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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는 교인 섬길줄 알아야 … 종교의식만으론 변화 못 시켜"

입력 : 2015-02-24 20:25:52 수정 : 2015-02-24 22: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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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연합 첫 100세 성직자 이요한 목사 1954년 문선명(1920∼2012) 총재가 창립한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일명 통일교)은 올해 61주년으로 역사가 일천하지만, 그 짧은 세월에 세계적으로 뿌리내린 유일한 종교로 알려진다. 가정연합에도 올해 100세를 맞는 목회자가 탄생했다. 주인공은 이요한 원로목사다. 그는 통일신학교(선문대 전신) 초대 학장을 맡아 양창식 천주평화연합(UPF) 의장, 황선조 선문대 총장, 용정식 UPF 아시아회장 등 수많은 목회자를 길러냈으며, 지금도 세계순회사 직분을 갖고 선교에 앞장서고 있는 현역이다. 1952년 통일교에 입교한 첫 남자 신도이며, 당시로서는 유일하게 신학교 출신이다. 문 총재가 통일교 교리인 ‘원리원본’을 집필할 때 감수를 맡겼을 정도. 그는 가슴에 심장박동기를 달고 지내는 것 외에는 얼굴이며 기억력이 40∼50대를 뺨친다. 기자의 질문 의도를 적확히 꿰뚫고 답변했고, 지금도 한 달에 15회가량 전국교회를 순회하며 교인들의 상담에 응한다. 99세이던 지난해 10월에도 비행기를 타고 대만을 순회했다. 이 목사가 적을 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가정연합 분당교회(담임목사 송종익)에서 그를 만나 가정연합의 사상적 힘과 종교, 가정, 북한 문제, 인류의 미래 등에 관해 이야기를 들었다. 

이요한 목사는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효와 영성을 키우는 장소로 거듭나야 하며, 가정에서 효의 문화가 재창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가정연합 입교 동기를 들려 달라.


일본 도쿄의 동아신학교에 다니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하고, 1945년 귀국해 함경도 연안에서 전도사 생활할 때 문선명 선생(당시는 선생님으로 부름)의 소문을 들었다. 1940∼50년대 우리 사회에는 메시아의 한국 재림 사상이 만연해 있었다. 문 선생도 그들 가운데 한 분이었다. 공중 재림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재림이라니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문 선생으로 여겨지는 분이 꿈에 나타나고, 한 여인이 홀연히 찾아와 문 선생을 증거하며 “3일 후에 쌍무지개가 뜨거든 내 말이 진실인 줄 알라”며 떠났다. 실제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보고는 놀라서 그 길로 부산에 내려가 문 선생을 처음 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도록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에 압도당했다.

―문 총재를 어떻게 느꼈으며, 어떤 점이 끌렸는가.

우선 사람을 볼 때 상대방의 가계(家系)까지도 꿰뚫어 보는 것이 남다르다. 나도 신학을 공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많은 신학자들이 구약과 신약의 연계성을 잘 모른다. 신약은 최고로 여기지만, 구약은 ‘도덕적 귀한 말씀’ 정도로만 이해한다. 신학교 때 우리를 지도했던 와타나베 젠타 교수도 유명한 구약 전공 학자였지만, “구약은 성경이 아니다”고 말했다. 이것은 큰 모순이다. 그런데 문 선생께서 신구약을 연결해 하나님의 인류 복귀역사를 설명하는데, 머리가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 총재의 특별한 업적을 꼽는다면.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로 규명하고, 그 관계를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기독교계에서 모두가 ‘죽어서 천당 간다’고 외칠 때, 그분은 이 땅에서 악한 세상을 없애고 선한 세상을 만드는 소위 ‘복귀섭리’에 고분분투했다. 요즘에 와서 개신교 목사님들 가운데 이따금 문 선생과 유사한 주장을 펴는 분들이 있다. 역사가 지나면 문 선생의 업적이 더욱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는가.

협회(가정연합) 창립 전에 교회 간판도 없이 전도할 때다. 어느 교단에서 나왔느냐고 할 때 할 말이 없었다. 1954년 협회가 창립됐지만, 당시 목회자나 전도사들 가운데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 전무했다. 마태복음이 뭔지도 모른 채 ‘새 말씀’이라는 의욕만 가지고 전도를 나가 애를 많이 먹었다.

―신앙을 하면서 문 총재의 사명을 의심하거나 반기를 든 적은 없었는지.

내가 무엇을 물어볼지 미리 알고 해박한 답을 주시기 때문에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몇 번 충돌은 있었다. 협회가 돈을 대서 지방 교회를 지어줘야 한다고 하실 때, 또 한번은 공기총 제조 공장을 만든다고 할 때다. 교회는 목회자가 지역민의 협조를 받아 스스로 지어야 발전할 수 있다고 건의했고, 공기총 공장보다 신학교 짓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말씀 드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워낙 통찰력이 높은 분이어서 말씀을 어길 엄두는 못냈다. 그분으로서는 복귀섭리 역사를 하는데, 재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어차피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기에 스스로 재정 확보에 매진했을 것으로 본다. 여기에는 일본이 가장 큰 공로자다.

―현대인들이 종교를 점점 멀리하고 있다. 종교가 문제인가, 신앙자 개인이 문제인가.

종교가 문제라고 본다. 성직자들이 신령과 진리의 사람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종교 의식만으론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성직자 스스로 신령하지 않으니 사람을 못 만드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교인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의 종노릇을 하며 교인들을 섬겨야 한다. 종교가 점점 냉랭해지고, 하나의 문화로 전락해 안타깝다.

―종교의 기치를 다시 드높일 수 있는 해법은 있는지.

하나님의 존재를 새롭게 각인시켜야 한다. 하나님은 무조건 인간을 돕고 협조하는 분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원할 때 협조한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나님도 협조하지 않는다. 또한 사후세계(영계)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릴 수 있어야 한다. 통일원리에는 지상세계가 ‘무형실체세계(사후세계)의 그림자’라고 설명돼 있다. 과학이 발달하면 영계를 찍는 카메라가 나올 것이다. 다음으로, 종교가 살아남으려면 효와 영성을 키우는 장소로 거듭나야 한다. 문 선생은 효는 자식이 부모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에게 돌리는 것으로 시작돼야 한다며 효의 도리를 혁명적으로 가르쳤다. 부모가 자식에게 예를 다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부족한 부분은 자식에게 이해를 구하며 가정에서 효의 문화를 재창조해야 한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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