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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헤이트 스피치' 인종차별 판결, 그후 1년

입력 : 2014-10-06 19:19:56 수정 : 2014-10-06 23: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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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특회 상대 첫 개인자격 손배소송 낸 리신혜 씨
열도 곳곳 ‘혐한 언동’ 여전… “내 이름 모욕당하고 공포 느껴”
작년 10월7일 일본 교토지법은 혐한단체인 ‘재일(在日)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이 교토 조선학교 주변에서 벌인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가 유엔 인종차별철폐조약 등에서 금지하는 ‘인종차별’에 해당된다며 유죄판결을 내렸다. 특정 민족과 집단 등에 대한 공개적인 혐오 언동인 헤이트 스피치를 인종차별로 규정한 일본 법원의 첫 판결이었다. 재특회 활동은 이후 상당히 위축됐지만 아직도 일본 열도 곳곳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벌이고 있다. 이에 맞서 일본 시민들과 재일 한국·조선인의 저항도 점점 거세지고 있다. 이 가운데 재일 한국인 프리랜서 작가인 리신혜(43)씨가 8월18일 재특회 회장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개인으론 처음 제기했다. 당시 한국 언론을 비롯해 외신들은 “헤이트 스피치와의 전쟁이 시작됐다”며 그의 소식을 전 세계로 타전하기도 했다. 세계일보는 리씨를 만나 그의 분투기를 들어봤다.

“배외주의 데모에 반대하는 많은 메이저리티(다수)가 데모의 과격함에 시선을 빼앗겨 헤이트 스피치가 야기하는 해악, 특히 마이너리티(소수)의 심신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고 인생을 파괴할 정도로 피해를 주고 있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헤이트 스피치는 무엇인가’, 2013)

일본의 헤이트 스피치 전문가 모로오카 야스코(師岡康子) 변호사의 이 같은 지적이 가슴속에서 내내 메아리쳤다. 피해자들은 어떤 고통을 느끼고 무엇에 분노하는 걸까. 우리는 과연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사회는, 국가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면의 울림은 헤이트 스피치에 맞서 개인으론 처음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재일 한국인 리씨로 향하게 했다. 인터뷰는 지난 1일 오후 1시부터 3시간 반 동안 오사카 쓰루하시(鶴橋)역 근처의 한식당과 근처 공원에서 진행됐다.

리신혜씨는 “헤이트 스피치 시위에 항의하지 않는 많은 일본인을 보노라면 ‘나는 인간이 아니고 사라져야 할 존재’라고 생각돼 너무 무섭다”고 말한다. 어릴 적 무용을 배운 그는 2주 전 오키나와에 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소송을 제기하게 된 경위와 과정, 재판 상황은.


“재특회가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쿄 신오쿠보에서 데모한 후에 ‘산보’라는 이름으로 대로가 아닌 좁은 길까지 들어가 가게 영업을 방해하는 걸 봤다. 이에 화가 난 젊은 여성 트위터들이 사쿠라이 마코토(櫻井誠) 재특회 회장을 향해 트위터 멘션을 했다. 나는 이들 젊은이의 반발 모습을 2013년 초에 ‘가제트통신’ 등에 게재했다. 이후 오사카 등에서 벌어지는 각종 헤이트 스피치나 항의 데모를 취재해 인터넷 언론에 보도해왔다. 그런데 글에 불만을 품은 사쿠라이 회장 등이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의미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멸시하며 사용) 등 차별적인 표현을 인터넷에 반복적으로 올려 비판했다. 그래서 반 년 이상 준비해 제기하게 됐다. 7일 사쿠라이의 1차 구두 변론으로 시작돼 월 1회 페이스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재특회 등으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았나.

“사쿠라이 회장이 시위 등에서 나를 모욕한 것도 있고, 인터넷에서 재특회 회원들이 ‘죽이자’ 하는 비방글을 올리기도 했다. 나의 메일로 ‘죽어라, 일본에서 나가라’ 등의 항의 메일을 반복적으로 보내기도 했다.”

―피해나 고통은.

“헤이트 스피치를 받거나 보고 있으면 맞는 기분이 든다. 주위에 친구가 있어도 고독감을 느끼고 심지어 주위조차 신용할 수 없게 되고 고립사하는 듯한 느낌이다. 신오쿠보의 헤이트 스피치 당시 너무 무서워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사람들이 ‘조선인 죽이자, 일본을 나가라’ 등의 주장에 주위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웃는 모습을 보고 ‘(비판을 받는) 나는 인간이 아니다’고 생각돼 무섭고 무서웠다.”

그는 언론 인터뷰 등에서 “재특회의 거리 선전활동에서 내 이름을 모욕하는 동영상을 보며 토하기도 했고,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울기도 많이 울었다. 혼자 걷는 것이 두렵고 귀가할 때 위험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자이니치(在日:일본 거주 외국인)들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떠올린다.


“나도 신오쿠보에서 벌어진 헤이트 스피치 시위를 보며 간토대지진을 떠올렸다. 당시 조선인이 죽었을 때 많은 일본인들이 웃었다고 한다. 유언비어가 퍼지고 언론도 흥분하면서 조선인을 이용한 일종의 ‘가스빼기’(가스누키, 사회유지를 위해 불평과 불만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 차원에서 많은 조선인을 살해한 것이다. 지금 일본도 폐쇄감이 커져 차별을 이용해 가스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전쟁이나 긴장이 고조될 때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우리 자이니치이다.”

―도대체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보통 스타는 자신의 소질에 더해 많은 노력이 있어야 되지만, 인터넷에선 누구라도 간단히 영웅이 될 수 있다. 조금 주목받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된다. 더구나 일본, 한국이라는 큰 국가를 말하면 노력하지 않고도 영웅이 되기도 한다. 헤이트 스피치를 하는 배외주의자들은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이들로,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재특회는 자이니치가 특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대표적으로 자이니치의 특별영주권 문제가 지적되는데, 이는 새로 오는 외국인들에 비해 특권일지는 모르지만, 특별한 역사적인 경위가 있지 않으냐. 그것은 식민지배를 받아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중에 일본 국적을 빼앗긴 것에 대한 일종의 구제책이다. 본래 있었던 것을 빼앗아 일부 회복된 것인데, 이것을 특권이라고 하면 곤란하다.”

―특히 방관자가 사태를 심화시키는 것 아닌가.

“헤이트 스피치나 차별에 침묵하고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차별하는 사람의 편이 된다. 일본은 자기 주장을 확실히 말하는 것이 좋지 않거나 어른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침묵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잘못 교육받은 것이 방관자를 낳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헤이트 스피치를 낳는 사회·역사적인 배경이나 구조도 있어 보이는데.

“일본 사회는 폐쇄적이어서 누군가를 적으로 하지 않으면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자이니치나 성소수자, 홈리스 등 타깃은 누구라도 좋다. 최근 아시히신문에 대한 비판도 그런 측면이 있어 보인다. 특히 한국인은 옛날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존재였는데 한류 등으로 크게 부각되면서 상대를 어떻게 맞을 것인가를 모르는 상황에서 고조된 측면도 있다. 아울러 정권이 우경화된 측면도 있다.”

―재특회는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지만, 최근 법적 규제 움직임도 일고 있다.

“헤이트 스피치는 표현의 자유나 인권 침해 문제를 논하기 전에 폭력이다.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실례이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체로 메이저리티이다. 헤이트 스피치가 길 위로 나오면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지 않느냐. 법적 조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한국에선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데.


“일본은 헤이치 스피치에 대해 항의 데모를 하며 어느 정도 방향이 잡히고 있지만 한국은 일베에 대해 아직 파악조차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옛날 한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한 건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와 권력에 과감히 맞서는 모습 때문이었다. 나도 처음 조선학교 주변에 헤이트 스피치가 발생했을 때 방관자로 있었지만 지금 매우 후회한다. 한국의 양식있는 사람도 일베에 카운터(항의)하고 고쳐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일본공립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예술대학을 나왔다. 일본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대학 때엔 고전이 재미있어 일본어 선생이 될까 생각하기도 했다. 대학시절 이곳저곳에 글을 썼고 졸업 후 작가로 살게 됐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던 14살 때 일본 이름(우가와 노부에)을 한국 이름 리신혜로 바꾼 게 인생의 첫 전기였다.”

―앞으로 소송은 길고 어려움도 많을 텐데.

“주위에서는 모두 ‘대단하다, 훌륭하다’고 하지만 왜 소송을 제기했는지 잘 알지 못했다. 작년에 승소한 조선학교 재판의 경우 학생 개인이 소송을 제기하지 못했다. 개인이 특정되지 않아서다. 그런데 재특회에 의해 이름이 특정돼 비판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운명인지 알 수 없지만,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있지 않겠는가. 아이들을 형편없는 사회에 남겨둘 수 없고, 아이들 미래의 선택지를 넓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 소송을 하게 된 것이다.”

오사카=글·사진 김용출 특파원
■ 리신혜씨는


▲1971년 8월18일 오사카에서 아버지 정동천(작고)과 어머니 이복금 사이에서 출생 ▲중학생 3학년 때 일본 이름에서 한국 이름으로 바꿈 ▲오사카예술대학 졸업(1993) ▲‘스튜디오 M’에서 3년간 근무한 후 ‘가제트통신’과 ‘제이피뉴스’, ‘아시아 프레스’ 등에서 프리랜스 작가로 활동 ▲2014년 8월18일 재특회 회장 등을 상대로 개인으론 처음으로 손해배상 소송 제기 ▲일본인 남편 사이에 1남(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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