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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운아 흥선대원군의 사저… 구한말 파란만장한 역사 간직

입력 : 2014-06-19 22:17:43 수정 : 2014-06-19 22: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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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96〉운현궁
# 준비된 정치인, 흥선대원군 이하응


요즈음 역사적 사건이나 상황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소설이 아주 인기를 끌고 있다. 허준이나 이순신 등은 거의 주기적으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부활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 역사에 관심이 많이 생긴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면 매체 속성상 극적인 요소를 넣으려다 지나치게 과장하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우려스럽다.

운현궁의 노락당과 이로당 사잇공간 스케치. 깊은 그늘이 무척 아름답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신 장군만큼 자주 등장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그는 고종의 아버지이며 조선 말기의 절대권력자다. 대원군에 관해 알려진 여러 정보 역시 소설을 기반으로 생성되고 확장되어 고정된 부분이 많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하응의 모습은 대부분 김동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비롯한다. 거기서 힘없고 가난한 몰락한 종친 이하응은 ‘상갓집 개’처럼 옹색하고 비루하게 살며 시정잡배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그러면서도 가슴속에는 거대한 꿈을 품고 소년 장수 다윗처럼 단기필마로 당시 큰 권력을 휘두르던 거대한 안동김씨 집안과 대결을 펼치는데, 그 이야기가 아주 흥미진진하고 극적이다. 그러나 이하응은 그렇게 궁핍하지도 않았고, 안동김씨와는 적당히 협력하며 견제하는 사이였다.

운현궁(雲峴宮)은 이하응이 살았던 곳이고, 조선의 왕이었으며 이하응의 둘째아들이었던 고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장소다. 이곳은 단순한 집이 아니라, 19세기 조선 정치의 중심으로 조선의 흥망을 상징하는 큰 의미가 있는 곳이다. 대원군과 명운을 같이한 운현궁은 쇠락한 채 20세기를 보내다가 1996년 복원되었다.

나는 운현궁이라는 이름을 예전 신군부에 의해 강제로 폐쇄된 민영방송 TBC(동양방송)의 ‘운현궁 스튜디오’라는 이름을 통해 알고 있었다. 물론 그 방송국 역시 넓게 보면 운현궁의 한구석에 위치하긴 했지만, 운현궁의 핵심은 그 방송국 뒤편에 있었다. 그런데 안국동에서 낙원상가로 이어지는 길 변에 늘어선 실험극장 등 다양한 건물들에 가려져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고, 이하응 후손의 소유로 되어 있어서 더더욱 볼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서울시에서 ‘서울 정도 600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운현궁 복원에 착수해 그 집을 대원군 후손으로부터 매입해 실측하고 고증하는 복원사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운현궁이 아주 좋은 골격과 좋은 피부와 좋은 표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도 지나가는 길에 자주 그곳에 들르곤 한다.

원래의 영역에서 많이 축소되었지만 그래도 중심이 되는 세 개의 영역은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영역들이 모두 늙을 노(老)자 돌림이다. 노안당(老安堂), 노락당(老樂堂), 이로당(二老堂). 무슨 별다른 의미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늙어서 편히 지내는 집, 늙어서 즐기는 집, 두 늙은이의 집, 뭐 그런 단순한 작명 센스로 만든 것일까.

대원군은 사실 종친 중에서도 내실 있는 실무를 맡은 야심가였다. 안동김씨 일가를 견제하고 싶었던 신정왕후 조 대비를 설득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세운 능력자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지만, 고작 10년 남짓 집권하고 이후에는 자신이 세운 왕을 몰아내는 일에 몰두하였다. 알고 보면 그는 파락호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왕족에 걸맞은 대우를 받았고, 사실 적당히 안동김씨 집안과도 협력 관계를 유지했던 영리한 정치가였다.

# 몰락한 왕조의 두 주인공, 대원군과 명성황후

대원군과 운현궁의 위상을 높인 계기는 공교롭게도 대원군 최대의 정적이 된 며느리 명성황후의 혼례였다. 삼간택에 뽑힌 예비 왕비를 위한 교육과 예식이 운현궁 노락당에서 열린 것이다. 원래 왕실 가례를 위한 별궁은 어의궁(於義宮·효종의 잠저)을 사용했는데, 고종의 경우 당시 조 대비가 이례적으로 “별궁은 운현궁으로 하라”고 명을 내린다. 보통 왕가의 혼례, 즉 왕이나 왕자·공주의 배우자는 ‘간택’의 절차를 거친다. 1866년 1월 조선에 있는 12∼17세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이 내려진다. 고종의 왕비 간택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이뤄졌다. 여흥민씨 일가로 숙종비 인현왕후의 5대 자손이 되는 민자영은 아홉 살 때 아버지인 민치록이 사망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약 두 달 후 초간택이 실시되었고, 자영은 다른 네 명의 후보와 함께 합격해 재간택에 들어간다. 삼간택은 두 달 후였는데, 이례적으로 민자영 혼자 삼간택에 오르고 나머지 후보자는 곧바로 혼례가 허용됐다. 즉, 사실상 내정이 되어 있었다는 이야기다.

대원군은 원래 고종 즉위 전에는 안동김씨 일파와 사돈을 맺기로 해놓고 약속을 어겼다. 당시 외척의 세가 거의 없던 명성황후가 훨씬 다루기 쉬울 것이라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명성황후에게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아버지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온 민승호 등 인척이 있었고, 나중에 안동김씨 일가와 더불어 대원군을 견제하게 된다.

아무튼 간택이 된 명성황후는 운현궁에서 보름 정도 머물렀다. 그 후 고종이 명성황후를 데리고 운현궁에서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친영(親迎)을 거행하지만, 정작 혼례 당일에는 명성황후 대신 총애하던 후궁 귀인 이씨에게 갔다고 한다. 2년 후 이씨가 왕자인 완화군을 낳자 대원군도 손자를 총애하며 곧바로 세손으로 삼으려 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명성황후는 상당히 마음을 다친 듯하다. 3년 후에는 명성황후도 왕자를 낳았으나 5일 만에 죽는다. 이때 대원군이 갓난아이에게 산삼을 많이 넣은 보약을 지어준 점을 명성황후가 의심하면서 감정의 골은 점점 깊어진다.

1873년 서원 철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유림의 거두 최익현이 대원군 섭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한다. 이때 명성황후가 민승호와 대원군이 실각시킨 풍양조씨의 조영하, 안동김씨의 김병기, 고종의 형인 흥인군 이재면, 최익현 등과 제휴해 그해 11월 운현궁에서 궁궐로 출입하는 대원군의 전용 문을 막아버렸다. 성인이 된 고종을 두고 섭정의 명분이 없었던 대원군은 결국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러나 은퇴 후에도 대원군은 끊임없이 복귀를 꿈꾸었고 명성황후와 수시로 갈등을 겪었다. 특히 고종의 형이자 자신의 장남인 이재면의 아들 이준용을 총애하여, 심지어 고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올리려 했다.

1874년 명성황후는 나중에 순종이 되는 아들 이척을 낳으며 순조롭게 새로운 정책을 펴나가는 듯했는데, 같은 해 우편물로 보내진 폭탄이 터지며 민승호 일가 3명이 폭사하는 사고가 일어나 무척 상심했다고 한다. 이 일의 배후로 대원군이 지목되고, 1892년 운현궁에서도 원인 모를 폭탄 사고가 발생하는 등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살벌한 정치적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그 사이에서 고종은 어려서는 아버지, 성인이 된 후에는 아내에게 실권을 뺏긴 무력한 왕이 되어버린다.

대원군이라는 명칭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왕의 아버지가 된 사람을 이르는 일반명사다. 왕의 후손이자 흥선군이었던 그는, 역사상 최초로 살아있을 때 대원군이 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운현궁은 안동별궁에 살았던 흥선군이 분가하며 구름재 근처에 집을 짓고 살았던 곳이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864년 열두 살이었던 대원군의 둘째아들이 후사가 없었던 철종의 뒤를 이어 왕이 된다. 그리고 왕실의 지극한 배려로 집을 고치고 늘려 현재 운현궁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운현궁은 사실, 집은 집인데 집이 아니다. 언뜻 보면 일반인이 사는 집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왕이 사는 궁의 형식이 알알이 박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방이 방을 둘러싸고, 그 밖으로 마루가 둘러쳐져 있는 구조다. 경호와 안전, 그리고 보이지 않는 서비스 동선이 집에 숨겨져 있는 구성이다. 이런 방식은 궁궐의 내전이나 침전에서 주로 볼 수 있는데, 운현궁의 건물들은 모두 그런 여러 겹의 공간 구성을 갖추고 있다. 또 하나는 세 채로 이뤄진 본채를 건물 뒤편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동쪽으로 얇고 길게 끊어지지 않고 연결된 긴 복도가 하나로 묶고 있다는 사실이다.

원래 운현궁은 지금의 영역보다 훨씬 넓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패망하고 주인인 이하응이 공덕동 아소당에 거의 연금 상태로 갇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운현궁은 많이 훼손되고 축소되었다. 남북으로 길게 연속된 네 채의 한옥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영로당은 이하응의 후손을 극진히 돌봐주었던 의사가 사들여 개인 소유가 되면서 복원 계획에 포함되지 못했다.

대원군이 사랑채로 사용한 노안당과, 원래는 안채였으나 명성황후가 신부 수업을 받았던 관계로 공적인 공간으로 변한 노락당, 안채로 추가로 지어진 이로당이 운현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노락당을 지나 이로당으로 가다 보면 낮은 담이 둘려 있는 곳이 나오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노락당의 뒷면과 길고 얇은 노락당 북행각 건물로 둘러싸인 작은 마당이 나온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작은 공간에 삐쭉 솟은 전돌로 쌓아 올린 굴뚝이 우뚝 솟아 있다. 낮은 담과 다양한 표정의 문과 창문들, 그리고 운현궁 전체를 꿰고 있는 월랑(복도)이 만드는 공간감은 크고 웅장한 건물들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공간감을 비집고 들어와 사람의 숨통을 잠깐 열어주는 구실을 한다. 마치 웅장한 도입부와 후반 전개부 사이에 잠시 경쾌한 소절을 끼워 넣은 교향곡 같다. 노락당과 이로당 사이에 있는 이 공간을 나는 특히 좋아한다.

노안당은 대원군의 사랑채로 정무를 보던 곳이다.
좋은 건축에는 좋은 그늘이 있다. 나는 좋은 그늘을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 최고의 건축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우리의 옛집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늘이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 집들이 드리우는 그늘은 단색조의 단조로운 그늘이 아니라 무척 여러 층을 거느리고 있다. 햇빛을 반사하는 마사토가 곱게 깔린 마당에 지붕과 처마의 선으로 우아하게 드리워져 있는 안락함, 혹은 그늘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 그리고 그 다양한 층위…. 운현궁 역시 그런 독특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운현궁은 잠룡처럼 웅크리고 있던 대원군이 야망을 펼치며 난세에 직면한 나라를 경영했던 곳이자, 어리지만 총명했던 한 여인이 권력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 터전이 된 곳이다. 지금은 그저 파란만장했던 옛이야기와 역사가 드리우고 있는 울창한 그늘을 품고 서울 한복판에 한적하게 잠겨 있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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