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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2> 매혹

입력 : 2013-10-03 20:49:36 수정 : 2013-10-03 23:5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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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넘치던 홍대앞·대학로 아련한 추억 속으로 # 매혹, 우리를 사로잡는 것들

매혹(魅惑)된다는 것은 사로잡힘을 의미한다. 매혹은 어떤 것이 나를 보이지 않는 밧줄로 옭아매고 잡아당기거나 늦추면서 맘대로 끌고 다니며 놓아주지 않는 강력한 힘이다. 도깨비 혹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의미의 ‘매(魅)’라는 글자는 뜻을 나타내는 귀신귀(鬼)와 음을 나타내는 미(未)가 합쳐져 이루어진 것인데, 매혹·매료·매력 등 의지로는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다.

우리는 무언가에 매혹당한다. 아름다운 용모에 매혹당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에 매혹당하고 아름다운 향기에 매혹당한다. 가령 나를 매혹시킨 것은 “달빛 속에 있는 네 얼굴 앞에서 내 얼굴은 한 장 얇은 피부가 되어 너를 칭찬하는 내 말씀이 발음하지 아니하고 미닫이를 간지르는 한숨처럼 동백 꽃밭 내음새 지니고 있는 네 머리털 속으로 기어들면서 모심드키 내 설움을 하나하나 심어가네나…” 같은 이상의 시구, 낮이 물러가고 점점 푸른빛 어둠이 내려앉는 산책로에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의 불빛들, 혹은 ‘로마의 휴일’에서 빛나던 오드리 헵번의 순수한 미소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우리를 매혹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그것이 담긴 공간이다.

나를 매혹시켰던 장소들이 있다. 대학들이 모여 있어 대학가를 이루고 있던 신촌이 그런 곳이었다. 어린 시절 신촌에서 멀지 않은 아현동에서 살았으나 신촌에는 고등학교 때 처음 가보았다. 물론 지금도 신촌은 젊음이 들끓고 활기가 흘러 넘치는 곳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화되어 번들거리는 요즘과는 사뭇 다른 대학의 낭만이 있었고 문화가 있었다.

나는 대입시험을 앞두고 대학교 구경이나 가자는 친구의 말에 선뜻 함께 나섰는데, 마치 가이드를 따라다니듯 그곳을 잘 아는 친구가 이끄는 대로 다녔다. 우리는 이화여대 근처에서 연세대 쪽으로 가며 두리번두리번 이런저런 구경을 하다가 홍익대가 있는 서교동까지 흘러 들어갔다. 그 친구는 강서구 어딘가에 살고 있었는데, 신촌 언저리의 대학가 분위기에 대해 마치 자기 집 어딘가를 소개해주는 듯 혹은 자신이 이룬 업적이라도 소개해 주는 듯 아주 자랑스레 그러면서도 아주 장황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런 태도가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처음 본 대학가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순순히 친구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녔다. 

서림제과가 있었던 홍익대 정문 앞의 내리막길. 이곳의 고즈넉함과 예술적 분위기에 매혹되었다.
우리는 언덕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철길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그러고도 한참을 들어가 홍익대학교 근처에 도착했다. 그곳은 지나쳐 온 다른 대학 주변과는 사뭇 다르게 무척 고즈넉했다. 즐비한 화실과 작업실, 화방들, 당시에는 드물었던 아주 작지만 분위기 있는 카페들, 골목 안쪽에 모던하고 세련된 단독주택들, 화구를 들고 다니는 학생들…. 정확한 의미도 모르면서 써먹곤 하는 ‘예술적’인 분위기가 양념이 깊숙이 배어든 음식과 같이 우리의 발이 닿는 곳 어디에서건 툭툭 튀어나왔다. 조금은 다른 나라, 다른 시간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낯섦이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니며 사람을 사로잡았다.

그날은 몹시 더운 여름의 한복판이었다. 홍익대 정문 앞에서 친구는 나를 이끌고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곳에 있는 서림제과라는 곳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아주 시원한 팥빙수를 한 그릇씩 먹었다. 나는 그 차가운 느낌과 고즈넉한 분위기에 매혹당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몇 년 후 홍익대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홍대앞은 상업건물이 골목 안쪽까지 파고들어 활기차게 돌아가며, 알 수 없는 욕망과 열기가 가득한 새로운 ‘핫 플레이스’를 만들어낸다.
# 매혹의 장소들을 추억하다

내가 매혹된 장소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동숭동, 지금은 대학로라고 불리는 곳에 원래는 서울대학교가 있었다. 나는 어릴 때 가끔 명륜동에서 종로5가 쪽으로 지나가는 버스를 타고 동숭동을 지나곤 했다. 해지고 난 후 어둑어둑해질 녘에 그곳을 지나다 보면, 버스와 평행하게 얄따란 개천이 흐르고 그 개천을 건너는 다리 근처에 노점상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이 리어카 위에 켜놓은 카바이트 불빛과 그곳 주변으로 모여든 청년들이 만드는 풍경은 무척 몽환적이었다. 그리고 그 개천 너머 고색창연한 건물이 보였다. 그곳이 서울대였다는 것을 나중에 그 대학이 1970년대 중반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머나먼’ 관악산 언저리로 옮겨지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그곳은 지금은 대학과는 상관없는 여러 가지 ‘여흥’들로 가득 들어찼다. 그러나 나와는 한 점의 관련도 없는 서울대의 추억은 나를 매혹시켰던 얇은 개천과 넓고도 깊었던 건물과 뿌연 카바이트 불빛으로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다.

장소에 대한 매혹의 기억은 안국동에서 탑골공원으로 넘어가는 길, 즉 운현궁과 천도교 수운회관이 마주 보고 있는 길로 이어진다. 지금은 운현궁이 튼실하게 잘 복원되어 있고 길도 번듯하게 포장되고 가꾸어진, 넓지만 호젓한 길이다. 이곳은 행정구역명으로는 경운동과 운니동이 마주 보고 있는 곳으로, 1980년대 초에는 실험극장이라는 작지만 무척 유명한 연극 극장이 있었다. 지금은 운현궁의 담벼락 역할을 하는 기다란 행랑이 면한 가로변에 자리했던, 아주 작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평범한 타일로 마감한 외벽에 세로로 한자로 쓰인 ‘실험극장’이라는 글자가 낱자로 하나씩 붙어 있었던 외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1975년 개관한 실험극장은 150석 규모였지만 최초로 예매제도를 도입하고, 관객 1만명 돌파의 장기 공연을 기록하는 등 소극장운동의 효시가 된 곳이다. 나는 그곳으로 ‘에쿠우스’ ‘신의 아그네스’ ‘아일랜드’ 등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연극들을 보러 가곤 했다. 그러나 1992년 운현궁 복원 계획으로 철거되고 극장은 강남 쪽으로 이전했다. 

어릴 때 본 얇은 개천과 넓고도 깊은 건물과 노점상 카바이트 불빛이 매혹적이었던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나는 어느 가을 연극을 보고 사람들과 우르르 몰려나오면서 맡았던 운니동의 공기와 그 호젓한 길의 분위기를, 지금도 문화가 풍겨내는 매혹적인 향기로 기억하고 있다. 문화란 그런 공기를 만들어내고 냄새를 만들어내며 감촉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감각은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키고 정서를 무척 풍부하게 해준다. 실험극장은 사라졌지만, 다행히 그 주변은 운현궁이 복원되어 고쳐 지어진 것과 길가 몇 개의 건물을 조금 손본 것 외에는 길의 스케일이나 색이나 밀도가 크게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다.

운현궁에서 종로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머리 위 허공에 커다란 건물이 덩실 떠 있고, 아래로 터널처럼 그늘이 잔뜩 고여 있는 길을 만나게 된다. 그 하늘에 떠 있는 성과도 같은 건물의 4층에는 허리우드극장이라는 곳이 있었다. 나는 1980년대 초에 재개봉된 ‘로미오와 줄리엣’을 그곳에서 뒤늦게 보게 되었고, 거기서 그 영화를 무려 다섯 번이나 보았다. 물론 영화도 재미있었고 여배우도 무척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 동네가 무척 좋았다. 버스를 타고 안국동에서 내려 운니동과 경운동 샛길을 걸어서 허리우드극장까지 추운 겨울을 걸어서 내려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영화보다 연극보다 그 길과 그 공간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 동네의 몰락과 낙원의 매혹

허리우드극장이 있는 낙원상가는 1969년에 도심부 재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졌지만, 도로 위에 건물이 지어진 관계로 시와 계속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다. 저층에는 상가가 있고, 중간에 커다란 테라스가 나오고, 그 위 고층부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오래된 주상복합형 건물이다. 지어질 당시에는 무척 화제가 되었지만, 이 건물 역시 세운상가처럼 금세 시들해지고 약간은 슬럼해졌다.

고등학교 때 코드 몇 개 외워서 가끔 치던 기타를 잊고 살다가 몇 년 전 아이의 특별활동 때문에 낙원상가에 갔다. 낙원상가 2층의 악기상들은 1970년대에 종로와 명동, 광화문 일대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음악인들이 일자리를 구하러 모이는 일종의 악사 인력시장을 이루면서 1980년대 후반 ‘88 서울올림픽’의 개최와 통행금지 해제 등에 힘입어 꽤 호황을 누렸다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의 심야영업시간 단축과 유흥업소 단속,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노래방 기기의 보급으로 급격히 사정이 나빠졌다. 한때의 찬란한 전성기를 보내고 이제는 물이 빠지고 풀기가 빠진 옷처럼 조금은 심드렁해진 곳이다.

낙원상가는 공간의 구성이나 복잡함이 용산에 있는 전자상가와 비슷하다. 건물의 양쪽으로 창문에 면한 곳에 점포들이 들어서 있고 그 가운데 통로에도 물건들로 담을 쌓은 점포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다만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그 물건들이 손만 대면 아름다운 소리가 은하수처럼 굽이쳐 흘러나오는 악기라는 점이 다르기도 하고 신선하기도 하다. 좁은 골목과도 같은 상가 안의 통로를 걷다 보면, 허름하게 악기를 쌓아놓은 좌판에 점원이 앉아서 기타를 연주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마치 여러 곳에서 진행되는 음악회를 멀티비전으로 한꺼번에 틀어놓은 듯 다채로운 음악들이, 무채색의 공간에 화사한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래서 나는 그곳이야말로 이름 그대로의 ‘낙원’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 있고 많은 사람들의 꿈이 있고 꺼지지 않는 열정의 불씨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악기를 잘 다루지도 못하면서, 인사동이나 종로를 지날 때 꼭 그곳을 거쳐 간다. 

음악이 있고 많은 사람들의 꿈이 있고 꺼지지 않는 열정의 불씨들이 남아있기에 낙원상가는 이름 그대로의 ‘낙원’이다.
홍대 앞에도 가끔 간다. 대학을 입학한 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작업실과 설계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졸업 후에도 사무실을 열었던 곳. 그러나 지금은 ‘홍익대 앞’이라는 지역과 위치를 가리키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의미의 고유명사 ‘홍대앞’이 되어버린 곳이다.

이미 오래전 서림제과는 패스트푸드점이 되었고, 미처 치우지 못한, 지난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놀면서 뿌리고 밟아놓은 전단과 음식물 찌꺼기들이 홍대의 아침 풍경을 뒤덮곤 한다. 화실과 화방 대신 패스트패션 숍과 카페와 술집과 클럽들이 조용한 골목길과 주택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활기차게 돌아가며, ‘예술적인 분위기’ 대신 알 수 없는 욕망과 열기로 가득한 새로운 ‘핫 플레이스’를 만들어낸다. 밤이고 낮이고 거리와 집들에 사람들이 그득하다. 지금도 홍대앞은 누군가에겐 매혹을 주겠지만 나의 매혹은 사라져버렸다.

장소에 매혹되어 찾아가지만, 결국 나를 매혹시켰던 그 온기와 냄새와 분위기는 번번이 사라진다. 대학로도 마찬가지이고 북촌, 서촌 또한 마찬가지다. 좋은 장소에 일단 사람들이 몰려들면, 자본이 따라 들어오며 그 동네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깨끗이 지워져버린다.

‘매혹적이었던’ 동네들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은 일정한 패턴이 있다. 지가가 적당히 저렴하고 사람들이 별로 모이지 않아 밀도도 적당한 어떤 동네에 예술가들이 모여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동네에 조금씩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자 그곳에 갤러리가 들어오고, 뒤를 이어 커피숍과 같은 간단한 ‘근린생활시설’들이 들어온다. 그러고는 사진기를 들고 사람들이 몰려든다. 덩달아 지가와 임차료가 상승한다. 그러면 그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들게 한, 그러나 가난한 예술가들은 자연스레 상승되는 거주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고 밀려난다. 그 자리에 돈으로 무장한 자본이 들어앉는다. 마침내 문화의 내용이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은 동네는 아주 저렴하고 유치한 곳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힘을 잃어 더 이상 작물을 키워내지 못하는 땅처럼 폐기된다. 그것은 마치 화전을 일구듯이 불을 질러 농사를 짓다가 땅의 기운이 다하면 버리고 다른 경작지를 찾는 것과도 같다.

흥청거리고 화려해지고 사람들이 몰려 들어가는 곳을 보면 나는 그런 아슬아슬함을 느낀다. 마음속 깊이 숨겨 둔 매혹의 장소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을 졸이며, 언제 또 광풍이 불어 쓸려나가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본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 ‘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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