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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귀국길 열어주오” 이역에 묻힌 눈물의 호소

입력 : 2014-04-14 06:00:00 수정 : 2014-04-14 20: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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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친구 밴플리트 장군에 보낸 편지 12통 입수 ‘언젠가 내 행동이 진실하고 정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겁니다.’

‘한사코 고국으로 돌아가려고만 합니다. 항상 그 생각뿐입니다.’

2, 3주 머물다가 귀국하리라던 하와이 망명생활은 기약이 없었다. 그는 몸의 심장병 등과 마음의 향수병에 시달리다가 5년여 만에 요양원에서 숨을 거뒀다. 부정부패와 독재에 국민이 등을 돌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쓸쓸한 황혼이었다.

세계일보가 1960년 4·19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의 심경을 보여주는 편지 12통을 12일(현지시간) 미국 버지니아군사학교 마셜도서관에서 찾아냈다. 6·25전쟁 당시 세번째 미 8군사령관을 지낸 ‘6·25전쟁 영웅’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4·19혁명과 하와이 망명

1960년 4월1일과 5월11일 편지에서 이 대통령 내외 주소가 ‘경무대’에서 ‘이화장’으로 바뀌었다. 당시의 격변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5월11일 편지에서는 4·19혁명으로 하야(4월26일)한 이 대통령이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긴급사태 속에서 저를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장군의 호의가 담긴 편지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언젠가 내 행동이 진실하고 정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며칠 참담함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시민으로서 어렵게 얻어낸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는 일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11일 ‘6·25전쟁 영웅’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에게 보낸 편지.
미국 버지니아군사학교 마셜도서관 제공,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이 대통령 부부는 이 편지를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5월29일 교민 최백렬씨 주선으로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이 대통령은 2, 3주 잠시 다녀온다는 생각에 애견 ‘해피’를 맡기고 이웃들에게 “늦어도 한달이면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줘요”라며 이화장을 나섰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밴플리트 장군의 부인 헬렌 여사에게 보낸 5월25일자 편지에서 “우리 부부는 차츰 집에 적응해 가고 있습니다. 다행히 여름이라 남편이 야외에서 소일하실 수가 있습니다”라고 소식을 전했다.

하와이에 도착할 때 이 대통령 부부의 짐은 4개뿐이었다. 옷가방 2개에 이번 편지들을 쓰는 데 썼을 타자기, 마실 것, 약품 상자 등이 전부였다. 잠시 머물 생각에 집조차 구하지 못해 지인 집에 얹혀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전직 대통령 연금법이 없던 시절이라 교민들이 모아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밴플리트 장군은 이 대통령 부부에게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북쪽 호브사운드의 별장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다.

이 대통령은 8월1일 편지에서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편지에서는 심장병을 앓던 이 대통령의 병세도 드러난다.

‘6월24일 보내주신 따뜻한 편지에 답변이 늦어 죄송합니다. 패니(프란체스카 여사의 애칭)와 저는 장군께서 호브사운드 집에 머물도록 마음 써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하와이를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제 건강이 매일 호전되고 있지만 의사는 가능한 한 최대한 안정을 취하라고 한답니다. 혈압을 낮추는 약이 있으나 회복에 좀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약이 제법 효과적이기는 한데 저는 약에 알레르기가 있습니다. …’

◆귀국에 대한 희망과 좌절

이후 거의 모든 소식은 프란체스카 여사가 전했다. 거의 1년 만인 1961년 7월25일 프란체스카 여사는 줄곧 염원했던 귀국이 이뤄지지 않은 것에 대한 절망적인 마음을 편지에 담았다. 밴플리트 장군이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길에 하와이에 들러 이 대통령 내외를 위로하고 돌아간 직후였다.

‘우리 부부는 장군을 뵈니 너무 반가웠습니다. 가슴에 쌓아온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사님(Dr. Rhee)은 지난 몇 주, 특히 지난주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군가한테 절망적인 국내 상황을 전해들었다고 장군께 말씀드렸듯 박사님은 그 일로 며칠간 근심하면서 흥분했습니다. 안타깝게 저도 요새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최상이 아닙니다. …’

밴플리트 장군은 이 편지에 붉은색 펜으로 이 대통령 내외의 주소인 ‘하와이 호놀룰루 마키키가 2033’을 적어 놓았다.

이 대통령은 1961년 12월13일 이인수씨를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이에 관한 내용도 프란체스카 여사가 쓴 11월16일 편지에 언급돼 있다.

‘… 몇 주 전에 이 박사님이 아들 인수에 관해 장군께 편지를 썼을 겁니다. 조상 묘를 돌보도록 아들을 곁에 두는 게 한국 가정의 전통입니다. 이 박사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도록 인수가 잠시 여기를 방문할 수 있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박사님을 설득해 귀국을 포기하게 된다면 인수가 여기에서 학업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박사님은 걷는 것이 불편해 항상 누군가 곁을 지켜줘야 합니다. …’

이 대통령은 끝까지 귀국을 열망했다. 그는 1961년 11월22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 일정을 따라 하와이에 온 한국 기자 3명에게 “제발 한국에 데려가 주시오. 호랑이도 제집에서 죽고 싶어한다”고 눈물로써 호소했다. 박 의장은 문병하지 않고 꽃다발만 보내는 것으로 전직 대통령을 예우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2년 2월5일 편지에서 “장군께서 정부 입장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환자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호소합니다. 상황이 매우 긴급합니다.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절망적인 상황(desperate situation)입니다”라고 말했다. 밴플리트 장군은 ‘절망적인 상황’에 밑줄을 그어 놓았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후에도 2월15일과 3월1일 잇달아 편지를 써 도움을 부탁했다. 여사와 측근들은 1962년 3월16일 귀국을 위한 이 대통령의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3월17일 날짜로 비행기표까지 끊어놓았다. 그러나 3월17일 박정희 의장은 입국을 거부했다. 귀국 좌절 이후 이 대통령 병세는 급속히 나빠졌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1월18일 이승만 대통령(오른쪽 세 번째)과 프란체스카 영부인(맨 왼쪽)이 당시 미 8군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오른쪽 네 번째)과 부인 헬렌(〃 두 번째)을 한국 숙소로 제공한 자신들의 사가 이화장으로 안내하고 있다.
미국 버지니아군사학교 마셜도서관 제공
◆이국 땅에서 맞이한 최후


1962년 6월19일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서 쓴 편지에서는 체념한 채 간병에 힘을 쏟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2주 전 병원으로 옮겼습니다. 관절염이 도져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라앉히느라 한참 걸렸습니다. … 이 박사님은 여전히 어떤 것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고 그대로입니다. …’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4년 3월30일에야 다시 펜을 들어 “전보로 제 남편 생일(3월26일)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박사님이 매우 기뻐하실 것임을 알기에 장군의 친절한 소식을 그분께 전해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입니다. 남편은 생일날 평소와 다름없이 지냈습니다. 대체로 식욕이나 안정은 괜찮습니다. 낮에 함께 지내면서 ‘위대한 분’(great man)에게 작은 도움이나마 줄 수 있어 행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1964년 3월30일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부부에게 보낸 편지. 미국 하와이 마우나라니 요양병원에 입원한 채 생일(3월26일)을 보낸 이 전 대통령 근황과 밴플리트 장군이 보낸 생일 축하 전보에 대한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여사는 그해 8월16일 편지에서 “이 박사님은 주변 상황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신다는 걸 말씀드려야하겠군요. … 내내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유아식을 꽤 잘 넘기시고 대부분 주무십니다. 낮에 함께 지낼 수 있는 혜택을 받았습니다. 식사를 떠 드리고 미력하나마 할 수 있는 걸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소식을 전했다.

의식을 잃은 지 1년이 넘은 1965년 7월19일 이승만 대통령은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큰 숨을 한번 몰아쉰 뒤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 대통령의 시신은 7월23일 미 의장대 특별기편으로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도착했다. 평생 우정을 나눈 밴플리트 장군을 비롯해 미군 장병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워싱턴=박희준 특파원 july1st@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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