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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⑬임진왜란 후 韓·日문화 선후 바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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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8-19 10:51:08 수정 : 2009-08-19 10: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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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사무라이, 조선의 선비를 누르다
‘문(文)의 나라’는 무(武)를 등한시하기 쉬운데 ‘무(武)의 나라’는 문(文)을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무(武)만으로 내치(內治)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외화내빈의 문치의 나라가 역사적으로 불리할 경우가 많다. 무(武)라는 것은 물질과 신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실용적이 되기 쉽고 문(文)은 관념적이 되기 쉽다. 더군다나 자칫하면 문은 사대적이 되기 쉽다. 전쟁은 흔히 나라의 흥망과 함께 문화의 선후 자리를 바꾸게 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이라는 야만은 역설적이게도 문화를 가장 대량으로 이동시키고 문화능력을 향상시키고 전도시키는 요술을 부리는 셈이다. 우리 조상은 고대에서 중세까지, 더 정확하게는 임진왜란 전후까지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수한 나라였다. 일제를 거쳐 오늘날 우리는 일본보다 여러 면에서 후진국이다. 선진문화를 배우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면 그것을 배워서 토착화하여야 한다. 그저 선진문화를 도입해서 향수만 하고 자가(自家) 생산을 하지 못한다면 소비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문화소비국이 되면 저절로 사대하게 된다.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래서 이중성이 있다. 문화능력을 키우는 데는 교류가 중요하지만 동시에 문화 종속을 당할 위험도 있다. 문화는 서로 대등하게 주고받을 때에 대등한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말로만 동반자 관계, 대등외교라고 하는 것은 괜한 공치사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 일본에서는 전국을 통일한 최고의 영웅으로 섬김을 받는다.
한국은 말의 허장성세가 심한 반면 일본은 겸손하고 착실하다. 일본은 형식과 내용을 잘 갖추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내용보다 형식이 요란하다. 문질(文質·바탕과 문채)이 균형을 잡지 못한 까닭이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시대에 걸맞은 예의(禮義)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어딘가 혼란스럽다. 이에 비애 일본은 잘 정돈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사무라이 정신의 나라인 일본인은 예의범절에서도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것을 흔히 속과 겉이 다르고 이중적이라고 매도하는데 이는 괜한 열등감이다. 대외적으로 남의 나라를 공격하면서도 대내적으로 예의와 문물이 정비되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은 인문적 축적과 교양을 넓히는 데서도 성공했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선비정신은 무(武)와 과학정신을 기르는 데에 등한하다. 한국의 문(文)은 아직도 당쟁에 여념이 없다. 당쟁을 붕당이니, 학파니, 정당이니 하면서 변명하려 하지만 사회 곳곳에서 다양성이라고 하기에는 불안할 정도로 집단이기, 당리당략에 집착하고 있다. 현재를 통해서 도리어 옛날을 짐작케 한다.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은 문화적으론 일본을 압도했다. 일본은 임란 때 도공(陶工)은 물론이고 유불경서(儒佛經書), 각종 문화재와 전적들을 모조리 훑어 갔다. 비록 임란에서 조선이 패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본은 문화적으로 커다란 소득을 얻고 조선과의 문화적 역전의 도약판을 만든다. 그래서 임란을 문화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임란 후에 일본의 권력을 잡은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화친을 요구해오자 양국은 다시 평화 시대를 맞이하는데, 조선통신사는 대량으로 문물을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 통신사는 순조 11년(1811) 최후의 통신사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아마도 근대화에 앞섰던 일본은 서구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자 통신사를 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통신사가 타고 갔던 배는 그야말로 ‘평화의 배’였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에 통신사라는 평화사절을 보냈던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한민족의 성웅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드물게 문무겸전의 인물이었으며 세계 해전사에서도 손꼽히는 해전의 영웅이다.
그 후 일제침략도 임란의 연장선상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국력이 강해지면 항상 조선을 침략하였는데 유라시아 대륙 동단의 섬나라인 일본은 대륙 진출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조선왕조가 임란을 기점으로 역성혁명이 일어나거나 어떤 형태로든 바뀌어야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신라 1000년, 고려 500년은 몰라도, 근세에 들어 조선의 경우 한 왕조가 500년을 간다는 것은 여러 모로 시대에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평화나 전쟁은 항상 근린국가 사이에 벌어지는 다반사이다.

지나간 역사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지나갈 역(歷)자의 역사(歷史)이다. 조선조는 주자학적 도그마에 빠져 문화의 역동성이 없었던 것을 어찌하랴. 일본은 지금 문화의 문무에서 세계 최고를 구가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문화능력은 미국 다음의 세계 2위이고, 어쩌면 미국보다도 문화의 균형 면에서는 더 잘 다듬어진지 모른다. 우리는 일본을 실제보다 항상 왜소하게 보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신을 항상 크게 보는 과대망상과 대조적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서 대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일본은 비록 태평양전쟁에서 패전국이 되었지만 그 문화적 역량은 없어지지 않아 한국전쟁을 발판으로 단시일에 선진국으로 도약하였다. ‘일본의 무(武)’가 결국 오늘의 ‘일본의 문(文)’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문(文)은 현재 종교와 철학, 과학 등에서 완전히 자신의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를 가지고 있다. 일본의 국력은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전체가 포함되어 있는 유럽연합(EU)이라는 경제블록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유일한 ‘한 국가의 블록’이다. 말하자면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의 국가이다. 미국에 비해 국가의 물리적 크기와 인구가 적지만 문화적 저력과 질서, 전통, 예절, 전문성, 합리성의 측면에서 미국에 지지 않는 나라이다. 말하자면 거의 완벽에 가까운 나라이다.

물론 그 완벽에 가까운 나라의 치명적 약점이 있기는 하다. 그것이 군국주의라는 것이지만, 그것은 일본인의 삶에서 ‘집단주의(국가주의)’와 ‘죽음의 미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본이 왜 국가는 부자인데 국민은 가난하고, 역대 총리들이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며, 조그만 스쳐도 ‘스미마센(미안합니다)’ 하면서 소위 ‘미안(未安) 거리’를 지키는가, 그 이면을 살펴보자. 군국주의는 일본문화의 함정이지만 한국문화의 평화주의의 함정보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문화능력이 모자라는 평화주의는 바로 침략을 당하는 내부 원리가 되기 때문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받았음에도 전후 통신사를 보내 양국의 평화증진과 문물교류에 힘썼다.
일본의 근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완성되어 있다. 그러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말은 세계적으로 이상적인 것들을 다 들여왔지만 실은 아직도 완성된 것이 없다. 말의 성찬이다. 우리가 말만 하면 섬기는 민주주의조차도 그렇다. 한국은 오늘날 세계 종교의 백화점과 같다. 한국에서는 어떤 종교도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한국만큼 성한 나라는 없다. 기독교뿐만 아니다. 불교, 유교, 기독교 등 외래종교는 본국에서 도로 의식을 수입해 갈 정도이다. 이것이 한국문화, 한국 선비문화의 맹점인 주체성 없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을 한국문화의 난자적(卵子的) 특성이라고까지 말한다. 지배를 당하는 여성적 특성을 이르는 것이다.

일본은 근대에 들어 종교적으로도 노리나가가쿠(宣長學)가 신도(神道)로 모든 이데올로기를 다 포용하면서 ‘그것은 모두 그때의 신도’라고 결론내림으로써 근대적 자주국가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를 완성하게 된다. 물론 신도는 나중에 일본 군국주의를 뒷받침하게 되어 일본 패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한 패망은 미국과의 패권경쟁에서 비롯된 것이지 신도 자체의 패망은 아니었다. 신도는 ‘마음(心)의 바깥에 다른 신(神)이 없으며 다른 이치(理)도 없다’, ‘인격신을 말하고 있더라도 그것은 비인격적인 이(理)와 연속적으로 파악되고 있다’는 말로써 동서양 문화를 통합하여 자연스럽게 근대에 진입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종교인 신도를 세계적인 종교로 생각하고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일본의 고학(古學)은 전반적으로 주자학의 관념성을 탈피하기 위해 고전의 원래 뜻을 되살리고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을 동심원적 확대로 보지 않고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일본이 국가주의적 정치와 종교적 주체성을 확립한 것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전략의 일환으로 창안된 이데올로기인 좌익과 우익에 의해 국가가 동요되거나 농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를 위해 좌익과 우익이 서구에서와 같이 함께 기여하도록 하는 기반을 완성한 셈이었다.

아시다시피 일본은 근대화 과정에서 리가쿠(理學·주쯔), 고지가쿠(古義學·진사이), 그리고 고분지가쿠(古文義學·소라이), 노리나가가쿠를 거쳐 국학(國學)을 완성함으로써 근대적 국가를 완성했다. 여기서 전반적으로 고학은 일종의 주자학에 대한 반론을 펴기 위한 것이었는데, 합리적인 천도(天道)는 비합리적인 천명(天命)으로 대체되었고 궁리(窮理)는 능력 면에서 성인과 일반인이 구별이 되게 되었다. 규범과 자연의 연속성은 끊어졌으며 주자학적 엄격주의를 폐기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와 수신제가(修身齊家)도 서로 독립적인 것으로 나누어졌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유명 해전은 한산도·노량·명량대첩 등이 있는데, 특히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 후 참가한 마지막 전쟁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주자학에 대해 퇴계 선생이 베푼 학문적 시혜를 자랑하지만 일본은 주자학의 궁리(窮理)의 제한된 성격은 ‘사람의 길’을 ‘하늘의 길’로부터 분리시켰다. 이것은 성인(聖人)에 대해서 조상신을 대치시킨 노리나가가쿠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노리나가가쿠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 주자학 및 불교, 노장사상의 형이상학적 범주-음양오행, 인과응보-였다. 일본의 고학은 일반적으로 자연과학적 인식을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길을 열어주었다. 일본 고학의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은 맹목적으로 공맹(孔孟)에 의존한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근대 과학문명의 대세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 일본에 순자학(荀子學)이 성행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국은 유학에서 관념과 도덕만 받아들인 성향이 강하였던 데 반해 일본은 실용을 추출해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일본의 근대화는 주자학 대신에 과학을 도입함으로써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사무라이의 나라라고 해서 인문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본이 과학의 나라라고 해서 도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일본은 근대에 들어 중세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서 종교와 과학을 동시에 주체적으로 만든 나라이다.

일본은 근대사 초기에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서 동양 속의 서양처럼 행세했다. 그리고 제국의 대열에 끼었다. 그러한 위세는 태평양전쟁의 패전국에 잠시 주춤했지만 지금 소위 G7(주요 7개국) 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문을 숭상하면서 밖으로 사대주의를 하면서 안으로 말싸움만 하였다면 이는 문(文)도 아니다. 문(文)이 무(武), 즉 과학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면 문(文)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서로 피드백하면서 상대를 발전시켜야 한다.

무(武)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문화의 건전성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조선조 주자학은 그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형식과 위선으로 흘러 당쟁과 사화의 명분이 된 것이 문제이다. 당쟁은 마침내 사람을 위해 예(禮)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를 위해 사람이 사는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는 지경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우리의 역대 왕들을 보면 문(文)을 내세우는 왕 중에 종종 문(文)을 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무(武)가 문(文)의 기초임을 모르는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무(武)를 무시하는 통치자는 반드시 문(文)도 제대로 못하면서 문과 무를 갈라놓는다. 이것은 오늘날도 계속되어 무(武)와 민(民)을 갈라놓고 스스로를 문민(文民)이라고 호도하면서 나라를 결국 망치게 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무(武)를 문화에서 갈라놓고 문(文)의 아래에 두는 못된 버릇을 고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이나 강대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문(文)은 선진국이 되지 않는 한 사대주의에 빠질 위험을 안고 있다. 문화적으로 보면 큰 나라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나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습관적으로 계속하다 보면 자주성을 잃게 된다. 그래서 선진을 향한 추월과 역전의 기회를 노려야 한다. 한국문화가 언제부터, 왜, 무(武)를 천시하고 실천력과 자주성을 잃고 세계사에서 침략을 받은 나라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지금도 평화주의자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선진이니 세계화니 하면서 자기만족, 자기위선에 빠져 있으니 사대주의를 극복할 길이 없다.

사대주의는 그것 자체도 병폐이지만, 문화의 균형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문화의 최대 적이다. 사대적 숭문은 오늘에도 여전하여 스스로의 위치와 입장을 잃어버리고 남의 나라 풍경을 자신의 풍경으로 그리는 관념산수적(觀念山水的) 맹종과 외래 이데올로기의 ‘정쟁(政爭) 도구화’로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게 하고 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것이 소위 군사정권이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나라가 망해도 목숨을 버리는 선비가 없는 것은 그 문화가 심각한 마비와 허위에 빠져 있다는 신호이다. 언제나 학생과 노동자만 희생의 제물이 되고 있다. 현재 우리 문화는 공적(公的) 공간들은 모두 사적(私的) 공간으로 변해 당파주의와 집단이기주의에 무너지고 있다. 이것이 위기이다.

한국문화의 치명적 약점은 모본(母本)이 드물다는 점이다. 세계에 내놓고 ‘이것은 우리 것이야!’라고 큰소리칠 만한 것이 드물다. 사본(寫本)만 즐비하다. 물론 사본도 만들 줄 알아야 모본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본을 계속 사용하다 보면 사본이 자기의 모본인 것처럼 착각하는 버릇이 들게 된다. 세계가 모본에 막대한 로열티를 주는 것은 그만큼 모본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국력도 사본에 머물 것이 아니라 모본을 생산하는 데에 주력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문화의 주체화이다. 문화가 결국 프로그램이라면 우리의 프로그램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것이 바로 국력이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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