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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5〉독락당

입력 : 2013-12-05 22:00:28 수정 : 2013-12-06 11: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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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락당과 계정, 가장 아름다운 한옥의 풍경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 포항 쪽으로 가는 길 변에는 많은 즐거움이 숨어 있다. 영천을 지나다보면 산속에 꽃처럼 피어 있는 매산종택(梅山宗宅)을 볼 수 있고, 안강 근처에 이르러 독락당(獨樂堂)과 옥산서원(玉山書院)을 만나고, 조금 더 들어가면 양동마을을 만난다. 그리고 금세 바다에 다다른다.

나는 그 코스를 좋아해서 틈나는 대로 그 길로 접어들곤 하는데, 한꺼번에 다 보는 게 아니라 한 군데씩 여유 있게 보곤 한다. 양동마을이야 내남이 모두 알다시피 문화와 역사의 보고이고, 안강에 있는 독락당과 옥산서원도 조선시대의 큰 학자인 회재 이언적( 晦齋 李彦迪)의 학문과 가족에 얽힌 이야기가 파내어도 파내어도 끝이 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깊은 산속이 아닌 곳, 심지어는 큰길 가에 있는 집인데도 그 안에 들어가면 깊은 계곡에 들어간 것보다도 훨씬 적요하고 아름답다. 독락당은 중앙에서 활발히 정치를 하던 이언적이 여러가지 정치공학적인 이유로 벼슬길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지어놓고 5년간 머문 집으로 알려져 있다. 집터는 아버지가 예전에 잡아놓은 자리였고, 이후 독락당과 계정 등은 이언적이 직접 설계하고 감리하고 이름 붙여놓은 집이라고 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양동의 여강이씨 본가 무첨당(無?堂)과 거리를 두고 지어진 이곳은 소실인 석씨 부인의 재산으로 건립한 집이라고 들어왔다. 그 크기도 조선시대 대종가급으로 안채, 사랑채가 모두 넓고 특히 계곡을 바라보는 계정(溪亭)과 사랑채 독락당이 멋진 곳이다. 이 집은 안채의 영역과 바깥채의 영역이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고, 집 주위로 깊은 산속도 아닌 그냥 개울 옆인데 마치 심산유곡에 들어선 집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빼어난 집의 구성과 풍광의 수려함 때문에 관광객들이 수시로 들이닥치는 곳이지만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기에 늘 개방하는 곳이 아니다. 간혹 들어간다 치더라도 관광객들에 쓸려 제대로 보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올가을에 포항에 갈 일이 생겨 역시 그 길을 따라 영천에서 안강으로 달렸다. 밤에 도착해서 옥산서원 앞에서 잠을 자고 아침 일찍 독락당으로 향했다. 아주 청명한 가을 아침이었다. 오전 9시를 조금 못 미친 시간이었는데, 대문채를 들어서는 중에 사랑채 쪽 문이 빠끔 열리더니 어떤 아주머니가 오늘은 문이 열려 있으니 안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

무슨 복이 들었던지 그날은 화재에 취약한 목조로 된 집에 방염 도장을 하는 날이었고, 건물 주변에는 하얀 작업복과 작업모를 쓴 사람들 외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얼른 들어가 평소에 잘 볼 수 없었던 건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이 집의 하이라이트인 계정에 앉아서 단풍이 무르녹아 계곡으로 뚝뚝 떨어지는 평생 잊히지 않은 계정의 늦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독락당이란 한문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도 알아차릴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이름이다. ‘혼자 즐기겠노라.’ 뭐가 그리 섭섭해서 세상과 등지고 몸을 숨기고 길과 등을 대고, 깊지도 않은 개울가를 깊게 만들어놓고 혼자 담장의 끝에 만들어놓은 세 칸짜리 정자에서 즐기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언적이 벼슬길에서 잠시 나와 겹겹이 담을 걸고 바위 위에 걸친 정자에 기대어 세상을 건너다보며, 홀로 몸을 숨기고 마음을 숨기려 했던 독락당의 계정.
# 이언적이 독락당에 내려온 사연

이언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양동마을이다. 양동마을이야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우리가 좋아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동네이고, 월성손씨와 여강이씨의 집들이 포도송이 달리듯이 계곡에 알차게 들어선 동네인데, 그 동네에서도 이언적의 존재는 단연 압도적이다.

이언적은 1491년 외가인 양동마을 월성 손씨의 대종가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월성손씨 입향조인 손소의 딸 손씨 부인과 여강이씨 이번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열 살이 되는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가르침과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는 이십대에 벼슬길을 시작하여 평생을 높은 학문과, 그 학문에 걸맞게 높은 벼슬과 존경을 받으며 살았었다.

그는 당시의 사림들과는 다르게 훈구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중앙의 정계에서 잘 버티고 잘 성장했었다. 그러나 결국 50대 후반에 ‘양재역 벽서사건’에 휘말려 북쪽 변방인 강계로 유배 가서 예순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이언적이 25세 때인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했을 때 손중돈은 대사간, 승정원 도승지 등 중앙 요직에 있었다. 청백리로 표상 받으며 경상도·함경도·충청도 관찰사 및 공조판서·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 외삼촌의 행보를 이언적도 그대로 따라갔다. 동궁의 학업을 지도하기도 했고, 나름대로 직언을 서슴지 않으며 중종의 신임을 받았던 이언적은 1530년 사간원 사간에 임명된다. 이때 잦은 권력 남용으로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돌아온 김안로(金安老)가 재등용되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한마디했다가 1531년 동료를 모함했다며 파직된다.

“심정(沈貞·남곤, 홍경주와 함께 조광조를 모함한 기묘사화를 주도한 인물)은 제거되었지만 김안로가 들어오게 되면 이는 100명의 심정과 같다. 그가 들어오면 한직에 있지 않고 반드시 크게 쓰일 것이니, 나라의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언적의 우려대로 김안로는 우의정, 좌의정이 되고 살벌한 공포정치를 하며 정적이었던 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1937년 유배돼 사사되는데, 이 기간 동안 정계에서 멀어진 이언적은 고향집에 돌아가는 대신 독락당을 짓고 학문을 하며 보낸다.

중종실록의 ‘이언적 졸기’에는 이언적이 무척 가난했다고 나와 있다. 그런 그가 “평소 고상한 아취가 있어서 경주 북쪽 자옥산(紫玉山) 속에 거처를 선택해 기괴한 바위와 깨끗한 시내를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주위에 꽃과 대나무를 심고, 날마다 시를 읊조리고 고기를 낚으면서 세상만사를 사절하는 한편,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책을 읽으며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을 깊이 하니, 공부가 전일에 비해 더욱 깊어져서 참으로 정밀하게 터득한 묘(妙)가 있었다.”

그렇다면 그 집이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큰 규모의 대갓집이었을까.

이언적이 복직하기 전까지, 아름답고 재력 있는 소실 석씨의 재산으로 지어진 독락당에서 석씨 부인과 세상을 피해 행복하게 살았다고 전해지던 것이 우리가 그동안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언적과 석씨 부인은 같이 살지 않았다.

자계천에서 바라본 계정.
# 독락당에 얽힌 비밀

이언적의 행로를 따라가면서 실록을 읽다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나온다.

“이언적의 기첩(妓妾)이 임신을 한 후 조윤손이 거느리게 되었는데 해산을 하자 윤손은 자기의 아들로 여겼지만 윤손이 죽은 뒤에 언적의 아들로 확정이 되었습니다.(윤손의 첩은 그 아들이 언적의 아들임을 알았으나 윤손이 살아 있을 적에는 말을 하지 않았다가 윤손이 죽은 뒤에 마음속 깊이 더 묻어 둘 수 없게 되어 하루는 그 아들에게 ‘언적이 진짜 너의 아버지다’ 하여 그 아들이 언적의 집으로 갔다고 한다.)”(명종 16권, 9년·1554년 1월 19일·경신) 첫 번째 기사, 조강에 나아가 서얼 허통에 대해 논의하다)

이언적은 스물세 살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스물다섯 살에 경주로 가서, 지금으로 치면 지방학교의 선생격인 주학의 교관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감포만호인 석귀동의 딸 석씨를 사귄 모양이다. 석씨는 기록에는 기첩, 즉 관기로 나오는데 사실은 그 어머니가 관비였기에 종모법에 따라 관비 신분이었다가 1515년 양인으로 속량(贖良)되었다 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언적이 서울로 간 후, 석씨는 무관인 조윤손이라는 사람의 소실로 들어가 아이를 낳고 옥결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조윤손에게는 이미 세 딸이 있었지만 그는 서자였던 옥결을 아껴 집안과 재산을 다 물려주었다 하는데, 결국 조윤손 사후 어머니로부터 생부가 누구인지를 들은 아들은 물려받은 것을 내려놓고 이언적을 찾아가 다시 ‘전인(全仁)’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이전인이 아버지를 찾아간 곳은 본가가 아니라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였다. 중종 사후 즉위한 인종은 이언적과는 동궁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으나, 즉위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죽었다. 명종이 즉위하며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해 외척인 윤원형 등이 득세하자, 대부분의 사림들이 그렇듯 승승장구하던 이언적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때는 다행히 화를 피했으나,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이 일어나자 결국 연루된다. 양재역관 외벽에 붉은 글씨로 ‘여주(女主·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지칭)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 그믐날’이라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된다. 이 일로 을사사화에 화를 면했던 사림들이 다시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된다.

독락당 사랑채.
이언적에게도, 동생인 이언괄에게도 아들이 없어 어머니인 손씨 부인이 집안에 자손이 귀하다며 무척 한탄했다 하는데, 유배지에 갑자기 찾아온 서른이 넘은 아들을 보고 이언적이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알 수 없다. 서얼제도의 구속과, 스스로도 유학자로서의 엄격한 기준을 세운 탓이었는지 이언적은 유배지에서 7년이나 자신을 봉양한 이전인 대신에 오촌인 이응인을 양자로 들여 자신의 후사를 잇게 한다. 즉 본가인 양동마을의 무첨당은 정실인 박씨 부인과 이응인에게 물려주고, 이전인에게는 독락당을 물려준다.

아무튼 아버지를 극진히 모신 이전인은 이언적 사후 대나무로 된 상여에 시신을 모시고 석 달에 걸쳐 경주로 돌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유고들을 정리하고, 유배지에서 나눈 기록들을 모아 ‘관서문답록’이라는 책도 쓰고 이황 등 여러 유학자들에게 보이며 그들과 아버지의 사상을 공유한다. 1566년에는 이언적이 죽기 전에 써놓은 ‘진수팔조(進修八條)’의 상소를 대신 올려 아버지의 복권에 공을 세운다. 물려받은 독락당 일원을 증축해 현재의 규모로 만든 것도 이전인과 그 아들 이준, 이순 등의 자손들이며, 이언적을 배향한 옥산서원의 건립도 지원한다.

이언적이 소실과 조용히 즐기려 독락당을 지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낭만적인 추측이라고 생각된다. 많은 추측과 과장으로 덮여 있는 독락당에 대한 오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믿을 만한 근거가 되어주는 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언적이 머물 당시에는 작고 소박한 집이었을 것이다. 독락당은 이언적이 김안로 등 훈구세력의 눈길을 양동마을로부터 돌리고, 겹겹이 담을 걸고 바위 위에 걸친 정자에 기대어 세상을 건너다보며, 그야말로 홀로 몸을 숨기고 마음을 숨기려 했던 곳이 아니었을까 싶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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