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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신 몰아낸 처용의 힘, 메르스 사태에 되새겨 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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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07-05 21:32:37 수정 : 2015-07-05 22: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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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헌의 만史설문] 〈68〉 제웅과 처용
1100년 전 처용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무지와 오만으로 하릴없이 역신에 당하고 만 정부와 정치인, 현대의학의 민낯에 시민들은 허망하기만 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허제비나 제용이라고 했다. ‘허제비치기’는 동네 아이들에게 정월대보름의 신나는 놀이였다.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어떤 집 대문 앞에서 “보름거리 좀 주시오” 하면 동전 끼운 지푸라기 인형을 내주었다. 인형은 골목 바깥에 던져버리고, 돈만 챙겨 한판 잘 먹었다. 50년 전쯤까지 농촌에서 흔히 보던 풍경이었다고 전라남도농업박물관 윤영국 학예연구관은 설명한다.

액운(厄運) 든 나이를 맞는 사람이 있는 집에서 이 허제비를 만들어 이웃에 귀띔을 했다. 액운은 남자의 경우 10살 때부터 9년마다 든다고 했다. 호박탈 마귀분장으로 이웃을 찾아다니는 서양 아이들의 핼러윈 풍습과 이미지가 비슷하다. 기쁜 마음으로 흔쾌히 재물을 나눈다는 ‘그림’도 그렇다. 사람 사는 동네의 인정인 것이다. 
처용의 설화와 원망(願望)이 그 원본이었을 것으로 해석되는 제웅. 짚 인형을 때리거나 던져서 액운을 쫓는 ‘허제비치기’ 놀이의 재료였다.
전라남도농업박물관 제공

허제비는 허수아비다. 제용(祭俑)은 ‘제사를 위한 허수아비’다. 초우인(草偶人)이라는 이름도 있다. 제웅치기라고도 했고, 한자말로 타추희(打芻戱)라고도 했던가 보다. 芻는 풀이나 짚이니 액운 담은 허수아비를 때려 액막이를 하는 것이었겠다. 걱정거리 없애는 멋진 방법, 잊혀져가는 민속이다.

추령(芻靈)이나 처용(處容)이 ‘제웅’의 본디라는 설(說)이 있다. 추령은 짚 인형에 실린 혼령이다. 뜻도 그렇지만, 추령 처용 제용 초우인 등의 소리도 제웅과 비슷하다. 그중 처용이 제웅이라는 설(說)이 유력하다. 우리 주변 사물들의 이름 형성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처용탈

처용이 누구인가? 역신이 제 아내를 덮친 현장을 호방하게 노래와 춤으로 극복하여 인구(人口)에 널리 오래 회자(膾炙)되는 설화의 주인공이다. 싸구려 스캔들이나 멱살잡이 칼부림이 아니었던 뜻을 새겨야 하는 대목이다.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 때의 얘기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놀러 다니다가/ 돌아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일세./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이하랴’

에로티시즘까지도 슬며시 묻어나는 이 희한한 노래 ‘처용가’의 저자가 처용이다. ‘내 것 아닌 두 다리’의 주인은 실은 역신(疫神)이었다. 처용에게 역신은, 마음과 함께 무릎을 꿇는다.

그의 대범함에 감동한 역신은 자신의 본디 모습을 드러내며 “당신의 모습이 있는 곳이면 절대 그 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 후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 그림을 대문 앞에 붙여 역신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역신은 몹쓸 전염병의 화신, 인간을 괴롭히는 병마였다.

절묘한 반전, 1100년 전의 큰 상징이다. 역신 병마 전염병의 존재, 그 가공할 위력을 그때 사람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기껏 ‘낙타감기’ 정도로 그리 호들갑 떨면 관광객 줄어들고 경제가 드러눕는다며 ‘박원순의 똥볼’을 비웃고 화내던 당국과 정치가들의 무지와 오만과 비교되지 않는가? 본디 없는 이들 같으니.
처용의 영향은 크다. 나라의 사귀(邪鬼)를 몰아내는 궁중무용 처용무도 그중 하나다. 아내를 범한 역신을 향해 춤을 춘 처용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그렇다. 스토리는 힘이 세다. 사진은 처용무.
세계일보 자료사진

액막이는 대비하는 것이다. 자연이 왜 화를 내어 세상을 뒤집는지 뜻을 생각하고, 겸허하게 마련하는 비손이다. 두 손을 비비면서 신에게 병이 낫거나 소원을 이루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비손이다. ‘메르스 따위’에 치명상을 피하지 못한 정부가 부끄럽다. 낙타고기나 젖을 날것으로 먹지 말라고도 했다. 비손이나 처용의 얼굴 그림이 그보다 훨씬 더 미덥지 않은가.

처용의 그 상징성은 우리 역사에서 튼실하다. 대문의 처용 얼굴과 같이 풍속의 구석구석에 그 영험함이 똬리를 틀고 앉은 것은 물론 문학, 미술, 무용, 음악 등 예술 여러 부문에 두루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어릴 적 놀이의 대상물 제웅이 그 처용의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고 무릎을 친 기억이 생생하다.

처용무는 2009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궁중무용이다. 궁중무로는 유일하게 탈(처용탈)을 쓴다. 1인무였으나 세종대왕 때 5인무로 바뀌었다. 동서남북과 중앙의 다섯 방향이나 음양오행의 뜻을 적용한 것이겠다. 수제천(壽齊天)이라는 장중한 음악이 깔린다.

역신은 두역(痘疫)이나 마마라고도 하는 천연두(天然痘)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설화에서는 모든 질병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틀을 좀 키우면, 액이나 살(煞)과 같은 모진 기운인 것이다. 비누로 손 잘 씻거나, 특별한 마스크를 쓰는 것만으로 이를 다 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런 주제를 삼라만상(森羅萬象) 즉 우주의 이치로 밝게 보고 설화라는 장르로 빚어 놓은 것이다. 선조들은 이미 스토리텔링의 천재였다. 우리가 잃어버린 통찰력일 터다. 그 스토리는 첨단의 과학이 뽐내는 오늘날에도 힘이 세다. 그 큰 삼성병원 대문 앞에 처용 그림 붙이는 것과 같은, 지극한 마음이 없었던 것이 이번 메르스 사태의 큰 패착이었던 것은 아닌지?

■ 사족(蛇足)

역신(疫神)은 질병 귀신이다. 疫은 ‘병들어 기댄다’는 疒(녁)과 ‘힘든 일’ 역(役)의 합성이다. ?은 보통 병원의 병(病)이나 통증의 통(痛)처럼 다른 글자와 합쳐져서 쓰인다. 큰 뜻 아래 여러 글자를 거느리는 한자의 갈래인 부수(部首)로는 ‘병질 엄’자다. 즉 글자 이름은 ‘녁’인데, 부수자 이름으로는 ‘병질 엄’인 것이다.

책상 위 한자사전 중에서는 비교적 큰 책인 민중서림 간(刊) ‘한한대자전’에서 疒부수에 속한 글자를 세어보니 248자나 됐다. 더 큰 사전에는 더 많을 것이다. 병(病)과 질(疾)에 관계되는 많은 글자들을 만든 바탕 글자인 것이다.

이 疒자가 의미요소(형形)가 되고 여기에 합쳐지는 글자가 소리요소(성聲)가 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이런 글자를 형성(形聲) 또는 형성문자라 한다. 갑을병(甲乙丙)의 丙자가 疒자 안에 들어가서 이루는 병(病)자가 대표적이다. 한자를 이해하는 힌트 중 하나다. 형성문자가 전체 한자의 85% 이상이니 이 힌트는 퍽 중요하다.

증세 증(症), 피로 피(疲), 상처 이(痍), 흉터 흔(痕), 치료 료(療), 버릇 벽(癖), 치매 치(癡), 암 암(癌), 아플 농(?) 등 그 248자 중의 매 글자들이 형성자라는 사실을 그림으로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그림)글자를 볼 때마다 어떤 그림인지 눈여겨보면 도움이 된다. 진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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