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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이 방문할 천주교 내포 성지 탐방…<1>여사울 성지와 합덕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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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에서 성지의 유래를 설명하는 윤인규 여사울 성지 성당 신부.
‘내포의 사도’ 이존창 생가터 여사울 성지…꽃동산으로 조성돼

고통받고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 넉달 후(8월14~18일)면 그가 한국에 온다. 서울에서 천주교 순교자 124위의 시복식(16일)을 집전하고, 대전충남지역에서 열리는 제6회 아시아청년대회(8월 13~17일)에서 청년들과 만나기 위해서다. 대회 기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게 될 충남 서북권의 평야지대 천주교 내포(內浦) 성지를 미리 찾아가 보았다. 이곳에는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생가터 여사울 성지, 내포의 첫 성당 합덕 성당, 한국인 최초 사제 김대건 신부의 생가 솔뫼 성지, 조선에서 가장 컸던 교우촌 신리 성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순교자를 많이 배출한 홍주 성지, 무명 순교자의 생매장지 해미 성지가 있다.

내포는 서해가 내륙 쪽으로 쑥 들어와 있다고 해서 불러진 이름으로, 예부터 당진, 서산, 예산, 보령, 홍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내포는 ‘한국 천주교의 수도’와 같은 곳이자 가장 극심하고 잔인한 박해가 일어났던 곳으로, 연중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소재 여사울 성지는 내포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 복음을 전한 이존창(1752~1801)의 생가터가 있다. 여사울이라는 이름은 ‘서울과 같은 곳’ ‘여슬(물이 빨리 흐르는 개울)’ ‘여수골(예수 고을)’ 등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옆으로 서해안 도로가 지나가는 너른 꽃동산에는 이존창 생가지이자 내포천주교 복음 첫 터임을 알리는 커다란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 맞은 편에 고딕풍의 아담한 기념 성당이 지어져 있다. 기록상 여사울에 천주교를 처음 전한 사람은 홍유한(1727~1785)이었으나, 전도 활동보다는 수계생활 정진 등 스스로 천주교적 삶을 실천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사울 성지 성당.
이존창은 서울에서 한국천주교 창설멤버였던 권일신 신부에게 교리를 배웠으며, 1786년 세례를 받고 평신도 사제직이라고 할 수 있는 가성직(假聖職) 신부로 임명됐다. 이후 고향에 내려와 김대건(1821~1846)의 종조부 김종현, 조부 김택현을 비롯해 여사울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최양업(1821~1861) 신부 집안과도 혈맥관계여서 두 집안 뿐 아니라 풍산홍씨 집성촌인 여사울 지역에 활발히 복음을 전했다. 1850년대 당시 한국 신자들은 대부분 이존창이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었다고 전해질 정도로 그의 전교상의 공헌은 지대하다. 여사울에서는 성인 2위, 복자 9위, 순교자 12위가 나왔는데, 성인 반열에 오른 홍병주 홍영주 형제 등이 이존창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존창은 1791년 신해박해 때 모진 고문과 매질에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전교에 힘쓰다 1795년 다시 체포돼 옥살이 하던 중 1801년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여사울 성당 윤인규 주임신부(56)는 “여사울은 천주교 초기 신앙공동체로 1866년 병인박해 때까지 신앙의 맥이 이어진 유서깊은 성지”라고 소개하고, “교황님이 대전 월드컵경기장에 가실 때 이곳을 스쳐 가게 되는데, 길가에 커다란 환영 플래카드라도 내걸 계획”이라고 말했다.

 

합덕 성당.
내포의 첫 성당 합덕 성당…유럽 성당 부럽지 않은 아름다움 간직

윤치충, 권상연이 순교하는 신해박해(1791)를 시작으로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등 숱한 박해를 통해 한바탕 피바람이 분 뒤, 1886년 한‧불 조약이후 조선에도 신앙의 자유가 보장됐다. 이후 내포 지방의 천주교가 다시 활기를 띤다. 교세가 급속히 확장되자 임시 조선교구장 코스트 신부는 1890년 양촌 성당에 퀴를리 신부를 파견해 서산, 예산, 당진, 부여 등 12개 지역, 27개 공소를 관할토록 했다.

당진시 합덕면 합덕읍 소재 합덕 성당은 그 전신이 바로 양촌 성당이다. 1899년 양촌에서 합덕으로 성당을 이전한 것이다. 이전당시만 해도 성당이 한옥이었는데, 제7대 프랑스인 페렝(한국명 백문필) 신부가 중국의 기술자를 데려와 1929년 현재의 모습으로 축성했다. 돌과 목재를 사용한 연와조 구조에 쌍 종탑으로 돼 있는 보기 드문 서양식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합덕 성당은 평야지대 중간의 돌출된 땅에 지어져 있어 사방이 탁 틔여 조망권이 우수하다. 성당 옆 잔디가 깔긴 너른 광장에는 수 십개의 원목 야외의자가 조성돼 있어 유럽 어느 성당에 와 있는 느낌이다. 성당 안에는 축성일에 페렝(한국명 백문필) 신부의 사촌이 그려 기증했다는 대형 성가정(예수, 요셉, 마리아)화가 걸려 있어 세월의 무게를 더한다. 성당 한 켠에는 6.25 때 피난가지 않고 성당을 지키다 인민군에게 처형당한 ‘착한 신부’ 페렝의 흉상이 서 있어 순례자를 포근하게 감싸 안는다.

김성태 주임신부(40)에 따르면 옛날에 미사 때 흰옷을 입은 신자들이 산지사방에서 몰려와 성당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성당 관할 지역에는 순교자가 없는 마을이 없고, 지금도 주민의 95%가 천주교 신자라고 한다. 또한 성당 종탑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3종을 치면 주변 들녘에서 잠시 농사일을 멈추고 일어서서 성당을 향해 기도했다고 한다.

“밀레의 유명한 ‘만종’ 그림이 바로 여기 얘기유. 옛날부터 논밭에서 일하다가도 성당의 종이 울리면 삽과 호미를 던져두고 그 자리에 서서 삼종기도를 올렸대유.”

김성태 합덕 성당 주임신부.
김 신부가 할아버지 할머니 신자들에게 전해 들었다며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옛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밖에도 합덕 성당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많다. 가톨릭에서는 매년 예수의 제자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 6월 29일을 큰 축제(베드로‧바울로 축일)로 정해 기도하는데, 기도 때만 되면 기다리던 비가 내리자, 비신자들까지도 이 축일을 가리켜 “배토리‧바토리가 언제냐?”고 물었을 정도였다. 우리나라에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곪은데 치료에는 ‘이명래 고약’이 최고였다. 바로 합덕과 아산 공세리 성당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제해 보급했던 약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한국사회의 가정상비약으로 상품화된 것이다. 이 지역은 또 박해시대 때부터 부모 잃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 익숙해 1969년까지 합덕 성당에서는 고아원을 운영했다.

김 신부는 “합덕 성당이야말로 근대적 형태의 고아원 효시”라고 말했다.

합덕 성당에서 하룻밤을 유한 뒤, 이튼날은 걸어서 3.5km 가량 떨어진 솔뫼 성지로 향했다. 농로에는 여기저기 철쭉이 만개해 있었으며, 풋풋한 흙내음이 올라왔다. 내포는 이러한 농로가 이어져 있어 일찍이 천주교 순례길이 발달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tol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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