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양보하면 북한 버릇 못 고쳐

남북한은 ‘남북 당국회담’ 대표단은 각각 5명으로 구성하며 북한 대표단은 경의선 육로를 통해 서울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초보적인 내용만 합의했다. 당국회담의 ‘수석대표’와 ‘의제’는 합의되지 않았다. 그래서 18시간 동안의 회의 결과는 각각 다른 내용을 발표했다. 이는 하시라도 회담이 무산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출발했다는 점이다.
회담 무산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11일 남북당국회담을 목전에 두고 수석대표의 격을 싸고 기싸움을 벌이던 북한이 대표단 파견을 보류 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12일 회담은 무산됐다. 사실 실무회담 과정에서 여러 곳에서 회담 무산의 신호가 감지되었다. 회담의 격을 장관급에서 당국회담으로 변경하였다는 점, 실무회담 과정에서 명단을 통보하지 않은 점 등이다. 특히 우리가 제안한 남북당국자 회담을 북한이 수용하는 발표문에 ‘7·4발표일 공동기념행사’를 제안하고 있다. 이는 북한이 7·4 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준수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배려한 것이 아니라 ‘자주’를 빌미로 회담장을 하시라도 걷어찰 수 있다는 신호였다.
또한 북한 매체는 남북한 간 실무접촉 결과를 신속히 보도했다. 이런 현상은 북한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하지만 회담 의제 및 대표단 구성 등 남북한 간에 이견이 있다는 사실을 숨겼다. 이는 북한이 명분을 축적함으로써 남북대화가 무산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한 신호였다.
그러나 우리는 실무접촉 과정에서 얻은 성과는 ‘개성공단 정상화 문제, 금강산관광 재개문제, 이산가족 상봉’에 암묵적으로 합의했다는 점이다. 북한은 ‘6·15 및 7·4 발표일 공동기념 문제, 민간왕래와 접촉, 협력사업 추진 문제’ 등을 추가의제로 제시했다. 북한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을 협상의제로 제시함으로써 한미공조의 이간, 남남갈등의 유발, 천안함 폭침과 같은 과거 잘못된 관행과 관련한 어떤 사과도 없이 ‘당국대화’를 통해 어물쩍 전리품을 챙기겠다는 발상을 또다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이번 실무접촉과 북한이 ‘남북 당국회담’을 일방적으로 무산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어떤 기준에 따라 회담을 준비하고 의제 선정의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국제규범’에 따라 회담을 준비하고 의제를 선정하여야 한다는 교훈이다. 또한 ‘국제규범’을 어떻게 북한과의 회담에서 적용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바로 실무접촉에서 ‘수석대표’와 ‘의제’가 결정되지 않으면 다음 회담을 진척시키지 않는 과단성이 요구된다. 그리고 회담의제의 해결도 국제규범에 맞게 진행하고 이 규범이 적합하지 않으면 다음 회의로 연기하는 결단이 요구된다.
과거 북한은 남북대화의 장을 대남 전술 및 대외선전 도구로 악용해 온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지난해 12월 이후 긴장조성 국면으로 인한 국제적 고립을 이번 ‘남북 당국회담’을 통해 활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북한이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회담에 임하는 척하지만 언제라도 회담장을 박차고 나갈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하여야만 했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어떤 저의를 가지고 회담에 임하는지를 면밀히 파악하고 주도면밀하게 회담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북한의 노림수에 넘어가지 않고 우리가 바라는 소기의 회담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조영기 고려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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