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망각한 민족엔 통일도 미래도 없다” “조선사는 내란이나 왜구의 병화에서보다도 조선사를 저작하던 그 사람들의 손에서 더 많이 없어지고 파괴되어 버린 것 같다.”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 1931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며 탄식한 말이다.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사기’를 “사대주의를 근본으로 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탄한 단재답다. ‘조선상고사’는 기존의 굴종사관에서 벗어나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으로 사대주의적 관점을 바로잡은 역사서다. 상고시대 우리 역사가 중국 동북과 요서 지역까지 미쳤고, 단군시대에는 산동반도까지 경략했다는 기술이 눈에 띈다.
“동·북 양 부여를 빼버려 조선 문화의 근원을 진흙 속에 묻어 버리고, 발해를 버려서 삼국 이래 결정된 문명을 짚더미에 내던져 버리고, … 국내 역사서와 외국 서적을 취사선택하는 데 흐려서 전후가 서로 모순되고 사건이 중복된 것들이 많아서 거의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은 교과서에서 접한 내용과 영 딴판이다. “김유신은 지략과 용기가 있는 명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무서운 정치가였으며, 그 평생의 큰 공은 전쟁터에 있지 않고 음모로 적국을 혼란에 빠뜨린 데에 있었던 사람이다.” 이쯤 되면 협잡꾼 수준이다. 존경심이 싹 가신다.
세종대왕에 대한 평가도 혹독하다. “세종이 사책(史冊)에 비상히 유의하였으나, 다만 할아버지인 태조와 아버지인 태종이 호두 재상인 최영의 북벌군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사대의 기치를 들고 혁명의 기초를 세웠기 때문에 권근·정인지 등에게 명하여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편찬할 때 몽골의 압박을 받던 고려 말엽 이전의 각종 실기(實記)에 근거하여 역사를 짓지 못하고, 몽골의 압박을 받은 이후 외국에 아첨하던 문자와 위조한 고사(古事)에 근거하여 역사를 지어 구차스럽게 그 사업을 끝마치고, 정작 전대의 실록은 세상에 전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규장각 안에 비장해 두었다가 임진왜란의 병화에 불타 없어져 버렸다.” 세종도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지적이다. 대왕으로서의 이미지가 구긴다.
앞서 1915년 ‘한국통사’를 집필한 백암 박은식 선생은 ‘서언’에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라는 가히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가히 멸할 수 없다. 지금 나라가 멸하였어도 역사만 살아 있으면 나라는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국교(國敎)와 국사(國史)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國魂)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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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진 논설위원 |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는 20여만권의 서적과 사료를 인멸했다. 한국사 왜곡과 민족 의식을 배제하여 일본 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 의식을 말살하고자 1916년 설립된 조선사편수회가 앞장섰다. 방대한 역사 사료를 강제로 뺏거나 수많은 유물을 발굴·도굴·파괴한 일제는 그것으로 한국사를 부정, 왜곡하는 데 주력했다. 나아가 일본의 입맛에 맞는 사료만을 추출하여 식민사관을 체계화했다.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를 찾기 위해 한반도는 물론 중국, 만주까지 샅샅이 뒤져 대부분 소각했다. 조선사 말살 작전이다.
올해는 일제로부터 광복된 지 70년이 되는 해이다. 해방둥이가 칠순이 되도록 우리 민족의 근원인 단군조선 등의 상고사를 바로잡지 못한 것은 일본과 중국의 교묘한 역사 왜곡에도 이유가 있지만, 일제의 한국사 왜곡에 부화뇌동하여 식민사관, 실증사관, 반도사관으로 날조·왜곡된 역사를 답습한 주류 학계 부역자들과 비판 없이 수용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역사를 망각한 민족엔 미래가 없다’고 했다. 광복 7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은 올해를 한국사 복원 원년으로 삼아보자.
조정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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