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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6> 힙합

입력 : 2013-12-19 21:46:21 수정 : 2013-12-19 22: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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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빈민가 흑인들 반항과 자유정신 춤·그림·예술로 승화 # 힙합의 4대 요소, 랩과 디제잉, 그래피티 그리고 브레이크 댄스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상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플래시 댄스(Flashdance, 1983)’라는 영화가 있다. 개봉 당시 아주 젊은 여배우였던 제니퍼 빌즈가 주인공이었는데, 내용 전개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이지만 참 재미있었고 소재 또한 신선한 영화였다. 여자 주인공은 낮에는 용접공이고 밤에는 클럽에서 플로어 댄서로 일하며 무용가로 대성하려는 당찬 꿈을 가진 젊은이다.

‘플래시 댄스’는 영화에 수록된 많은 노래들이 상당히 오랜 시간 히트했고, 이후 비슷한 영화들이 많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주인공이 친구와 거리를 걸어가다 길에서 ‘스트리트 댄서’들이 묘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신이었다.

주인공이 멈춰 서서 구경을 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춤꾼들은 처음에 관절을 꺾으며 로봇처럼 춤을 추는 동작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는 난도가 높고 위험해 보이는 텀블링 같은 기이한 춤을 춘다. 그 당시 그런 춤은 처음 봤는데, 곧바로 그 춤은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게 된다.

박남정, 현진영 등이 추어 우리나라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 묘한 춤을 ‘브레이크 댄스’라고 하고, 그런 춤은 추는 사람을 ‘비보이’ 혹은 ‘비걸’이라고 부른다. 비보이라는 말은 ‘비트보이’를 줄인 말이라고 한다.

브레이크 댄스와 랩(rap), 디제잉(DJing), 그래피티(graffiti) 등은 힙합(Hip Hop)의 4대 요소로 불린다. 1970년대 미국 뉴욕 브롱크스 뒷골목의 흑인이나 스페인계 청소년들에 의해 형성된 새로운 문화운동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카펫 아래를 쓸고 있는 혹스턴 모텔의 청소부(Sweeping it under the carpet Hoxton maid)’라는 뱅크시 작품.
그래피티는 전철역이나 건물의 벽, 다리 등에 에어스프레이 페인트로 원색적인 거대한 글씨나 그림 등을 그리는 것이고, 랩은 비트가 빠른 리듬에 맞춰 자기 생각이나 일상의 삶을 말하듯 부르는 음악이고, 브레이크 댄스는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듯 온 몸을 던지는 곡예 같은 춤이다. 디제잉은 레코드 판을 손으로 앞뒤로 움직여 나오는 잡음을 이용하는 스크래치나 믹스 등 디제이의 다양한 행동을 말한다.

힙합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가 활약하던 바로 그 시기, 그 장소에서 생겨난 매우 자유로운 문화인데, 처음에는 그것을 문화로 여기지 않았고 미국 빈민가 청소년의 치기어린 반항으로만 여겨졌었다. “엉덩이(Hip)를 흔든다(Hop)”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혹자는 힙합은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만들어 낸 유일한 문화”라고 평하기도 한다.

힙합은 무척 너울거리고 흥청거린다. 그래서 간혹 저급한 문화라고 폄하되기도 하고 사실 그렇게 보일 때도 있다. 거창하게 시작하거나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았지만, 힙합은 그 자유로움과 시각적이며 에너지가 넘치는 속성으로 인해 금세 상업화되어 20세기의 후반을 이끄는 문화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다.

# 한국 비보이, 세계 최고의 자리 오르다

11월30일 세계적인 비보이 대회가 우리나라에서 열렸다. 2007년 시작된 한국의 ‘R-16 Korea’도 세계적인 대회로 손꼽히지만, 세계 4대 비보이 대회는 영국에서 진행되는 ‘유케이 비보이 챔피언십(UK B-Boy Championship)’과 독일에서 진행되는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 미국의 ‘프리스타일 세션(Freestyle Session)’ 그리고 국가를 옮겨가면서 개최되는 ‘레드 불 비시 원(Red Bull BC ONE)’을 들 수 있다.

그중 레드 불 비시 원은 레드불이라는 음료회사에서 후원하는 행사인데, 브레이크 댄스 초기의 일대일 배틀 방식을 고수하며 매년 세계 각국의 대도시를 순회하며 개최된다. 크루(Crew·단체)가 아닌 개인이 출전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승하는 비보이는 세계 최강의 기량을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있다. 각 나라 예선을 거친 후 대륙별 지역결선에서 맞붙어 최종결선에 오른 최고의 비보이만이 무대에 진출해 일대일 배틀을 하게 되는데, 별도의 심사기준 없이 5명의 심사위원이 자기 소신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무척 치열하고 긴장감 있게 진행되는 대회이다.

역대 우승자들과 전 세계 대표가 출천한 세계적인 비보이 대회 2013 레드불 비시 원에서 우승한 한국 비보이 홍텐. (출처: www.redbull.com/kr/ko/stories/1331622992141/red-bull-bc-one-world-final-2013-photos)
이번에는 특히 이 대회가 10회를 맞이하는 기념으로 각 대륙에서 치열한 예선을 거쳐 올라온 비보이들과 역대 챔피언들이 모두 모인다고 해서, 온 가족이 함께 대회가 열리는 잠실체육관으로 갔다. 잠실체육관은 처음 가봤는데, 평소에는 농구나 배구를 했을 코트의 중앙에 둥그런 무대를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그 옆 빈 공간에는 임시로 스탠드를 만들어놓고 간이의자를 가득 채워놓고 있었는데, 관중석은 물론이고 간이좌석도 모두 가득 차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이 큰 음악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2004년부터 작년까지의 우승자와 올해 예선 통과자들이 맞붙어 기량을 뽐내고 그중에서 챔피언을 뽑는 이를테면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었는데, 한국 대표로는 2000년대 초에 우리나라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비보이 홍텐(Hong10)과 비보이 윙(Wing), 두 사람이 역대 챔피언(각각 2006, 2008년) 자격으로 출전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릴루(Lilou), 미국의 록시라이트(RoxRite) 등 영상으로만 만났던 최고의 비보이들이 눈앞에서 펼치는 화려한 경연에 두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비보이로서는 무척 나이가 든 30대에 접어든 홍텐이 전혀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우승을 하고 끝났다.

우리나라의 비보잉은 다른 나라에 비해 늦게 시작된 편인데, 선구적인 몇몇 춤꾼들에 의해 시도되기는 했지만 그 저변이 무척 좁았다. 1990년대 말 묘하게도 우리나라에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깔리기 시작할 무렵 시작되어, 2000년대 초에 경악할 속도로 발전하여 2003년부터는 전 세계 비보이 대회를 휩쓸게 된다. 유럽이나 일본이 20년에 걸쳐 이뤄냈던 것을 한국은 5년 만에 이뤄냈다며 전문가들은 혀를 내둘렀고, 한국 비보이들은 남들이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고난도 기술을 선보이며 다른 나라와 많은 격차를 유지하며 멀리 달아나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힙합이 이제 전 세계로 뻗어나가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은 지 꽤 되었다. 그리고 비보잉의 판도도 초기 ‘락 스테디 크루’ 등의 전설적인 팀에 의해 미국이 지배하던 시절을 보내고, 그 주도권이 유럽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동양 특히 그중에서도 한국이 강자로 손꼽힌다.

연달은 해외 수상경력에 힘입어 2006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뽑은 10대 히트상품에 선정되기도 했던 비보이의 전성기는, 그러나 무척 짧았다. 우리나라에서 비보이들에 대한 인식은 그들이 이룩한 세계적인 수준에 비해 매우 왜곡되어 폄하되는 분위기이고, 시장이 작고 활동공간도 협소해서 문화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백댄서 정도 혹은 재미있는 재간꾼 정도로 인식되는 비보이들은, 해외에 나가면 대단한 팬을 거느린 영웅으로 대접 받는다.

# 뱅크시, 힙합의 자유로운 정신을 대변하는 거리의 예술가

그래피티는 초기에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렬하게 디자인된 글씨와 그림을 그려놓아 도시를 관리하는 주체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그러다 그래피티가 정식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바스키아와 헤링(Keith Harring) 같은 작가들의 활동과 그들의 그림이 작품으로 인정되면서부터라고 볼 수 있다.

검은 피카소라고 불리는 바스키아는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음에도 20대 초반 젊은 나이로 각광을 받기 시작해서 27세에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대단히 왕성하고 영감에 가득 찬 작품을 남겼다. 물론 그 그림이 엄청난 가치로 치환되면서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는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면 마치 아이들의 낙서 같은 천진함과 원시적인 힘이 느껴지고, 기존 미술 형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뱅크시가 작업한 교회의 스테인드 글래스. 현재 가장 비싼 현대미술 작가인 데미안 허스트의 스테인드 글래스 작업을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술의 자유, 혹은 예술가의 자유로운 정신을 빼앗아갔다. 상업적 화랑 시스템은 작가를 발탁하고 가치를 부여한 다음 작가에게 그림을 한없이 뽑아낸다. 그들의 열정과 재능이 바닥까지 소진될 때까지.

“나는 갤러리가 돌아가는 시스템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늘날 예술작품의 가치는 백만장자가 그것을 좋아하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라고 이야기하며, 어디에 예속되지 않고 어디에도 그림을 팔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왕성하고 재치 있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있다.

뱅크시(Banksy)라고만 알려진, 본명도 얼굴도 목소리도 알 수 없는 화가인데 주로 영국에서 활약한다. 그의 작업장은 거리이고, 그림을 그리는 화폭은 거리에 면해 있는 낡은 벽이거나 전봇대이거나 교각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나라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의 벽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영국에서도 불법인 관계로, 뱅크시는 밤에 홍길동처럼 출몰해서 그림을 그려 넣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촌철살인의 유머와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카펫 아래를 쓸고 있는 혹스턴 모텔의 청소부(Sweeping it under the carpet Hoxton maid)’라는 작품은 뱅크시가 로스앤젤레스의 모텔에서 자신의 방을 청소해준 씩씩한 청소부를 그린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의 주제를 ‘예술의 주제를 민주화한 데 의의가 있다’고 말하는데, 과거에는 교황과 왕자만 초상화가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든 초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그려져 있던 담장의 주인인 갤러리 측에서 지워버려 지금은 이미지만 남아 있고 세상에 없다.

자고 일어나 자신의 집이나 가게의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정교하게 그린 그림을 발견한 주인은 대경실색하고, 사람들은 그림을 보기 위해 몰려온다. 처음에는 거리의 낙서로 여겨 그 위에 페인트로 덧칠하기도 하고 솔로 박박 문질러 지우기도 했지만, 그가 유명해지고 나서는 그의 그림을 고대미술품 복원 전문가를 동원해 정교하게 떼어내서 화폭에 복원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고 그림이 그려진 벽을 아예 경매에 내놓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골목을 누비며 뱅크시의 그림을 찾아다니는 투어도 아주 성업 중이라고 한다.

정말 웃기지 않는가. 그런 상업주의가 싫어서 거리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작업이 다시 비싼 가격으로 팔리고, 그가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추앙받는 것이. 또한 그런 비뚤어진 물신숭배의 적나라한 단면을 우리가 모두 실소를 머금은 채 쳐다보게 하는 것이 뱅크시의 진정한 의도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예술이 없어지고 있다. 있다면 상품이 있을 뿐이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무용이나 모든 것이 예술가의 자유의지와 창조를 향한 열망에서 자라나지 않고, 모두 돈으로 환산된다. 그림의 가치와 작가의 정신보다는 지금이나 혹은 추후에 얹히는 금전적인 가치로 평가되는 바로 그런 불합리와 시대정신을, 뱅크시는 우리에게 똑바로 보라고 하는 것 같다.

힙합은 자본주의의 최전방에 있는 미국에서 소외받았던 가난한 동네의 청소년들이 폭력과 저항을 춤과 그림으로,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는 자유의 정신과 평화에 대한 애호가 깔려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용광로는 그런 것마저도 상품화하고 시장에서 거래하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힙합의 정신은 그런 상업주의에 반대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택하는 바로 그 용기이다. 도시의 그늘에서 세상을 놀라게 하는 비보이들이 그렇고, 뱅크시 같은 거리의 미술가들이 그렇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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