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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 70년] 함기용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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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7-07 19:37:07 수정 : 2015-07-07 19:3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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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마라톤 제패하자 李대통령 "애국했다" 눈물 펑펑"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29분19초의 기록으로 고 손기정 선수가 월계관을 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반도는 기쁨의 눈물바다로 변했다. 당시 손기정의 우승은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던 국민을 달래줬다. 겨레가 지니고 있는 힘을 보여준 쾌거였다.

광복 이후에도 마라톤은 국민에게 환희와 감동을 선사했다. 1947년 서윤복옹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처음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했다. 3년 뒤인 1950년, 같은 대회에서 한국 선수단은 함기용(85)옹을 선두로 1, 2, 3위를 싹쓸었다.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옹이 세운 이 기록은 한국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한 국가가 국제마라톤에서 금, 은, 동메달을 휩쓸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2007년 케냐 선수들이 베를린마라톤에서 1∼3위를 석권하기 전까지 57년간 유일한 기록이었다. 보스턴마라톤은 1897년 시작한 대회로 올림픽을 제외하고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
함기용 고문이 1950년 미국 보스턴마라톤 을 1위로 통과하고 있다.

함옹은 보스턴마라톤에서 마지막 4㎞를 뛰다 걷다 했는데도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워킹 챔피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우승은 마라톤 풀코스 대회를 달린 지 세 번째 만이다. 1948년 런던올림픽 선수단에 합류했지만 국가당 3명의 선수만 본 경기에 참가할 수 있어 결국 본 무대에 오르지 못했던 아쉬움도 한 번에 날려버렸다. 6·25전쟁 등 격변의 시기를 거쳐 잠시 마라톤을 떠나 있던 그는 1980년대 후반 다시 돌아와 황영조, 이봉주 등 마라토너를 길러내는 데 앞장섰다.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대한육상경기연맹 사무실에서 보스턴마라톤의 영웅 함옹을 만났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한 뒤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 받은 환대를 떠올릴 때는 울먹이기도 했다. 침체에 빠진 마라톤계를 얘기할 때는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함기용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이 지난달 29일 서울 송파구 연맹사무실에서 진행된 인터뷰 도중 침체된 마라톤 부활을 위해 선수와 지도자가 각성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해방을 어디서 맞았나.

“고향인 강원도 춘천에서 맞았다. 지역에서 ‘대농’이신 부모를 만나 5형제 중 막내로 꽤 유복하게 자랐다. 그래서 교육도 잘 받아 1945년 춘천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 해방이 됐는데 당시 사회가 정말 혼란스러웠다. 학교 안에서도 학생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틈만 나면 싸웠다. 정말 모든 것이 엉망이던 시기에 청운의 꿈을 안고 1947년 서울 양정고보(현 양정고)로 왔다. 양정이 육상으로 유명했는데 내가 춘천에 있을 때부터 달리기를 잘했다. 당시 춘천사범, 춘천농업, 춘천고보 세 학교가 체육대회를 했는데 1500m에서 우승했다. 그 덕분에 양정 육상부에 들어갔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을 제패할 때 소감은.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에서 메달을 아무도 못 따자 국민의 실망이 말도 못했다. 그때 국민 채권까지 발행해서 올림픽을 다녀왔는데 기대를 저버렸으니 여론이 좋지 않아 도로에서 연습 못하고 삼청공원 토끼길에서 숨어 연습했다. 이왕 발을 들여놓은 마라톤 열심히 연습하자고 서윤복 선배와 다짐했다. 노스웨스트항공을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손기정 선배가 코치로 갔는데 누가 되든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했다. 대회 끝나고 23일에 걸쳐 귀국했다. 공항에서 바로 경무대(청와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러 갔다. 이 대통령이 눈물을 쏟았다. 외교관 몇백명 보내는 것보다 훨씬 애국했다고 감격했다. 지금은 사라진 서울운동장에서 국민 대환영대회까지 열었다. 어떤 선수도 그런 환대는 못 받아봤을 것이다.”

―마라톤 영웅인데 갑자기 진로를 틀었다. 무슨 사연이 있나.

“손기정, 권태하, 남승룡 등 우리 마라톤 선배들을 보니 사회 나가서 괄시를 받았다. 운동을 잘하더라도 졸업장이 필요했다. 제대로 학교를 나와야 무시를 안 받고 성공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1951년 고려대 상학과에 들어갔다. 1955년 졸업하고 산업은행에 들어갔고 이후 중소기업은행으로 옮겨 정년까지 마치고 나왔다. 은행에서 마라톤 관련 일도 했다. 1960년대 중반 한국은행, 한일은행, 중소기업은행이 마라톤 팀을 만들었다. 제일 좋은 선수는 한국은행이 데려가고 그다음은 한일은행, 중소기업은행 순으로 가져갔다. 은행팀들이 마라톤 기록향상에 기여했는데 1970년대 초 결국 해체됐다. 재무부에서 억지로 만들게 했고 그때나 지금이나 관람객이 없다 보니 은행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1950년 4월 미국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한 한국 선수단(왼쪽부터 고 손기정, 최윤칠, 함기용, 손길윤)이 현장에서 훈련하고 있다.

―정년을 마치고 다시 육상계로 돌아왔는데.

“당시 한국전력 박정기 사장이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을 맡았다. 박 회장이 88서울올림픽을 마친 다음에 나를 만나자고 했다. 육상경기연맹 전무를 맡아 달라고 했다. 손기정, 남승룡 선배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3일 뒤 결국 승낙했다.1989년부터 12년간 육상연맹에 몸담았다. 그때 바르셀로나 황영조 우승도 나오고 4년 뒤 이봉주 은메달도 나왔다. 당시 한국 마라톤이 정말 잘 나가서 우리 선수들이 몇 만불씩 받고 뛰러 갔다. 내가 일할 때는 운이 좋았는지 한국에서 세계적인 선수가 나왔다. 그때는 일선 코치와 선수와 생활을 같이하는 감독들을 육상연맹 집행부로 못 들어오게 했다. 코치나 감독은 능력 있어도 선수를 육성하는 데 집중해야지 집행부에 와서 명함을 팔고 다…니면 선수 못 기른다.”

―한국 마라톤이 침체기다. 90년대와 다른 점을 꼽는다면.

“마라톤이 잘 되려면 훌륭한 지도자, 인간성이 뛰어난 선수, 기업 등의 탄탄한 후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1990년대에는 고인이 된 정봉수 감독이 있었다. 정 감독은 원래 마라톤을 하던 사람이 아니라 부단히 노력했다. 우리보다 조금 앞선 일본 마라톤의 감독과 코치로부터 훈련법을 배웠다. 황영조라는 걸출한 스타가 혹독한 훈련도 견뎠다. 한국전력, 코오롱 등이 마라톤팀을 만들어 지도자와 선수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지금은 현역에서 뛰는 선수와 지도자 모두 정신 차려야 한다. 정봉수 같은 지도자도 없고 혹독한 훈련을 견딜 선수도 없다. 잘할 때도 있으면 못할 때도 있지만 옛날처럼 훈련한다고 하면 도망간다. 그러면서 대충 하니 발전이 없다. 세계적인 마라토너가 되겠다는 의지도 없이 무슨 운동을 하겠나 싶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 1, 2, 3위를 석권한 한국 선수들(왼쪽부터 손길윤, 함기용, 최윤칠)이 뒤풀이에서 건배를 하고 있다.
함기용 고문 제공

―최근 케냐 마라토너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 선수 귀화 논란이 마라톤계의 큰 이슈다.

“귀화는 상관없는데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데리고 나가는 건 반대한다. 우리는 마라톤 강국이었다. 근래에 와서 아프리카 선수들이 잘하니 귀화를 시켜서까지 올림픽 금메달을 따려는 것인가. 꼭 그렇게 해서 세계 1위를 해야 하나. 마라톤 선배로서 국민정서에 어긋나는 일에 동의할 수 없다. 그 선수가 우리나라가 좋아 국적을 얻는 건 내가 관여할 부분이 아니다. 팀에 합류해 페이스 메이커를 해 선수들 기량향상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프로농구처럼 다문화가정 자녀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그 친구는 다르지 않은가. 태극기를 달고 국제무대 나가게 할 수는 없다.”

―광복 70년을 맞는 소회는.

“마라톤 선수였으니 그 생각뿐이다. 1936년 손기정 선배가 산화할 각오로 달려 우승한 쾌거는 우리 민족의 투혼과 가능성을 입증했다. 마라톤이 다시 일어서야 하는데 답답하다. 한국 마라톤 어제와 오늘, 우리 역사에서 찬란했다. 세계 굴지의 대회에서 위상을 떨친 스포츠가 한국 마라톤이다. 우리가 만든 금자탑을 가까운 시일 내에 좋은 후배가 나와서 다시 세우고 세계 마라톤 강국으로 군림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팔순이 넘었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은퇴 뒤에는 대한육상경기연맹 몸 담아서 좋은 후배 많이 길렀고 또 좋은 지도자들이 나와서 올림픽 제패도 맛봤다. 무한한 영광을 누렸는데 마라톤이 사경길에 들어서니 팬들 앞에 서기 부끄럽다.”

최형창 기자 calling@segye.com

■ 함기용 대한육상경기연맹 고문은…

▲1930년 11월 14일 강원 춘천 출생 ▲1948년 런던올림픽 마라톤 후보 ▲1950년 54회 보스턴마라톤 우승 ▲1955년 고려대 상학과 졸업 ▲1989∼2000년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 겸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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