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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79〉 사바찐

입력 : 2013-08-01 23:05:26 수정 : 2013-08-01 2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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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사변, 참혹한 역사의 기억


“천하의 여러 나라가 제왕을 일컫지 않은 나라가 없었다. 오직 우리나라만은 끝내 제왕을 일컫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못난 나라에 태어나서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느냐! 너희들은 조금도 슬퍼할 것이 없느니라.”

백호 임제(1549∼1587)라는 선비가 자식에게 남긴 유언이다. 임제는 서도병마사 부임 길에 황진이 무덤에 들러 “청초 우거진 골에…”로 시작되는 시를 지어 죽은 황진이를 위로했다가, 부임도 하기 전에 해직당했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이다. 혹자는 그를 조선 최고의 로맨티스트라고 일컫는다.

진정 기개가 있고 정신이 바로 박힌 선비라면, 늘 큰 나라의 그늘에서 눈치를 보며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지도 못했던 조국의 비루함에 그런 울분을 품을 만하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역사적으로 우리가 아는 그 많은 시인, 묵객, 학자를 통틀어도 그런 소리를 했다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뭔가 근본적으로 우리 민족의 자존감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관헌은 벽돌로 쌓은 벽체에 돌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가는 목조 기둥을 세운 발코니를 만들어 전통 건축과 서구식 건축을 혼합시킨 단층 건물이다.
(출처 ‘한국 미의 재발견-궁궐·유교건축’)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낮잡아 보고 주변의 큰 나라를 높여 보는 시선이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 만만치 않게 남아 있음을 볼 때마다, 400년 전 사람 임제의 가을 서리 같은 유언이 생각나곤 한다. 그러나 그가 통탄을 하며 세상을 뜬 1587년으로부터 정확하게 310년 후, 조선은 황제의 나라가 된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원구단으로 나아가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다. 조선이 건국하고 500년이 지난 시기에 마침내 ‘주상전하’에서 ‘황제폐하’로 격상되는 무척 역사적인 의식이었지만, 열강들 틈에서 나라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정과 관리들에게 월급도 지급하지 못하는 빈약한 재정으로 마지막 안간힘을 쓴 듯한 그 모습이 무척 안타깝고 쓸쓸하다.

그건 고종이 황제 즉위 바로 3년 전에 왕비가 일본인들에게 침소에서 무참히 살해되는 을미사변을 겪었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파천을 겪은 직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몇 년 사이에 조선의 내부 사정이나 둘러싸고 있는 주변 열강의 대결구도는 조선 왕실을 점점 더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고, 그간 우리에게 눈치를 주고 압력을 행사하던 청나라는 쇠망의 시기에 이르고 있었다. 그때 고종은 무의미한 권력의 관을 머리에 쓴 것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울분이 치밀고, 가슴에 큰 돌을 얹은 것처럼 답답해진다. 그중 가장 압권은 무관 출신인 일본인 공사 미우라의 계획 하에 일본인 낭인들이 경복궁 왕비의 침전을 무자비하게 난입한 을미사변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후에 을사늑약 등 나라가 실질적으로 망하게 되는 사건도 있었지만, 우리의 자존심을 가장 건드리는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한 나라의 수도에서 그것도 왕과 왕비가 기거하는 왕궁이 몇십 명의 왜인에 의해 그렇게 참혹하게 유린당했다는 사실과,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어떻게도 대응하지 못했던 조선정부의 무기력함에 할 말을 잃는다.

사바찐이 설계했다고 전해지는 옛 러시아공사관. 아관파천(1896년 2월∼1897년 2월)으로 고종이 피신하여 있던 곳이다. (출처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한국 최초의 외국인 건축가, 사바찐


1903년 12월3일에 기록된 조선왕조실록(고종 43권, 5번째 기사)에 의하면, 정2품 이용직이란 관료가 이런 상소를 올린다.

“오늘 관보(官報)에 기재된 바를 보니, 고영근과 노원명이 을미년 역도(逆徒) 중 한 사람인 우범선을 찔러 죽이고 일본에 잡혔습니다. 대개 우범선이 살해되었다니 시원하기는 시원합니다만, 다시금 가슴속의 피가 한층 끓어오름을 깨닫습니다. 저 흉악한 원수 놈들을 일일이 궁궐 문 앞에 잡아다 놓고 끝까지 추궁하고 엄하게 국문을 하여 법대로 죄를 다스림으로써 귀신과 사람의 분노를 풀어주지 못하고 도리어 망명한 자의 손을 빌렸단 말입니까?”

상소에 등장하는 을미년 역도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에 관련된 자를 이른다. 지금은 그 참혹한 비극의 배후에 일제가 있었음을 모두 알고 있지만, 을미년 당시 일본은 그 주도세력을 왕비의 정적인 대원군 측으로 몰아가려 했었다. 사실 사건의 배경에는 일본과 러시아라는 외세, 또 개화파와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함부로 궁궐을 습격해 감히 한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세력에는 놀랍게도 일본인 수비대나 불량배 외에 친일 개화파 측의 인물들과 폐지되기로 예정되었던 훈련대 군인 등 조선인이 섞여있었다.

그 주동자 중 하나가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이란 사람이었다. 이후 그는 다른 일본인 범인들처럼 일본정부의 비호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 무죄로 풀려난 채 일본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었다(그 아들이 우리나라 농업 발전에 기여한 우장춘 박사라는 사실은 놀라운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런 그를 조선에서 고종과 왕비의 측근으로 독립협회·만민공동회 등에서 활약하다 정치적 이유로 망명해 있던 고영근이 노원명과 함께 ‘국모보수’의 명분으로 1903년 11월 24일 암살한 후 곧바로 경찰에 자수하고, 재판을 통해 사형선고를 받는다.

고영근을 구명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돌려받자는 상소는 이후로도 이어져, 그는 1909년 국내로 송환된다. 그는 1919년 고종이 승하하여 홍릉에 묻히자, 1921년 3월 능참봉(능을 지키는 하급 관리)이 되어 무덤을 지켰고, 비문 문구의 문제로 조선총독부와 이견으로 능비가 세워지지 못하자 스스로 ‘홍릉 명성황후’라고 8글자만 새겨져 있던 비석을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로 완성하여 건립하였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파직되었고 다음해 병사했다. 고영근은 몰락해가는 왕조가 결국 지키지 못했던 나라의 자존심을 지킨 사람이다.

그런데 울분을 토하는 이용직의 상소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낯선 이름이 하나 등장한다. ‘사바진(沙婆眞·러시아식 표기로 사바찐)이란 사람의 보고서와 히로시마 재판 기록에서 을미년 역모의 진상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을미사변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 가운데는 외국인이 두 명 있었다. 그들은 그 사건을 국제사회에 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중 한 사람이 당시 왕실 시위대 부대장이었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A. S. Sabatine)이다. 사바찐이 우리나라에 22년간 머무르면서 한 일은 주로 러시아공사관·중명전·손탁호텔·정관헌·독립문 등의 굵직한 건축물을 설계한 건축가 역할이다. 또한 고종의 신임으로 왕실을 경호하는 일을 맡았고, 때문에 그는 을미사변의 현장에 있게 된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이 사바찐에게 의뢰하여 지은 독립문. (출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정동에 남긴 시간을 고요히 바라보다


사바찐은 1860년 우크라이나에 태어난 스위스계 러시아인이다. 그는 러시아 육군 유년학교 공병과 출신으로 중국 상해에서 활동을 하다가 그의 나이 23세 되던 1883년, 당시 조선정부의 총리아문 참의로 활동하던 묄렌도르프가 발탁하여 ‘영조기사’라는 직명을 받고 우리나라에 오게 된다.

그는 처음 들어올 때의 임무였던 벽돌 제조 가마 계획안이 무산되자, 인천해관의 토목기사로 근무하면서 인천해관청사와 독일의 무역회사인 세창양행 사택을 설계한다. 이후 그는 인천해관을 나와 조선정부에서 발주하는 관문각이라는 관아의 설계 및 공사총괄을 맡게 되는데, 조선 관료들과의 마찰로 공사가 부실해지면서 입지가 좁아져 다시 인천해관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곧바로 그를 좋게 보았던 고종의 발탁으로 조선정부에 고용되는데, 정작 맡은 일은 왕실 호위에 대한 일이었다. 사바찐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일본인들에게 희생될 때 비극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일본은 대원군의 음모로 몰아가려고 시도하였으나, 시위대 미국인 교관 다이 장군과 함께 현장을 목격한 사바찐의 증언으로 실패하게 된다.

이후 사바찐은 개인적인 건축 활동에 주력하게 되고,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까지 조선에 머물다가 러·일전쟁의 패망과 함께 러시아로 돌아간다.

정동은 흔히 구한말이라고 하는 조선이 망하는 시점, 일본인을 비롯한 외세가 밀려 들어오는 시점, 오랫동안 지켜오던 우리의 습관과 이별을 하던 시점들이 마치 타임캡슐에 넣어 냉동 진공 보관이라도 시킨 듯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정동에는 시간이 마치 꿀차의 바닥에 가라앉은 진득하고 달콤한 꿀처럼 고여 있다.

그리고 정동의 껍질이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도 한 장소가 바로 덕수궁이다. 덕수궁에는 수많은 역사적 시련의 기억이 있다. 서울의 다른 궁들이 그랬듯, 일제 식민정책의 하나로 놀이공원으로 격하되어 미처 원래의 지위를 되찾지 못했던 1960년대에, 덕수궁 돌담이 철로 만든 담으로 바뀌었던 적이 있었다.

네모난 철 파이프를 가로세로로 엮어서 담을 두른 덕에, 밖에서 덕수궁 안이 빤히 들여다보였고 그 사이로 머리를 디밀어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궁 안에는 겨울에는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던 연못이 있었고, 그 뒤로 인상적인 건물이 하나 보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곳이 바로 정관헌(靜觀軒)으로, 1900년에 고종이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만들어놓은 정자라고 흔히들 알고 있는 그 건물이었다. 고종은 이곳에서 다과나 연회를 열었고,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과 어진을 모신 적도 있다고 한다.

정관헌은 궁궐에 있는 전통양식의 목조건축이 아닌, 어딘가 양식풍이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양식으로 보이지는 않는 묘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왕이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지만 그 호기와는 달리 무척 쓸쓸함이 느껴지던 당시의 분위기가 담겨 있다.

덕수궁 안에 조용한 정자를 짓고, 조용히 내려다보는(靜觀) 왕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리고 덕수궁 한 귀퉁이에 이국적이며 쓸쓸한 모습으로 오도카니 자리 잡고 있는 정관헌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사바찐이다. 지금은 탑만 남아 정동 언덕에 삐쭉 솟아있는 러시아공사관(1890)도,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인 중명전(1901)도 역시 그가 설계한 건물이고, 덕수궁 석조전은 공사 감리를 맡았다 한다. 알고 보니 정동에 가서 만나고 묘한 느낌을 받았던 건물들이 모두 사바찐의 작품들이었다.

그 건물들을 생각할 때마다, 주변의 아무도 믿지 못하고 젊은 외국인 건축가에게 왕실의 주요 건물 설계뿐만 아니라 신변 안전까지 맡겨야 했던 고종의 참담한 마음이 전해진다. 사바찐 역시 재정이 부족한 왕실에서 급여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머물다 쓸쓸하게 조선을 떠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 건축가 사바찐. 건축을 전공했던 것도 아니고 부두건설과 벽돌제조 가마를 만드는 일로 시작해서, 조선이 기우는 시점에 들어와 운을 거의 같이하면서 격랑을 타고 넘으며 그가 지었던 많은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정동에 가서 그의 건물들을 만나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 약한 나라에 대한 회한과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가 느껴진다. 그리고 건축이란 결국 시간과 역사가 만드는 복합적인 풍경이고, 우리의 감정으로 파고드는 것은 그런 인자들이 주는 감흥이 아닐까 생각한다.

임형남·노은주 가온건축 공동대표·‘사람을 살리는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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