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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머문 사찰마다 편액… 日, 400년 전에도 '한류'

입력 : 2014-12-06 06:00:00 수정 : 2014-12-06 10: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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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선린외교의 흔적' 시즈오카를 가다 나무 사이의 좁은 길을 오른 지 잠시, 장관(壯觀)이 갑자기 다가왔다. 가는 비와 안개의 시샘에 눈 덮인 후지산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다 너머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시미즈(淸水)반도의 와태(瓦胎). 오른쪽에는 태평양이 내륙으로 파도를 연방 흘리며 행자(行者)의 눈을 빼앗고 있었다.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가 도쿄를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시즈오카(靜岡)현 삿타 도우게(さった峠)에 서자 400년 전 그들의 흥분과 슬픔, 외로움이 눈을 타고 느껴지기 시작했다. 시간과 무관심 속에 침잠해 있던 조선통신사의 마음과 한·일 양국의 선린외교가 퍼렇게 살아오는 듯했다.

일본이 조선통신사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 만든 고갯길 ‘삿타 도우게’.
한국 민간단체와 일본 지방자치단체가 공동으로 조선통신사 유적의 유네스코 기억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가운데 4일 조선통신사의 흔적이 많은 시즈오카를 찾았다. 김양기(81) 전 시즈오카대 교수의 안내로 일본 언론 관계자 30여명과 동행했다.

먼저 오키쓰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 산 중턱의 세이켄지(淸見寺)를 찾았다. 100m 앞에 바다가 펼쳐진 이곳에서 통신사들은 잠시 머물며 기력을 회복했다. 입구에는 1711년 제8차 조선통신사의 통역관이던 현덕윤(1676∼1737)이 쓴 편액 ‘동해명구(東海名區)’가 사람을 맞았다.

세이켄지 입구에 제8차 조선통신사 통역관 현덕윤(1676∼1737)이 쓴 편액 ‘동해명구(東海名區)’가 걸려 있다.
사찰 안으로 들어서자 제6회 조선통신사 정사 조형(1606∼1679)이 쓴 편액 ‘흥국(興國)’이 불당 정면에 걸려 있었고, 오른편 종루(鐘樓)엔 1643년 조선통신사의 일원이던 천문학자 박안기(1608∼?)가 쓴 편액 ‘경요세계(瓊瑤世界)’가 걸려 있었다. 아름다운 옥(玉)을 의미하는 ‘경’과 ‘요’는 조선과 일본 두 나라를 비유하는 것이라고 전 시즈오카시 문화재과 직원 와타나베 야스히로(渡邊康弘)가 설명했다.

경내 보물관에는 조선통신사 일행이 쓴 글귀를 새긴 현판이나 사찰 관계자와 나눈 필담, 사찰의 부탁으로 그린 수묵화 등이 보존돼 있었다. 56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부자(父子)의 시도 눈에 띄었다. 1655년 제6차 조선통신사 일원으로 절을 찾은 부친 남용익(1628∼1692)이 남긴 시를 1711년 제8차 조선통신사의 일원이던 아들 남성중이 보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기리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일본 시즈오카현 세이켄지 측이 재현한 400여년 전 조선통신사의 ‘1식15찬’ 식사 모습.
사찰 측은 본당 2층에서 400년 전 조선통신사들이 실제로 먹었던 ‘1식15찬’의 식사를 재현해 보여줬다. 도미와 전복, 민물장어 등 고급 요리가 가득한 성찬이었다. 에도 막부는 당시 조선통신사를 맞기 위해 막부의 1년 재정보다 더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다음으로 태평양이 보이는 산자락에 위치한 가이안지(海岸寺)를 찾았다. 나무 위에 ‘조선국’ 소속임을 분명히 적시된 편액이 절 입구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김 전 교수는 “조선통신사가 조선국이라는 글을 쓴 것으로 보아 나라 간 외교사절로 왔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조선국’ 통신사가 쓴 편액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가이안지’의 편액.
취재진은 이어 삿타 도우게에 올랐다. 고갯길은 에도 막부가 조선통신사의 안전한 통행을 위해 주민을 동원해 산 중턱에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2008년 ‘걸어서 동경에 가다!- 21세기 조선통신사’를 쓴 최덕기는 이곳을 조선통신사의 길 중 최고의 절경이라고 꼽았다. 맑은 날에는 후지산이 보인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통신사 일행이 휴식하기 위해 들렀다는 호타이지(寶泰寺)를 찾았다. 크지는 않지만 연못과 다리, 석등이 조화를 이룬 정원이 나타났다. 조선통신사 신유한(1681∼?)은 이곳의 정원을 “그 아름다움은 나라에서 제일”이라며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정원 가운데에는 조선통신사의 선린외교를 기리는 ‘통신사 평화 상야등(常夜燈)’이 세워져 있다. 조선통신사 400주년인 2007년 조선통신사의 역사를 통해 세계평화에 대한 기원(祈願)으로 연결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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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때부터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던 조선은 두 차례의 왜란(1592∼1598)으로 사절단 파견을 중단했다가 1607년 파견을 재개했다. 이때부터 매번 400∼500명 규모로 보내 1811년까지 12차례 이어졌다. 이들은 한성을 출발, 시모노세키(下關)-오사카(大阪)-교토(京都)-나고야(名古屋)-에도(江戶)-닛코 등으로 이어지는 왕복 4000㎞의 대장정을 벌였다.

조선통신사는 포로 송환을 희망한 조선 정부와 반항하는 다이묘에 대해 정권의 정당성 강화를 겨냥한 에도 막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양국의 선린외교를 강화하고, 조선통신사들과 일본 지성인 간 교류를 통해 우리 문화를 전수하는 등 ‘한류’를 선도한 측면 또한 분명해 보였다.

대학시절 도쿄 진보초의 고서점에서 조선통신사를 처음 알게 된 이후 조선통신사를 연구한 김 전 교수는 “두 나라 간 외교적 활동과 양국 지성인들의 문화 교류,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봐야 한다”며 “조선통신사를 통해 서로 함께 알아갈 길이 열린다면 양국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시즈오카=글·사진 김용출 특파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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