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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길목 광복군 청년 장준하 2년의 기록

입력 : 2015-05-23 03:05:35 수정 : 2015-05-23 03:0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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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지음/돌베개/1만6000원
돌베개-장준하의 항일대장정/장준하 지음/돌베개/1만6000원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7월7일 밤이었다. 중국 쉬저우의 일본군 ‘쓰카다 부대’에 배속되어 있던 장준하는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 등과 함께 탈출한다. 중일전쟁 7주년을 맞아 부대원 전원이 회식을 하느라 허술해진 경계망을 뚫고 탈영한 것이다. 장준하 일행은 7개월여에 걸쳐 쉬저우에서 충칭까지 600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를 만나는 감격을 누렸다.

‘돌베개’는 독립운동가, 민주투사로 한 시대를 살았던 고 장준하 선생이 광복군 시절 등에 대해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돌베개는 장준하가 탈출 당시 동지들과 사용한 암호라고 한다. 이번에 나온 책은 전면개정판이다. 부대에서 탈출한 직후부터 임시정부의 환국 직후까지 2년여 시간의 기록이다. 1918년 평북 의주에서 태어난 장준하는 1944년 1월 일본군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탈출했고, 1945년 11월 김구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귀국했다. 이후 잡지 ‘사상계’ 발행 등으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하다 1975년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다.

책에 따르면 당시 장준하 일행이 배속돼 있던 쓰카다 부대는 탈영병이 거의 없었던 일본군 정예 사단이었다. 그만큼 탈출은 어려웠다. 이들은 변변한 신발이나 복장도 없이 걸어서 중국 대륙을 헤매다 일본군 수색대에 붙잡힐 뻔했고, 농민들에게 구조되기도 했다. 장준하는 책에서 “못난 선조가 되지 않으려고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탈출했다”고 밝혔다.

충칭에서 김구 등 임정 요인들을 만난 감격의 시간도 잠시였다. 장준하는 임정 내 파벌 싸움에 넌더리를 냈다. 그는 임정 요인과 동포들이 모인 회의에서 폭탄발언을 한다. “죽을 힘을 다해 도착한 이곳을 떠나 다시 일본군에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일군에 들어간다면 꼭 일군 항공대에 지원하고 싶습니다. 일군 항공대에 들어간다면 충칭 폭격을 자원, 이 임정 청사에 폭탄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임정이 이렇게 네당 내당하고 겨누고 있을 수가 있습니까?”

1945년 2월 장준하 일행은 광복군 제2지대장인 이범석의 추천으로 미국 전략첩보대 OSS에 소속되어 특수훈련에 돌입했다. 김구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이것도 무위로 돌아갔다.

장준하 선생이 1973년 12월24일 서울 YMCA에서 ‘개헌 청원운동 취지문’을 발표하고 있다.
장준하는 1945년 11월23일 임정요인과 함께 환국했지만 국내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서 큰 혼란을 겪었다. 임정 때와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민족 진영은 몇 개의 파벌로 나뉘어 싸웠다. 장준하는 일기를 통해 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허헌 등 주요 인사의 발언과 인물평을 곁들여 해방정국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장준하는 ‘해방은 맞았지만 민족의 운명은 이미 강대국들 손에서 요리되고 있었다’고 한탄한다.

고 함석헌 선생은 서평에서 “내가 이 책을 읽었다기보다 이 책이 나를 빨아들여 하늘과 땅 사이에 회오리바람을 쳤다”면서 “함정에 빠진 젊은 사자들의 울분과도 같이 처절했다”고 밝혔다. 장준하의 글은 문장력이나 문학적 성취도에서 지금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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