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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80〉 신드롬

입력 : 2013-08-22 21:03:24 수정 : 2013-08-22 2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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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름’ 혹은 ‘부족함’이 ‘특별함’을 만들어내다


최근 방영이 시작된 ‘굿 닥터’라는 드라마는 젊고 잘생긴 의사를 주인공으로, 병원을 주된 배경 삼아 전개되는데, 주인공의 캐릭터가 무척 화제가 되고 있다. “어린 시절 자폐 3급과 서번트 증후군을 진단받은 천재적인 암기력과 공간지각능력, 그리고 전문가 뺨치는 그림실력의 소유자”라고 소개된 주인공은, 어린 시절 읽어본 의학서적을 정확하게 기억해내며 임상이 없음에도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서번트 증후군’ 즉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이란 자폐나 지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암기나 특정분야에서 놀랄 만한 재능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는 자폐 증세는 단순한 지적장애라기보다는, 좌뇌와 우뇌의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해 한쪽 뇌만 쓰게 됨으로써 일반인과 다른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전에 ‘레인맨’이라는 영화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 1989년에 개봉한 그 영화는 20대 시절 아주 파릇하고 잘생긴 톰 크루즈와 ‘빠삐용’, ‘졸업’ 등의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던 연기파 배우의 상징과도 같았던 더스틴 호프만이 함께 나온 작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특히 자폐 증세를 가진 형을 연기한 더스틴 호프만의 열연은 오랫동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아 가출해서 자동차 중개인으로 사는 동생 찰리 배빗(톰 크루즈)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산을 물려받을 심산으로 집을 찾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찰리 앞으로 남겨진 유산은 달랑 자동차 한 대와 장미정원뿐이었다.

빚에 시달리며 큰돈이 필요했던 찰리는 무척 실망하고, 유산의 대부분을 물려받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형 레이먼드 배빗(더스틴 호프만)을 찾는다. 그런데 형은 자폐증세가 있어 요양원에 있었고, 요양원에서는 동생에게 형을 내주지 않는다. 형이 물려받은 유산을 나누어 가지려면 형을 데리고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변호사에게 데리고 가야 했기 때문에, 찰리는 요양소 직원들 몰래 형을 데리고 나간다.

하루라도 빨리 곤궁에서 벗어나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동생은 비행기를 타고 가려고 하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형 때문에 결국 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하게 된다. 말이 형제이지 추억도 기억도 별로 없는 형제는 남보다 더 서먹하고, 행동과 생각이 어눌한 형은 찰리에게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찰리는 오로지 유산을 나눠 갖겠다는 생각만으로 꾹꾹 참고 여행을 한다.

그 영화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같이 지내면서 동생 찰리가 형 레이먼드에게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바닥에 떨어진 성냥개비의 숫자를 한눈에 알아맞히고 전화번호부를 통째로 외우는 등…. 그 역할의 실제 모델은 킴 픽(Kim Peek)이라는 사람이라는데, 그는 선천적으로 좌뇌와 우뇌를 연결하는 섬유조직의 결함으로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대신 엄청난 집중력과 기억력, 컴퓨터 몇 배의 속도를 가진 연산능력 등을 얻게 되어 그의 지식지수(KQ)는 184로 아인슈타인의 149를 상회했다고 한다. ‘다름’ 혹은 ‘부족함’이 ‘특별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BIG가 설계한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위한 호텔로 설계되었던 ‘런(Ren·人) 빌딩’. 사진 출처: http://www.big.dk
# 신드롬, 무언가를 향한 맹목적인 열망


톰 크루즈만큼, 아니 톰 크루즈보다 훨씬 잘생긴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나오는 ‘태양은 가득히’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다. 니노 로타가 작곡한 애잔한 주제곡의 선율이 잊히지 않는, 르네 클레망 감독이 1960년에 감독한 영화로, 톰 리플리라고 하는 불우한 청년에 관한 이야기다.

야심은 많지만 형편이 좋지 않은 청년 톰 리플리(알랭 들롱)는 친구 필립(모리스 로네) 아버지의 부탁으로 거금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친구를 설득하는 일을 맡는다. 그러나 필립은 프랑스 애인 마르주(마리 라포레)와 밀월을 즐기며 톰의 말을 무시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톰은 그들과 엉거주춤 어울려 지내게 된다. 세 사람은 요트 여행을 떠나는데, 필립은 톰을 친구라기보다는 하인처럼 대하며 모욕을 준다. 복수를 결심한 톰은 필립과 마르주 사이를 이간질하여 마르주를 떠나게 만든 다음, 필립을 살해하고 시신을 돛 조각에 감싸서 바다에 버린다. 이후 톰은 필립의 신분증을 위조하여 그의 행세를 하며 지내고, 자신을 의심하는 필립의 친구까지 살해한다. 그리고 필립의 애인 마르주를 유혹하여 결혼 약속까지 얻어낸다. 그러나 경찰의 의심을 사면서 점점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며, 마지막에 팔기 위해 육지로 끌어올려진 요트에서 필립의 시신이 따라 올라오며 그의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이 영화는 미국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1955)라는 소설이 원작이다. 그리고 소설과 영화의 성공 이후, 자신이 지어낸 허구에 갇혀 진실이라고 스스로 주입하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리플리 신드롬’이라고 부르게 된다. 리플리 신드롬은 성취 욕구는 강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따르지 않는 무능한 개인이 성공을 강렬하게 원할 때, 혹은 강하게 원하는 꿈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많이 발생한다. 바라는 바를 충족시킬 수 없어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다가 상습적이고 반복적인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이를 진실로 믿고 행동하게 되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학력위조가 사회적인 큰 이슈가 되었을 때, ‘리플리 신드롬’이 한창 이야기되기도 했었다.

‘신드롬(syndrome)’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는데, ‘함께’라는 의미를 가진 ‘syn’이라는 단어와 ‘달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인 ‘Dromos’의 합성어이다. 결국 묶어보면 ‘같이 달리다’라는 의미로 풀이되는데, 현대적인 의미로는 “어떤 공통성이 있는 일련의 병적 징후를 크게 아울러서 지칭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신드롬이란 질병으로 분류하지는 않지만 병적으로 엮이는, 맹목적으로 무언가를 향해 달리는 갖가지 현상들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현대 사회에는 다양한 신드롬들이 있다. 서번트 신드롬, 리플리 신드롬 외에도 스탕달 신드롬, 아트라스 신드롬, 스톡홀름 신드롬, 리마 신드롬, 리셋 신드롬, 피터팬 신드롬, 파랑새 신드롬 등…. 스탕달 신드롬은 대단한 미술품이나 기타 예술작품과 만날 때 순간적으로 느끼게 되는 각종 정신적 충동이나 분열증상이고, 아틀라스 신드롬은 완벽한 아버지나 남편의 역할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생기는 증상을 일컫는 것이다. 파랑새 신드롬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병적증세를 말하고, ‘리셋 신드롬’은 컴퓨터를 리셋하듯 현실에서도 리셋이 가능하다고 착각하여 범죄에 무감해지는 심각한 반사회적인 병리현상이다.

요즘은 아예 신드롬이란 어떤 병적 징후를 가리키는 단어라기보다 무엇인가가 대단한 열광을 몰고 온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열광하고 좋아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무엇엔가 쏠리는 것을 보고 있자면 조금 무서울 때가 있다.

BIG의 홈페이지. 그들의 작업은 각각 아이콘 혹은 픽토그램(pictogram, 그림 문자)으로 단순화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거대한 상징을 이끌어낸다.
# 피터팬처럼 치기 어린, 그러나 솔직한 BIG 건축


가수 마이클 잭슨은 2700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땅에 ‘네버랜드’라는 꿈의 공간을 꾸며놓고 아이들과 함께 지냈다. ‘네버랜드’는 동화 속의 피터 팬이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며 어린이들과 같이 살던 곳이다. 이에 대해 마이클 잭슨은 오프라 윈프리 쇼에 나와, 아주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빡빡한 춤과 노래 연습에 시달리며 빼앗긴 유년시절을 보상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피터팬 신드롬은 마이클 잭슨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심리적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상당한 규모의 산업으로 성장한 ‘키덜트 마케팅’도 같은 맥락인데, 키덜트란 어린이를 뜻하는 ‘키드’와 어른을 뜻하는 ‘어덜트’의 합성어다. 멀쩡한 성인이 인형을 곱게 안고 다니거나 미니어처나 조립하는 장난감에 빠져 지내는 등, 마치 네버랜드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소비층의 한 축을 이룬다며 열심히 연구하고 제품을 개발하는 기업들이 늘어난다. 그것을 보면 피터팬 신드롬이란 사회적인 병리현상이라기보다는 무언가 사회적인 필요 혹은 사회심리적으로 불가피한 경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며 가장 주목받고 있는 건축가 중 하나인 덴마크 건축가 비아르케 잉엘스(1973∼)는 비아이지(BIG, Bjarke Ingels Group)라는 건축사무소를 이끌고 있다. 주어진 환경과 프로그램에 대한 명쾌한 해석 능력과 실험정신, 사회적인 책임의식, 그리고 유머감각을 지닌 차세대 건축가로 평가받는 BIG는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부터 무척 야심차고 당돌하게 작업을 내놓았고 엄청난 호응을 이끌어냈다.

BIG의 작업은 아주 원색적이고 발랄하다. 뭐라고 할 수 없이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그들의 작업은 각각 아이콘 혹은 픽토그램(pictogram, 그림 문자)으로 단순화된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거대한 상징을 이끌어낸다. 프로젝트에 숨겨진 이야기를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영상이나, 그림들, 실제 이야기를 조합하는 매체로 만화를 선택해 작품집 ‘Yes is more’를 펴내기도 했다.

혁명(revolution)보다는 진화(evolution)에 관심이 있다는 그들의 작업은 묘한 방식으로 ‘진화’한다. 예를 들면,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위한 호텔로 설계되었던 ‘Ren 빌딩’은 사람 인(人)자를 형상화한 건축물로 알려졌다. 사실 이 계획은 북스웨덴의 한 호텔을 위해 만들었던 디자인 공모에서 떨어졌던 작업을 우연히 본 중국 사업가가, 그것이 사람을 가리키는 중국 글자와 비슷하다고 말한 데서 출발했다. 그래서 건물을 3배로 키우고 몇 가지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상하이 창조 주간의 전시회에 전시하고, 이는 중국의 고대 지혜와 현대 가교를 잇는 아이디어로 받아들여진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단순히 에너지를 절약한다는 식으로 일상생활을 재미없게 만드는 방식보다는, 흥미롭고 유쾌하게 삶의 질을 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에 대해 고민한다. 상하이 엑스포에 인어공주 동상을 수질이 좋은 코펜하겐의 물과 함께 옮겨가 전시한다든가, 스위스 산악 엘리베이터를 응용한 사선 엘리베이터로 연결되는 아파트 단지를 만드는 식이다.

‘마운틴(mountain)’이라는 주차 타워와 아파트 단지를 짓는 계획은 주차장을 아래로 넣고 해가 드는 위층에 아파트를 지어 정원과 대도시 광경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진 촬영은 실제 히말라야 전문 사진가에게 맡겼고, 정원의 나무들이 계속 자라면 캄보디아의 오래 된 사원처럼 건물 전체를 덮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건축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이 주어진 조건을 직설적으로 해석해서 히죽거리며 만들어놓은 그림 같은 BIG의 작업이 세상의 여기저기에 세워지는 현실은 무척 당황스럽다. 유치할 정도로 명쾌하고 단순하지만 매력적인 그들의 다이어그램은 거의 신드롬이라 불릴 정도로 건축을 배우는 스튜디오의 학생들 사이에 유행하기도 했다.

한번 생각해보았다. 그런 게 또한 시대정신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먹고 보니 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가정이 불안하고 사회가 불안하고 세계가 불안한 가운데, 마치 아이처럼 복잡한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고 제멋대로 세상을 즐기고 싶다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나보다. 근엄하고 딱딱한 이데올로기가 차지하던 자리를,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한, 유치하지만 솔직한 아이콘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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