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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3〉전각

입력 : 2013-10-31 21:59:33 수정 : 2013-11-01 0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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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에 누적된 인간의 기억과 몸짓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건축을 시작할 때, 혹은 졸업 후 설계사무실에 입사하여 건축실무를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주어지는 과제가 글씨 연습이다. 설계도면에 글씨를 쓴다는 것은 그냥 필기체로 글씨를 쓰는 것과는 다르다. 도면을 펼쳐놓고 바탕에 보조선을 그리고, 그 위에 규격화된 글씨를 정교하게 그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림으로서, 하나의 기호로서의 글씨를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글씨란, 어떤 새로운 상황이나 국면을 접할 때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문자라는 것은 진정으로 위대한 발명이다. 아니 ‘발명’된 문자는 오로지 한글밖에 없으니, 문자란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조금씩 누적된 기억과 몸짓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수묵화는 수채화 같은 서양식 그림과 달리 마무리할 때 찍는 도장, 즉 낙관이 필요하다. 낙관을 직접 파보겠다는 생각에 인사동에 가서 제일 먼저 나오는 필방으로 들어가 대뜸 물었다. “도장을 파고 싶은데 어떤 재료를 사야 하나요?” 그러자 주인은 네모난 돌과 돌을 파는 쇠막대처럼 생긴 도장칼을 주며 대략의 요령을 가르쳐주었다. 그것들을 집에 가지고 와서 이런저런 궁리를 하고서, 돌 위에 연필로 도안을 하고 무턱대고 파기 시작했다.

전각(篆刻)이란 돌에 전자(篆字)로 글을 새겨 인장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림이나 글을 쓴 다음 그 인장을 찍는 행위를 이르는 낙관(落款)은 낙성관지(落成款識)의 준말로, 도장은 낙관인으로 부른다.

아무튼 나는 낙관을 하고 낙관인을 찍기 위해서 도장을 새기는 방식과 내용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전각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전각에 적합한 글씨를 알아야 한다. 가까이는 동네에 있는 도장집부터 시작해서 역사적인 인물들의 낙관을 찾아보았고, 여기저기 책을 뒤져 전설적인 전각들을 열심히 구해보았다.

전각을 하는 글씨들은 대부분은 한자였고, 더구나 우리가 지금은 쉽게 읽기 힘든 한자의 원형들이었다. 그 한자의 원형은 문자라기보다는 아주 원초적인 사물이나 상황을 그려놓은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글씨체는 전서체 이전의 문자들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한자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때 한자를 무척 쉽게 익혔는데, 집과 학교 사이 등굣길인 을지로 주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가게들의 간판이 모두 한자였기 때문이다. 한 글자씩 의식하지 않아도 눈에 익다 보니, 제법 많은 한자를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제2외국어를 수강하게 되었을 때 일본어, 불어, 독어 사이에 얄궂게 중국어도 아닌 한문이 끼어있는 것을 보고 그 과목 수강신청을 했다. 수업에 들어가면 무척 잘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던 한문 수업이 시작되었다. 1년 동안 ‘사기열전’ 일부와 당나라 시절의 시 즉, 당시를 배운다고 했다. 그 수업은 사범대 국어교육과에서 개설한 과목이었으니 수강자 대부분은 국어교육과 학생들이었고, 동양화과 학생들도 조금 있었다. 그 외의 다른 전공은 건축과 학생인 내가 유일했다. 

도서관의 외벽에는 한글을 포함, 인류의 문명을 상징하는 각 나라 언어의 글자들을 새긴 석판이 모자이크처럼 장식되어 있다.
# 설문해자, 최초의 한자사전


수업을 받으며 내가 그동안 알고 있었던 것은 단지 모양을 음으로 읽어내는 한자였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수업에서 배우게 된 것은 언어를 문자로 옮긴 한문이었다. 나를 제외한 학생들과 교수님은 글자 하나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했으며, 출처와 다양한 전거(典據)를 가지고 토론을 했다. 듣자하니 한자의 글자 하나하나는 ‘하늘 천, 따 지’ 하듯이 단어의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다양한 전거를 살펴보고 그 내용과 의미를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런 것을 알지도 못했고 그들이 근거로 삼는 책들은 구경은커녕 들어보지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한 학기 동안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나만 혼자 뗏목에 올라탄 표류자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뭐 하러 이 수업을 들었냐”하는 핀잔을 들으며 마쳐야 했다. 그때 그들이 수업시간에 들이밀었던 다양한 전거 중에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말이 아주 빈번히 들렸다. 대충 넘겨 짚어본 바로는 어떤 한자 사전인 것 같았다.

한자는 중국 고대의 전설 속의 제왕인 황제(黃帝) 때 사관이었던 창힐이라는 사람이 새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한자는 중국의 기나긴 역사 동안 발전과 변화를 거듭한다. 그것이 역사적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중국 고대국가인 상나라 때 뼈에 새겨진 글자인 갑골문과 주나라 때 청동 그릇에 새겨진 문자인 금문이다.

그런데 주나라가 멸망하고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며 제후국마다 모두 다른 형태의 문자를 쓰면서, 한자는 다양해지고 혼란스러워진다. 이후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여러 나라에서 많은 체계로 분화되었던 한자도 하나의 체계로 통일한다.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웠듯이 진시황이 채택한 다양한 변혁 정책 중에서도 으뜸은 도량형과 문자의 통일로 평가된다. 그 작업은 진나라의 천하 통일을 주도했고 승상의 자리까지 올랐던 이사(李斯)에 의해 이루어졌다.

진나라에서 사용하던 자체(字體)인 대전체(大篆體)를 단순화한 소전체(小篆體)가 만들어지고, 그 글씨체로 문자가 통일된다. 이후 진나라 말기에 예서가 만들어지고 통용되는데, 그 글씨체는 진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의 공식 서체가 된다. 그리고 이때 한자는 그림문자에서 탈피하게 된다.

그리고 진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던 한자는 한나라 말기인 동한 시절에 허신(許愼)이라는 사람에 의해 비로소 체계화된다. 허신이 지었다는 설문해자는 수십 년에 걸친 허신의 노력의 결정체이며 최초의 한자사전이다. 이 책은 당시에 통용되던 문자를 근거로 총 15편 540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9353자의 한자를 다루고 있다.

허신은 당시에는 최초로 명칭으로만 전해지던 한자의 조자(造字) 법칙인 육서(六書: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를 정의하였고 부수 개념을 창안하는 등 방대한 역사와 사용 용례 등을 통해 쉽지 않은 작업을 40년에 걸쳐 완성했다. 그리고 그가 만든 체계는 2000년에 걸쳐 한문을 이해하는 통로 역할을 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등대가 되고 있다.

문자는 단시간에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이 퇴적되고 그 축적에 의해 구현되는 아주 구체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중국의 문자인 한자를 보면 문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대단히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자 하나하나엔 그런 역사가 깃들어있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아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열려 있는 문자라고도 볼 수 있다. 아마 허신이 문자의 체계를 정리할 때 그랬을 것이다. 그 당시 문자란 불특정한 경로를 통해 전달되는 문화의 총아였다. 그리고 그 문자의 잘못된 해석으로 심각한 오류가 범해졌고 경전의 오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설문해자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설문해자는 20세기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된다. 

2002년 1700년 만에 다시 지어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전경.
# 문명의 역사를 외벽에 새긴 도서관

그 사건의 발단은 1899년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시작된다.

“당시 국자감의 제주였던 왕의영은 학질이라는 지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용골이란 것이 특효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구입하였는데 작은 뼛조각의 파편일 뿐이었다. 당시 약방에서는 은허문자가 쓰인 뼛조각을 용골이라 하여 보약제나 치료제로 팔고 있었다. 왕의영의 집에는 때마침 강소 단사에서 유철운이라는 이가 식객으로 와 있었다. 왕의영과 유철운은 모두 다 금석학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고대 문자에도 조예가 깊었다. 두 사람이 그 용골이라는 뼛조각을 진귀하다는 듯이 살펴보다가 표면에 새겨진 문자를 발견했는데, 그것이 바로 용골이 아닌 갑골문의 첫 발견이었다.”(갑골문의 세계, 시라카와 시즈카 저·평범사·일본·1972)

허신이 설문해자를 만들 때 갑골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해오는 문자를 단순화시킨 전서를 바탕으로 사전을 만들었기 때문에 의미와 기원이 왜곡된 부분이 무척 많았다. 그런데 갑골문이 발견되며 설문해자의 오류가 많이 발견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은 3000자 정도이고 해독이 된 글자는 1800여자이다. 갑골문의 발견으로 알게 된 허신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허신의 설문해자는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의미 있는 언어의 보고임에는 변함이 없다. 문명이란 시간의 적층이고 또한 시간을 배신하는 하나의 반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지며, 그 기반에 사람들이 하나씩 쌓아올린 지혜들이 고여 있다. 그러나 고이고 있는 기층에만 의존하면 새로움이란 생길 수 없고 문명이란 성립되지 않는다.

서기 100년경 허신이 한자의 체계를 최초로 정리했다는 ‘설문해자통석’.(출처:동양의 고전을 읽는다/terms.naver.com/entry.nhn?docId=892336&cid=265&categoryId=1069)
우리가 한문을 대하는 자세 역시 그렇게 보인다. 한문이란 인류의 중요한 문화이고 또한 글자 하나하나에 역사를 싣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글자, 한 글자 음미하고 연원을 파악하며 무척 감격하지만, 아무리 좋은 문자고 역사라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중국의 가장 큰 고민도 그 지점에 있다. 배우고 익히기 힘든 한자를 간략화한 간자체가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문자로 외피를 두른 건축물이 있다. 기원전 288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의 책’을 수집하여 보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집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재현한 건물이 그것이다.

당시 모두 양피지 70만 두루마리의 자료가 소장돼 있었다는 이 도서관은 고대 그리스 학문을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했을 뿐 아니라 전성기에는 지중해, 중동, 인도 등지의 언어까지 아우르는 문헌을 보존하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기원전 48년 로마의 카이사르 황제가 이집트 공략 당시 건물 일부를 태웠고 결국 3세기경 로마 군대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700여년이 지난 1988년 학문과 예술의 상징이었던 이 도서관을 재건하자는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유네스코 주관의 재건 기구가 발족되어 설계공모가 이루어졌고, 77개국의 523여개 회사가 제출한 작품 중에서 노르웨이 건축가 스뇌헤타(Snøhetta)의 작품이 당선되었다. 이집트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세계 여러 나라가 건립 비용과 기자재, 자료 등을 기증하여 2002년 800만권의 장서를 품고 다시 문을 열었다.

2012년 부산 오페라 하우스 공모전에도 당선한 바 있는 스노헤타는 태양이 인간 세계와 문화 활동을 비춰준다는 고대의 의미를 되살려, 떠오르는 태양을 비유하듯 비스듬히 기울어진 북쪽면에 채광창을 달았다. 도서관의 외벽에는 한글을 포함, 각 나라 언어의 글자들을 새긴 석판이 모자이크처럼 장식되어 있다. 문자로 상징되는 문명의 역사가 새겨진 그 틈으로 빛이 스며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인류가 쌓고 허물어 온 기나긴 시간의 궤적을 다시 읽는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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