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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武를 통해 본 한국문화 (17) 이소룡의 절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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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0-21 00:53:33 수정 : 2009-10-21 00: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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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하지만 강한… 武藝에 ‘물의 철학’ 입히다
한국이 광복 후 태권도를 세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중국은 절권도를 위해 노력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권도(截拳道·주먹을 저지하는 방법)는 손기술에 치중하는 반면 태권도는 발기술에 치중한다. 절권도는 이소룡 개인에 의해 창시되고 발전하였다면 태권도는 집단에 의해 발전하였다. 이소룡과 이준구는 미국에서 활동하였다는 점에서, 그리고 동양의 무예를 서양에 접목하고, 그 존재를 알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이 낳은 그랜드 마스터 이준구에 비할 수 있는 무예의 인물로 중국의 이소룡(李小龍, 1940∼1973년)을 드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그들은 단순히 몸을 움직이고 굴신하는 무예의 기술자가 아니라 철학의 소유자였다는 점에서 문화적 의미가 크다. 영춘권(詠春拳)에서 시작한 이소룡은 실전을 전제해 동양 무예의 여러 장점들을 섭취하여 결국 절권도라는 새로운 무술을 창안했다. 그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보다 훨씬 더 융성하였을 것이다. 절권도는 ‘물의 철학’을 무예에 철저하게 구현한 무술이다.물은 잡을 수도 없는, 가장 자유로운 존재이다. 도덕경(道德經)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나온다. 가장 부드럽고 유연한 가운데 가장 강하고 빠른 무술을 구사하는 절권도.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포스터.
흔히 브루스 리(Bruce Lee)로 통하는 그는 복잡다단한 중국무술을 절권도라는 단순하고 실전적인 형태로 종합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워싱턴 주립대학에 다닐 때 철학과를 다녔다는 점이다. 그는 유명한 철학자가 되지는 못하였지만 철학하는 무술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33살로 요절했다. 아직도 그를 흠모하는 인구와 절권도를 애호하는 인구는 많다. 그는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하는 무술을 창안했다.

그는 실전을 가상하지 않는 무술을 ‘조직화된 절망’ ‘마른 땅에서 수영하기’ 등으로 부르면서 ‘가짜싸움’이라고 비난하였다. 상대방을 건드리지 않고 심판의 점수에 의해 이기는 방법을 가짜라고 하였고, 전통보다는 효율을 중시하였다. 그는 장식적인 것을 모두 제하고 실용적인 기술만 남겼다. 그는 생성의 철학에 기반한 앞서가는 무예인이었다.

절권도는 결코 가슴에서 손을 떼지 않는다. 가슴을 막으면서 동선은 가장 짧게, 손을 재빠르게 쓰면서, 발차기 등 다른 기술을 가미하는데 항상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상대방의 중심을 허물면서 중심선을 공격하는 것이 특징이다. 속도감 있게 공격하는 단순성과 직접성은 폭발적이고 탐미적이기까지 하다. 영화에 나오는 그의 연속동작을 보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취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용쟁호투’(龍爭虎鬪)는 그의 출세작이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개봉하지 못하고 단편적 필름으로만 남은 ‘사망유희’(死亡遊戱)는 제목만큼이나 그의 인생을 시적으로 승화시킨다.

그가 중심으로 삼은 영춘권(Wing Chun)의 특징은 차이니스 복싱이라는 닉네임처럼 수기(手技), 손기술을 주무기로 하는 무술이다. 영춘권은 여러 속설이 있으나 청나라 시대에 엄영춘이라는 여자가 창시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춘권은 여성의 입장에서 창안된 무술인 탓인지 결코 가슴공간을 상대에게 내주지 않는다. 특히 여성 특유의 순발력을 이용한다. 영춘권의 팔과 주먹은 그래서 안으로 파고들면서 속도로 상대를 교란시키며 주도권을 잡는 방식을 택한다. 기습적으로 상대의 노출된 하단(주로 오금)을 공격하거나 걸어 넘어뜨린다.

엄영춘의 남편 양박주에 의해 점차 퍼져나간 영춘권은 그의 제자 황화보, 양이제에 의하여 광동성, 복건성 지역에서 성행하였고, 그들의 제자인 양찬은 ‘영춘권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단 4명의 제자만을 두었다. 그중 진화순(陳華順)이 길러낸 제자 중 한 사람이 ‘엽문’(葉問)이다. 중국에 공산혁명의 물결이 밀어닥치자 엽문 일파는 홍콩으로 옮겨, 영춘권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이소룡은 바로 엽문의 제자이다. 이소룡은 홍콩에서 영춘권을 중급 정도로 수련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도리어 그가 다른 무술을 종합하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소룡은 ‘절권도’를 자신을 표현하는 예술로 규정하고 영화를 통해 예술가로서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지만 안타깝게도 33살의 나이에 요절했다.
영춘권은 권법치고는 간략하면서도 위력적인 기술을 가졌으며, 이런 점에선 북파 권법인 팔극권이나 형의권과도 닮았다고 한다. ‘영춘권 펀치’라고 부르는 직권은 주먹을 꼭 쥐고, 건배하듯이 앞으로 쭉 뻗는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공격 기술이다. 이 밖에도 중심으로 들어오는 상대 팔을 손바닥으로 쳐내는 기술(박수), 상대의 팔을 잡아채 당겨 등이나 복부를 노출하게 하는 기술(렵수), 팔꿈치를 굽힌 상태로 상대의 내려치는 공격을 비트는 기술(봉수), 태권도의 얼굴막기를 낮춘 기술 같이 바깥에서 들어오는 상대 팔을 손날로 받는 기술(탄수)이 유명하다.

모든 무술의 정해진 법식을 부정한 절권도는 결국 상대방에 따라 자유자재로 대응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결국 ‘권법은 체계가 아니다’라고 선언한 그는 절권을 특정한 법식으로 보지 않는다. 일종의 탈법식의 법식인 셈이다.

절권도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영춘권의 흔적은 공방 시에 이루어지는 손기술들 중 일부와 투로(태권도로 따지면 품새) 위주의 수련 체계가 아닌 서로 간의 기술 공방 위주의 수련체계 등에서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손기술을 제외한다면 절권도는 영춘권과는 매우 다르다. 절권도는 영춘권에서 발기술을 대폭 보완한다.

절권도는 이소룡이 생전에 자신이 수련했던 태극권, 영춘권, 권투, 북소림권법, 태권도 등 모든 무술을 종합해서 만든 종합무술이며, 각종 무술에서 불필요한 동작을 걸러낸 실전무술이다. 특히 철학과 심리학, 여러 무술에 대한 체험과 분석, 각종 무술에 관련된 서적을 통해서 다듬어졌다. 그리고 1967년 세계적인 무도잡지 블랙벨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최초로 공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절권도 이 외에도 종합무술이나 실전무술은 많이 있다. 하지만 절권도는 무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절권도는 모방적인 무술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 자기만의 무술을 만들어 가는 생성적이고 창조적인 무술인 까닭에 스스로 창조해가는 무술이면서 각 개인이 자기에게 맞는 투로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도 실전에서 창조적으로 개발하며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리 훌륭한 투로를 만들었다고 해도 실전에서 지면 실패인 것이다.

절권도는 어떠한 형식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버리면 된다. 일반 무술이 한 가지의 권법에 오랜 시간을 소모하고 반복 수련을 하는 것은 크게 지양한 셈이다. 태권도를 예로 들면 태극 1장을 배우고 오랜 반복 수련을 한 다음에야 태극 2장을 배울 수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기술과 필요 없는 기술을 같이 배움으로써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린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기술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되지만 절권도는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원하는 기술이 기본적인 기술이든, 고급 기술이든 언제든지 숙달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된다.

일반 무술은 자세를 중요시 여긴다. 다리의 방향이라든가 각도, 팔의 방향이나 각도, 기타 겉으로 봤을 때 균형 있는 자세가 나오도록 수련하지만 절권도는 자세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겉으로 봤을 때 불안정한 자세라도 자신이 편하면 되는 것이고, 다리를 굽히든 펴든, 팔을 올리든 내리든 자신이 편하다고 생각하는 자세를 취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결국 개개인의 영혼에 권법을 맡겼다. 절권도는 존재의 무술이 아니라 생성의 무술이다.

◇1968년 로스앤젤레스 해변에서 시범대결을 펼치는 이소룡(왼쪽)과 이준구.
이소룡은 무술도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예술)으로 규정하고 영화를 통해 중국 무술의 진수, 나아가서는 자신의 절권도와 무예가로서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서양에 잘못 알려진 동양인에 대한 인식을 불식시키는 노력을 통해 할리우드를 점령한다. 그는 마지막 작품 사망유희를 통해 자신의 무술철학을 표현하려고 치밀하게 계획했으나 그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만약 사망유희가 개봉되었다면 하이라이트는 한국의 법주사가 될 뻔했다. 그의 유작필름을 보면 법주사와 거대한 미륵불상, 그리고 팔상전을 무대로 전개되고 있다. 크리슈나무르티를 존경했던 이소룡은 ‘무술에 자유’를 준 진정한 무술인이다. 그는 단순한 무술인이 아니라 수도자였으며 무술을 문화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중국문명을 말할 때 흔히 공자에 의해 창시된 유교를 말하는데 민중에게는 도교가 더 일반적이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의 무의식에는 도가의 정신이 흐르고 있으며 그것이 심층문화이다. 이소룡은 결국 중국문화가 그의 DNA를 통해 내려준 것을 무술에서 부활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결국 무술을 통해서도 의식의 확장과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보여준 현대 무술의 철학자이다.

이소룡은 서방세계에 중국무술, 동양무술의 존재를 알리는 첨병역할을 하였다. 그가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그것으로 인해 요절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무술인으로서의 이소룡에 대한 평가는 아직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잠정적으로 중국문명의 정신적 에센스를 뽑아 무술에 도입하여, 심신의 통합을 이룬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심신(心身)과 문무(文武)는 항상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어느 날 우리도 모르게 특정 인물, 천재적인 인물의 등장으로 하나가 되어 새로운 유형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중국의 절권도이다.

훌륭한 무예인들은 결코 크지 않다. 대체로 키는 170㎝ 전후이고, 몸무게는 60∼70㎏이다. 이소룡과 이준구는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두 사람은 또한 서로 교분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준구는 이소룡에게 족기(足技)를 가르치고 이소룡은 이준구에게 수기(手技)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소룡은 요절하고 이준구는 장수를 누리고 있다. 이소룡의 절권도는 영화에서는 성공했어도 무술체육 분야에서는 한국의 태권도에 미치지 못한다. 이소룡은 개인적으로는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지만 중국의 국가적 차원의 아이콘은 되지 못했다. 앞으로도 절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하면 태권도는 한국의 국가아이콘 1호이다. 이소룡이 아무리 성공했다고 해도 한국의 태권도에 비하면 초라하다. 왜냐하면 태권도는 현재 올림픽 종목이며 태권도 인구도 절권도에 비하면 압도적이다. 태권도는 동양이 수출한 세계 최고, 최대의 무술인 것이다. 

이소룡의 요절은 아무리 애석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무예인으로서 이소룡에게 배울 것은 많다. 무엇보다 그는 실전의, 생성의 철학에 바탕한 무예를 했다는 점이다. 그에게서 어딘가 세상의,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무예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의 신화를 계속 재생산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아마도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는 중국 도가의 정신을 더욱더 무술체육에 도입하였을 것이고, 심신을 함께 수련하는 철학으로서 절권도를 자리 잡게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소룡은 미국에 체류하던 시절인 1958년에서 1964년까지 오직 무술만을 연마했으나 1964년 롱비치 가라테 토너먼트에서 무술가였던 윌리엄 도지어(William Dozier)의 눈에 띄게 되고 출세가도를 달린다. 1964년 LA에서 가라테 챔피언 대회가 있었다. 여기에서 이준구는 이소룡과 함께 초청받아 시범대련도 함께하며 서로 친해질 수 있었다. 당시 이소룡은 24세, 이준구는 33세 때였다. 같은 유색인종이라 서로 공감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소룡은 1968년 이준구가 개최한 ‘워싱턴 국제가라테 대회’에 게스트로 참가하여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이준구와 이소룡은 서로 자신의 장기를 전수했다. 이소룡은 이준구에게 배운 발차기를 꾸준히 연마했다. 옆차기 기술을 위력적으로 발전시켜 자신의 특기로 만들었다. 영화에서도 이소룡에게 이 옆차기를 맞은 상대는 줄곧 나자빠졌다. 옆차기는 뒤차기와 뒤 후려차기 등의 발차기 기술에 비해 현란하지 않지만, 타격 속도가 빠르고 정확하면서 상대에게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위력적인 발차기다.

이준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소룡과 만난 계기가 64년에 롱비치 캘리포니아에서 열리는 가라테 시합이었는데 당시는 태권도와 가라테를 섞어서 했어요. 그때 제가 태권도 시범을 했고 이소룡은 쿵후를 했는데 서로 감동을 했죠. 저는 발을 잘 쓰고 이소룡은 주먹을 잘 쓰기 때문에 서로 같이 가르친 거죠. 서로 선생님이자 학생입니다.”

이소룡의 무술가로서의 재질에 대해서도 이준구 사범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소룡씨는 원래 타고난 체력과 재주가 있는 사람입니다. 일단 뼈의 힘이 좋아서 저는 팔굽혀펴기를 할 때 4번째 손가락으로 못하는데 이소룡은 해요. 한 손으로도 하고요. 타고난 체력이 우리와 다르더라고요. 또 어렸을 때부터 배우를 했기 때문에 연기가 탁월하고 이소룡의 소개 덕분에 홍콩에 가서 영화를 하나 했습니다.”

무술(marshall art)은 기술 수준이 올라가면 어느 새 예술이 된다. 모든 기술은 정점에 이르거나 꽃을 피우면 결국 예술적 형태를 띤다. 그런 점에서 이소룡과 이준구는 둘 다 예술가적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이소룡과 이준구는 서로 아끼는 사이다. 그래서 이준구는 항상 이소룡에게 ‘운전 조심하라’ ‘여자 조심하라’고 했다고 한다. 이준구는 이소룡이 죽기 전날에도 통화했다고 한다. 이소룡이 너무 영화촬영에 매달리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것은 동료 무술인으로서 그를 대한 까닭이다.

이소룡은 죽기 전 BBC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는 ‘중국 무술인’으로 묶이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이미 세계인이었다. 여기서 세계인이라는 말은 자유인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는 그의 무술과 무술철학을 세계인, 세계의 관객에게 전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화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영화에서도 모든 결투에 이유를 붙였다. 폭력을 위한 폭력을 결코 하지 않았다.

그의 철학을 묻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마음을 비우라.”

“물과 같이 어떤 형체도 갖지 말라.”

“컵에 물을 넣으면 물이 컵이 되고, 병에 물을 넣으면 물이 병이 되고, 주전자에 물을 넣으면 물이 주전자가 된다.”

“물이 되게 친구….”

그가 남긴 말의 여운은 오늘도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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