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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8〉소나무

입력 : 2014-01-23 22:56:13 수정 : 2014-01-23 22:5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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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절개의 상징… 강하고 아름다워 ‘고귀한 집’ 재목으로 쓰여 # 나무를 심는 이유

영국 옥스퍼드 대학 뉴칼리지 내에 있는 다이닝 홀에 관한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14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의 천장은 가로세로 2피트, 길이 45피트(0.6m×0.6m×13.7m)의 큰 참나무(oak) 대들보가 받치고 있다. 몇 년 전 어떤 곤충학자가 그 기둥이 딱정벌레에 의해 크게 손상된 것을 발견하고 대학 측에 알린다. 대학 운영진은 갑자기 그런 거대한 크기의 부재를 어떻게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고민에 빠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학 산림관리인을 불러 상의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관리인은 나무가 대학 내에 있다고 대답한다. 건물이 지어질 당시, 오크 부재가 딱정벌레에 취약하므로 나중에 부재를 쉽게 교체할 수 있도록 그 옆에 나무를 함께 심은 것이다. 몇 백년 동안 그 계획은 산림 관리인들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오크 나무를 자르면 안 된다. 그 나무는 다이닝홀에 쓰일 것이다.(You don’t cut them oaks. Them’s for the College Hall.)”

문화인류학자이면서 언어학자인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은 “이런 것이 바로 문화를 실행하는 방식”이라고 말한다. 어떤 일을 할 때, 저런 정도의 멀리 내다보는 눈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과연 나는 그렇게 일을 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나무는 아주 오랫동안, 끊임없이 성장해가는 생명체다. 그래서 어떤 땅에 새로운 집을 짓는다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종종 우리는 나무를 심는다. 그런 행동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일을 착수한다는 결의를 나타낸다.

어릴 때 학교에서 긴 헝겊에 글씨를 쓴 다음, 옷핀으로 상의 왼쪽 가슴께에 달게 했던 표어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불조심’과 더불어 ‘나무를 심읍시다’였다. 또 ‘메아리’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아직도 귀에 선하다.

“산에 산에 산에는 산에 사는 메아리 / 언제나 찾아가서 외쳐 부르면 / 반가이 대답하는 산에 사는 메아리 / 벌거벗은 붉은 산에 살 수 없어 갔다오./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자 / 산에 산에 산에다 옷을 입히자 / 메아리가 살게 시리 나무를 심자.”

우리나라가 못살던 시절, 땔감과 여러 가지 자재로 쓰기 위해 남벌해서 속살을 벌겋게 내놓은 벌거숭이산…. 그 이미지가 내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척 오랜 시간 나무를 심었고, 이제는 발 디딜 틈 없이 나무들이 빼곡한 산을 갖게 되었다.

모든 나무는 아름답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은 나무라고 생각한다. 질서가 없는 듯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뻗어나가는 가지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우아한 무용수의 동작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진정한 생명력을 표현하는 추상적이며 매우 구체적인 선 같기도 하다. 또한 나무는 무척 약한 재료이며, 동시에 무척 강한 재료이다. 사람들이 간혹 나무가 튼튼한지 물으면 우리는 나무가 “콘크리트보다 튼튼하고 철보다도 튼튼합니다”고 답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부석사 무량수전도 1000년 가까이 저렇게 잘 서 있지 않나요, 뿐만 아니라 1000년 가까이 된 은행나무가 아직도 무성하게 잎을 달고 있고 탐스럽게 열매를 맺고 있지 않나요”라고.

오크 부재로 대들보를 이은 옥스퍼드 뉴칼리지 다이닝 홀. 딱정벌레로 인해 손상된 커다란 대들보를 대체할 부재는 지어질 당시에 함께 식재되었다 한다.
# 금강송 혹은 황장목, 소나무의 이름에 대한 오해들

그래서 나는 사무실의 로고를 디자인하면서, 경복궁 남서쪽 모퉁이에 있는 느티나무의 뼈대를 썼다. 나는 나무 중에서도 느티나무를 유난히 좋아하는데 그 강인한 생명력과 그 넉넉한 품과 사계절을 다 담고 있는 표정의 다양성이 좋아서이다. 특히 목질이 튼튼하고 결이 곱고 벌레가 잘 꾀지 않아 조선시대 이전에는 주요 건물의 재료로 많이 썼다. 우리가 잘 아는 최고(最古)의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무위사 극락전 등도 느티나무로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통 느티나무는 마을 어귀를 지키는 정자목 정도로 여겨지고, 정작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무는 따로 있다.

예전에 산림청에서 한국갤럽을 통해 나무에 대한 국민의 선호도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때의 결과는 40% 이상의 압도적인 지지로 소나무가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8%의 지지를 받은 은행나무였다고 한다. 사실 무척 오랜 기간 우리 곁에서 혹은 마을의 입구에서 우리를 지켜준 느티나무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소나무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 애국가에서는 시련을 견뎌내는 기상의 상징이고, 예전 선비들은 충절과 절개의 상징으로 삼았고, 또한 조선 이후에는 아주 고귀한 집을 지을 때의 재목으로 쓰였다.

소나무에 대한 환상만큼 소나무 용어도 금강송, 적송, 춘양목, 황장목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제대로 통일되어 있지 못한 만큼 그 진위에 대해 아무도 정확하게 이야기해주는 이가 없다.

금강송과 적송과 춘양목과 황장목은 대강 같은 말이다. 모두 태백산 줄기를 따라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에 걸쳐서 길고 곧게 자라는 소나무, 또한 속이 붉고 나이테가 좁고 변재가 얇으며 심재와 변재의 색이 뚜렷하게 자라서, 집을 지을 재목으로 쓰기 좋은 강인한 소나무를 의미한다.

그 나무는 추위에 강하고 성장속도가 느려 나이테가 촘촘해져서 재질이 단단하고, 송진 함유량이 많아 잘 썩지 않는다. 보통 높이가 35m 정도로 자란다.

‘궁궐의 우리나무’라는 책의 저자 박상진 교수는 “적송은 소나무의 일본이름으로, 그들은 적송이라 쓰고 ‘아카마쓰’라고 읽는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말을 없애고 강제 동화정책을 쓰면서 나무이름을 일본식으로 부르도록 강요했다”고 밝혔다.

춘양목은 일제 때 영암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춘양역을 통해 태백산 일대의 소나무가 전국으로 반출되면서 목재상들 사이에서 춘양에서 온 질 좋은 나무라는 뜻으로 불리게 된 말이다. 금강송 또한 1928년 일본인 산림학자 우에기 호미키가 우리나라 지형 중 강원도 지역과 동해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금강형’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아마도 그 가장 단단한 나무를 뜻하는 어감이 좋아 널리 쓰이게 된 듯한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금강송이라는 이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황장목(黃腸木)은 연륜이 오래 된 소나무로 목질이 양호하여 국가에서 쓰는 관곽(棺槨)을 만드는 데 적합한 목재를 뜻한다. 임금의 관인 재궁(梓宮)을 만들기 위해 특별히 관리했던 나무로, 이후 영선에 적합한 재목으로 선호되면서, 조선왕조실록에도 황장목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했다는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삼척, 강릉, 양양, 고성, 인제 등 관동과 영남 지역의 소나무 군락지 중 보존가치가 높은 산을 골라 봉산(封山)으로 지정하고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는 ‘황장금표’를 세웠다. 조정에서 사용할 목재를 조달하는 곳임을 알려 일반인의 벌채를 금지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잘못된 습관처럼 입에 익은, 일제의 잔재가 담긴 적송이나 금강송, 춘양목이란 이름 대신, 제 본래 이름인 황장목이란 이름으로 불러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의 부모 능묘인 삼척의 준경묘. 주변에 울창한 황장목 숲이 있다.
# 소나무는 죄가 없다


소나무는 강하고 아름답다. 숭례문에 화재가 났을 때, 모든 부분이 다 탄 것이 아니라 대들보라든지 하는 주요 뼈대가 되는 목재들은 겉만 조금 탔을 뿐 멀쩡했다고 한다. 그 부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독특한 나무의 수송방식 덕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다. 예전의 나무를 수송하는 방식은 주로 물을 이용했다 한다. 이를테면 백두산에서 자른 나무를 압록강을 통해 운반을 하는데, 그때 물에 띄워진 나무는 몸체를 보호하기 위해 송진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결국 나무는 수송과정을 거치며 자연적으로 코팅이 되고 그 코팅이 몇 백년 동안 남아서 화재로부터 목재를 보호했다는 것이다.

숭례문의 복원을 가지고 부실이다 아니다 큰 논란이 되면서 관련된 사람들이 고충을 겪고 있다 한다. 논란의 쟁점 중 하나가 사용된 목재가 금강송이냐 아니면 러시아산이냐 하는 것이다.

특히 준경묘 근처에서 가져온 것이 맞느냐를 가지고 유전자 검사를 한다는데, 준경묘 근처의 나무를 칭하는 명칭은 사실 따로 있다. 앞서 설명한 황장목이 그것이다.

삼척 준경묘와 영경묘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이안사의 부모를 모신 능묘이다. 능묘를 정리한 것은 1899년 고종 때의 일인데, 조선 초기인 태종 때부터 삼척 부근에 조상의 묘를 찾아 관리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음에도 계속 혼란이 있었던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태조의 조상 묘가 대부분 함경도에 있었는데, 5대조인 목조가 전주에서 삼척으로 옮겨가며 처음 기반을 잡았던 곳임에도 그 능묘의 위치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뉴칼리지 전경.
삼척의 동산과 노동이라는 지역에 두 개의 능이 있는데, 세종 때 그곳에 어떤 이가 ‘능실에 장사를 지내면 자손이 길한다’며 함부로 뼈를 태웠기에 국문하자는 상소가 올라온다. 세종은 역시 성군답게 확실한 것도 아니니 크게 벌하지 말라며 용서해준다. 이후 성종 때와 선조 때 정철이 이 능묘를 정비하자고 의견을 내지만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세월만 보낸다. 그러다 인조 26년(1648) 어떤 이가 황장목을 베는 일로 근처에 들어갔다 능묘를 발견했다며 또다시 소장을 올린다. 이런 일이 반복된 것은 준경묘 주변이 울창한 황장목으로 둘러싸여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 지형인 데다 혹 국가 차원의 관리를 받게 되면 요역이 고될 것을 걱정한 근처의 민초들이 정확한 위치를 숨겨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조선 왕조의 선대 묘소 주변의 목재를 가져와 국보 1호인 숭례문을 복원한다는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상징성이 담겨 있기에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지만, 사실 나무가 무슨 죄가 있으랴. 러시아산 나무든 캐나다산 나무든 재목으로 쓰기에 적절한 크기와 강도를 가졌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얼마 전 유홍준 교수가 어떤 방송 인터뷰에서 제대로 된 나무 건조에만 3년 걸린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왜 당시에 자신 있게 10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두고 차분하게 복원하겠다는 의견을 내지 못했는지 답답하다는 생각만 차올랐다. 숭례문 화재가 있고 나서 당시 문화재청장이었던 그는 3년 내에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보 1호의 지위조차 위협받던 상황이 역전되면서 숭례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갑자기 무겁게 쏠리자, 복원 공사의 시기를 무리하게 앞당겨 발표한 것이다. 결국 숭례문 복원은 5년3개월이 걸렸는데, 이조차도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 내에 준공식을 거행하기 위해 무리를 했기 때문에 당겨진 일정이었다.

숭례문 복원 같은 국가적 차원의 프로젝트는 차분히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전통 기술의 계승 및 신기술의 적용 가능성 타진 등 많은 건축적 발전과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것을 성급히 날려버린 결과 맞닥뜨린 부실복원과 수많은 오점과 불명예를 안게 된 장인들…. 단지 시스템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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