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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걷기여행] 그것이 우리네 인생이야

입력 : 2012-01-10 15:25:16 수정 : 2012-01-10 15:2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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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봉우리 사이로 하얀 빛을 뿜으며 해가 떠오른다. 일순간 온 세상이 눈 내린 것처럼 새하얗다. 해가 산봉우리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자 산과 들이 계절을 잊고 봄처럼 푸르게 빛난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계단식 들판에는 농부들이 한창 밭을 갈고 있다. 대부분 삼모작을 하는 윈난성은 겨울에도 농부들이 일손 놓고 한가하게 쉴 틈이 없다.

소나무 숲길이 이어진다. 나도 모르게 ‘아, 행복해!’ 기분 좋은 비명이 흘러나온다. 따스한 햇살을 등에 지고 폭신폭신한 숲속 오솔길을 걷는 이 맛. 산골짜기 개울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 살랑살랑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와 그 바람을 타고 전해오는 새소리에 귀가 즐겁다. 나무마다 뿜어내는 산소가 동치미를 한 사발 마신 것처럼 가슴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준다. 발걸음이 가벼워서 이건 뭐, 걷는 게 아니라 두둥실 공중을 떠가는 기분이다. 이런 길이라면 단번에 30킬로미터, 아니, 40킬로미터를 걸어도 전혀 문제없을 것 같다.

내 흡족한 기분과는 달리 걷기다 자주 멈춰 선다. 아줌마 때문이다. 아침부터 줄기차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받느라 아줌마가 바쁘다. 11월은 스토우청 여행의 비수기라더니, 연거푸 숙소 예약이 성사된다. 프랑스인 단체팀, 중국인 여행자들, 대만의 한 방송국 촬영 팀까지. 아줌마네 게스트하우스의 방 8개로는 어림도 없을 거 같다. 이만하면 대박이지 싶다. 거기에 손님들 짐 옮길 말(馬) 수배하랴, 트레킹 안내자 수배하랴, 야채와 고기 주문하랴, 아줌마는 정신이 없다. 배터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내 핸드폰을 빌려줬는데 내 핸드폰도 곧 꺼지는 거 아닌지 몰라. 지난밤 내 상태가 궁금해서 남편이 곧 전화할 텐데. 아줌마가 다시 걷기 시작하자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스토우청 제일가는 부잣집이 아줌마네죠?”
“네, 맞아요.”

어머머. 잠시 망설임도 없이 흐뭇한 미소까지 띠고 대답하는 아줌마. 그 순박한 얼굴을 보노라니 내 치기 어린 순간의 질투가 아스크림 녹듯 사르르 녹아내린다. 아줌마의 순진한 웃음이 내게도 전염됐나? 깔깔깔 웃음보가 터진다. 오솔길을 나란히 서서 걸으며 술술 대화가 이어진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아줌마가 사뭇 놀랍기도 하고 솔직히 부럽다. 술도 담배도 안 하는 성실한 남편이 있어 행복하고, 게스트하우스 하느라 신경 못쓴 두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주어 고맙고, 제법 금전적인 여유가 있을 때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기에 병수발을 무난히 할 수 있어 다행이었고, 이렇게 집을 비울 때면 아이들을 돌봐주는 시어머니가 있어 든든하고 감사하단다. 게다가 올해는 비수기를 체감하지 못할 만큼 ‘무진장 바빠서’ 정말 정말 행복하단다.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고운 마음씨를 가진 아줌마.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은 아줌마의 안목이야말로 부자가 부럽지 않다.

“어제보다 오늘 풍경이 더 아름답죠?”
“그러네요. 풍경도 좋고 공기는 더 좋고. 정말 좋아요.”
“기대하세요. 매일 매일 색다른 장관이 펼쳐질 테니까요.”

귀한 장관을 행여 놓칠세라 나는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이런 아기자기한 오솔길이 계속 됐으면 좋겠네 했더니 다시 황량한 언덕이 펼쳐진다. 굽이치는 메마른 언덕에는 나무 대신 손바닥만 한 풀이 무성하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솜이불처럼 따스하던 햇살도 따가운 뙤약볕으로 변신했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나는 “역시 윈난성이야.” 한다. ‘구름의 남쪽’이란 이름을 가진 윈난(雲南)은 한대(寒帶)부터 열대(熱帶)까지 기후대가 다양한데, 구름이 있고 없고에 따라 온도차가 상당하다. 아무리 한겨울이라도 구름 한 점 없는 날이면 윈난 대부분 지역이 봄처럼 따뜻하다.

하지만 11월의 윈난 풍경은 기후와 달리 적막하다. 삼모작하는 밭에 이제 막 씨앗을 뿌렸거나 뿌릴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풍경만 놓고 본다면 오히려 12월과 1월이 낫다.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들이 한 뼘쯤 자라 봄처럼 싱그러운 풍경이 펼쳐진다. 그걸 알면서도 11월에 여행 온 이유는 자연이 가진 것 모두를 내려놓은 ‘늦가을’을 내가 좋아하기 때문이다. 절정이 지나가고 자연이 맨얼굴을 드러내는 11월이라면, 나 또한 아무런 가식 없이 내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저 마을에서 점심 먹고 가요.”

앞서 걷던 아줌마가 뒤돌아 감상에 흠뻑 젖어 걷는 나를 깨운다. 곧 ‘롱코’라는 마을에 도착할 거란다. 롱코는 110킬로미터 트래킹 여정 중 태자관 다음으로 물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한다. 식수조차 빠듯하니 옷 빠는 것이 곤란할 정도란다.

마을에는 변변한 식당도 없다. 작은 구멍가게만 하나 있다. 아줌마와 나는 컵라면을 먹기로 했다. 원시 모계사회의 흔적이 남아서일까? 여자들은 전부 산으로 들로 일 나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가게 옆에는 일은 안 하고 대낮부터 맥주를 들이키는 나시족 아저씨들이 보인다. 가게 차양 밑에 둘러앉아 한가로이 볕을 즐기는 아저씨도 여럿이다. 물건을 사는 나와 아줌마를 웅성거리며 구경한다. 가게 앞 운동장에서 놀던 아이들까지 슬그머니 다가와 구경한다. 아이들에게 “니 하오!” 하고 인사를 건넸다. 모두 대답은 않고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그중 초등학교 2,3학년으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나시족 전통복장을 입고 있기에 “이모가 예쁘게 사진 찍어줄게.” 했더니 오만상을 찌푸린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 떨어뜨릴 기세다.

‘찍어서 내가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분명 줄게 했는데. 쟤가 왜 저러지?’ 좀 무안하다. 그런데 라면에 물 부으면서 입장 바꿔 생각해보니까 내가 좀 경솔했지 싶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 다짜고짜 다가와서 사진 찍겠다면 나라고 반가웠을까. 아이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목도 말라서 음료수 한 병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포크를 들고 라면을 먹으려는 찰나. 한 아저씨가 나시족 복장을 입은 다른 여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는 “우리 딸 예쁘게 찍어주세요.” 한다. 찍은 즉석사진을 아이에게 줬더니 뛸 듯이 좋아한다. “시에시에(고맙습니다).” 인사를 남기고 사진을 들고는 번개처럼 어디론가 뛰어간다.

잠시 후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다가오더니 라면을 먹고 있는 나를 이내 빙 둘러싼다. 사진이 찍고 싶은 모양이다. 아이들이 어떻게 말을 걸어올지 궁금해서 내심 모르는 척, 안 보이는 척 라면을 먹었다. 국물까지 다 마셔버린 동안에도 아이들은 주뼛주뼛 내 주위를 맴돌 뿐 누구도 선뜻 말을 걸지 못한다.

“으이구. 얘들아, 기회는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거야! 사진도 적극적인 사람에게만 간다구. 샹 파이짜오 더 런, 칭 파이뛔이(사진 찍고 싶은 사람, 줄을 서세요).”

내가 큰 소리로 한국어에 이어 중국어로 얘기하자,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 들고 “저요, 저요.”를 외친다. 원하는 모두에게 한 장씩 찍어줄 테니까 질서를 지켜라 다시 한 번 얘기했더니 후다닥. 순식간에 열다섯 명 남짓한 아이들이 착착 열 맞춰 줄을 섰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언제라도 참 유쾌하다.

롱코 마을을 떠나 걷는 길은 황막하다. 거대한 언덕 위에 실처럼 뻗어간 길이 이어진다. 태자관처럼 가옥 한 채 보이지 않는다. 초목이 잘 자라지 못하는 땅에서 인간이라고 잘 살리 없다. 말라비틀어진 땅을 볼 때면 애처로워 자연에도 연민이 인다. 사막의 낙타처럼 묵묵히 걷기만 한다. 아줌마도 나도 더 이상 말이 없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걷자 반가운 숲속 오솔길이 이어진다. 간만에 들려오는 우렁찬 개울물 소리에 가슴속까지 청량하다. 두 개의 작은 마을을 지나고 단양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너자 그 어느 때보다도 황량한 언덕길로 접어든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고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아줌마 말이 우리 여정 중 제일 험한 구간이란다. 오랜만에 진사강을 굽어보려는데 발아래 낭떠러지가 무서워 눈을 똑바로 뜨고 옆을 응시할 수가 없다. 주먹만한 돌을 들어 낭떠러지로 아래로 굴려 본다. 어디까지 가나. 데굴데굴 돌 굴러가는 소리가 길게 이어진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길이 미끄러워서 나는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그때마다 간담이 서늘하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선다. 번번이 아줌마가 내민 손을 잡고 위기를 모면했다.

어려운 길을 무사히 헤치고 조금 편안한 길로 들어서자 웅장한 자연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섰다. 수많은 언덕 위로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길들이 교차하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본다. 갑자기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한다. 변화무쌍한 언덕 위 길들이 마치 우리네 인생 같다. 내 지나온 서른네 해 인생 여정이 언덕 위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부침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지금의 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도, 저 길과 다르지 않으리라. 고저장단처럼 굴곡지되 결코 끊이지 않고 이어진 언덕 위 길들처럼, 내 삶에도 부침이 있고 우여곡절이 있다는 걸, 때로 그 부침과 우여곡절 중에는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도 있다는 걸, 그럼에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는 걸, 비로소 온 마음으로 받아드릴 수 있을 거 같다. 용기가 생긴다. 그게 바로 인생이니까.

여행작가 고승희(blog.naver.com/koaram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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