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 행위이며 전형적인 갑(고용주)의 횡포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사회적 풍토를 고쳐나가지 않는다면 고용 차별로 피해자를 양산하는 결과를 또다시 가져오게 될 것"이라며 "중앙 정부나 산하 조직 기관에서는 고용 차별에 대해 강력한 규제나 처벌 마련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된다"고 전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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