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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렁이는 억새, 출렁이는 가을

입력 : 2013-10-31 20:29:33 수정 : 2013-10-31 20: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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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관상’ 촬영지 앙평 유명산 설매재 관객 900만명을 넘게 동원한 화제의 영화 ‘관상’은 천재 관상가 내경(송강호 분)을 기생 연홍(김혜수 분)이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내경이 기거하던 깊은 산속 오두막집 주위에는 억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은빛으로 물결치는 이 억새밭은 관객들의 시선을 끌며,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톡톡히 한몫하고 있다.

영화 ‘관상’의 억새밭 장면을 촬영한 곳이 바로 경기도 양평 유명산(864m) 자락의 설매재다. 사시사철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유명산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억새 명소로 알려진 곳이지만, 설매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설매재에 억새 군락지와 ‘관상’ 세트장이 있다는 사실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됐다. 당초의 목적지는 유명산의 봉우리 중 하나인 대부산(743m) 정상이었다. 서울 근교의 대표적인 패러글라이딩 명소인 대부산 정상 활공장의 전망이 빼어나고 인근에 근사한 억새밭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다.

양평군과 가평군의 경계에 자리한 유명산은 예전에 마유산(馬游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군마 사육장이 있어 붙은 이름으로, 산 곳곳에 말들이 뛰어놀기에 적당한 평평한 지형이 펼쳐져 있다. 산세도 청마가 도약하는 형상이라고 한다. 그 후에는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으나, 1960년대 들어 정부 시책에 따라 그들이 떠나며 화전민들이 일구던 밭이 억새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영화 ‘관상’의 촬영지였던 양평 유명산 설매재의 억새밭과 그 사이에 놓인 오두막집. 영화의 장면들을 기억해 가며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밭 사이를 걸으면 색다른 감흥에 젖게 된다.
일출과 운해를 카메라에 담을 생각으로 동이 트기 전인 오전 6시 숙소에서 출발했다. 유명산 중턱의 배너미 고개에서부터 2.5㎞ 정도의 거친 비포장길이 시작된다. 4륜구동 차가 아니면 올라가기 힘들 정도로 흙길은 가파르고 울퉁불퉁하다. 그래서 이 길에서 ATV(사륜구동 오토바이)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대부산 꼭대기 활공장에 서자 남쪽으로 켜켜이 쌓인 유려한 산 능선 넘어 양평 읍내, 그리고 그 뒤로 흘러가는 남한강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시원한 풍경이 펼쳐지기에 수많은 패러글라이딩 동호인들이 이곳을 찾을 것이다. 이곳에서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상승기류만 잘 만나면 5시간 정도를 비행해 동해안까지도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곧 동쪽 용문산 너머로 아침 해가 떠오른다. 대부산 정상 일대는 온통 억새밭이다. 여명을 머금은 억새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더 화려해진다.

대부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중간쯤에 산허리로 돌아가는 샛길이 나 있다. 차를 몰며 안내를 해 준 패러글라이딩 강사 김천하(48)씨가 대뜸 “저 길로 올라가면 관상 세트장이 있어요”라고 말한다. 김씨는 촬영 장비를 트럭으로 날라주고, 또 옆에서 영화 촬영을 지켜봤다고 했다. 급하게 방향을 틀어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갔을까. 눈에 익은 풍경이 펼쳐진다. 너른 억새밭 사이에 좁은 길이 나 있고, 그 옆에 오두막집 두 채가 서 있다. 내경이 연홍을 맞던 바로 그 집이다. 영화 촬영 후 방송국의 몇몇 사극도 이곳에서 배경 화면을 담았다고 한다.

오두막집 아래에는 억새로 뒤덮인 가파른 비탈길이 있다. 내경이 청운의 꿈을 품고 오두막집을 떠나는 진형(이종석 분)을 배웅하는 그 언덕이다. 이 언덕 아래 펼쳐지는 장면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아름답다. 배너미재에서 대부산을 잇는 산길을 트레킹 코스로 조금 다듬기만 하면, 스토리를 담은 멋진 풍경이 있어 설매재 일대 억새밭은 양평의 새로운 가을철 여행 명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서울에서 멀지 않지만, 산이 높고 골이 깊은 양평에는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여럿이다. 용문산의 용문사와 사나사는 경기도의 대표적인 단풍 명소로 꼽힌다. 1100년 된 높이 42m의 거대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로 유명한 용문사 주변은 요즘 곳곳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어 있다. 지난 주말까지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던 이 은행나무는 이번 주말이면 단풍이 절정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용문사가 주말이면 인파가 워낙 많이 몰려 행락지처럼 변하는 게 부담스럽다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사나사를 찾는 게 좋겠다. 고려 태조 때 지어진 사나사는 누각이 5, 6채에 불과한 단출한 절집이지만, 그윽한 정취와 빼어난 풍광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

여름철 피서 명소인 사나사 계곡은 가을이면 곱디고운 단풍빛으로 물든다. 사나사 입구 돌계단 위 은행나무들이 노랗게 물들었다. 그 아래서 친구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 서너명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활짝 웃고 있다. 유난히 맑은 가을날 오후의 햇살이 이 풍경을 더욱 따스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양평=글·사진 박창억 기자 daniel@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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