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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⑩ 붓의 문화, 칼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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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7-02 11:53:22 수정 : 2009-07-02 11: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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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 vs 무사정신 韓·日을 지배하다
흔히 한국과 일본의 사이를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표현한다. 또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차이를 ‘문(文)의 문화’, ‘무(武)의 문화’ ‘문사(文士)의 나라’, ‘무사(武士)의 나라’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화의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상대적이다. 선비정신이 강하냐, 무사정신이 강하냐는 따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무사의 경우 승패에서 지면 바로 목숨을 내놓거나 승복하여야 하는데 선비는 그렇지 않아도 된다. 선비의 경우 승패가 분명하지도 않거니와 패한 경우에도 승복하지 않아도 목숨이 달아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대사를 개척하거나 전개한 지배민족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가야, 백제 등 한민족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일본 일왕이 직접 천황가의 조상에 대해 한반도 이주설을 언급한 적도 있다.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옛 간무(桓武·재위 781∼806)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되어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야는 백제보다 먼저 일본 고대사에 관계한 것으로 보는 학자도 적지 않다. 일본으로 넘어간 김해 대성동고분군 세력이 일본 서기(書記)의 신공 황후, 15세 응신(應神) 천황, 16세 인덕(仁德) 천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선비문화의 조선에서도 칼은 왕의 상징이었다. 군복을 입은 어진도(왕의 초상화)로서는 철종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한일관계사에서 고대사의 문화적 시혜를 가지고 한국이 우월감을 갖는다는 것은 차라리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날은 분명히 일본보다 한국이 몇십 년은 뒤처져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선비정신과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이 극명하게 갈린 것은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일본의 사무라이정신과 한국의 선비정신은 대체로 15∼17세기를 전후하여 완성되었으며, 이에 따라 양국의 운명이 극명하게 갈린다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려 광종에서 시작한 과거제의 도입은 인재의 등용에 공평을 기한 점에서는 문화적 진전이지만, 그것으로 인해 사서삼경 등 경전공부는 많이 하였지만 무(武)에 대한 멸시가 일어나게 된다. 과거시험 이전까지는 문무가 차별적으로 구분되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무신으로 알고 있는 고려 초기의 서희, 강감찬, 윤관은 본래 문신이다. 문신이지만 군사전략이나 작전 같은 기본교양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고려 무신정권은 100여년간(의종 24년·1170∼1270·원종 11년) 지속하였으나 대몽항쟁을 주도하던 최씨 무신정권이 강화도로 옮겨가서 7차에 걸친 몽골과의 전쟁을 계속한다. 이 과정에서 외세를 이용하여 문신들의 복권을 기도한 주화파에 의해 무신정권은 망하게 된다. 문신들이 선진문화를 이유로 사대주의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이때 고착된다. 문신들의 멸시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무신정권은 대몽항쟁을 통해 자주성을 높인 점도 있지만, 정권 유지를 위해 많은 문신을 죽이고 백성을 수탈하고 국정을 황폐화하여 부정적인 면을 보였다. 이에 비해 일본의 막부, 즉 쇼군정치는 12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민심을 얻으면서 근대에까지 계속된다. 쇼군은 비록 왕이 되지는 않았지만 일본 정신의 전범과 일본의 사회구조 정립, 그리고 통치의 일본적 패턴을 완성하였다. 그래서 사무라이정신은 일본 정신으로 대변된다.

한국인의 무(武)에 대한 멸시는 나라의 인재들을 문과의 과거시험에만 매달리게 하고 공리공론과 당파적 붕당을 초래하게 한다. 선비들의 논쟁은 자체적으로 생산적인 토론을 불러오기보다는 외국(중국)에서 가져온 사상과 기술에 대한 줄서기에 불과한 점이 많았다. 사대파가 자주파를 이기는 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심지어는 누가 자주파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무반세력은 생래적으로 자주파이고 문반세력이 사대외세파인 경우가 많다. 문과 무의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결국 문은 당파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 사필귀정이다. 본래 문(文)은 세워진 나라를 다스릴 수는 있어도 나라를 세울 수 없다. 또 문(文)만 가지고 한 나라의 독립이 보장되지 않는다. 이 말은 무력이 없으면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에도시대의 일본 갑주. 이것은 실전용이 아니라 장식용이다(경인미술관 소장).
나라를 세우는 것에 버금가는 혁명이 문신(文臣)에 의해 성공한 예는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 한 예로 최근세사에서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실패한 것은 그가 문신이기 때문이다. 손문이 중국혁명에 실패한 것도 실은 그가 문사이기 때문이다. ‘문(文) 숭상의 나라’는 겉으로는 평화적이고 문화선진국처럼 보이지만 실은 약육강식의 국제질서 속에서는 항상 침략과 지배를 당하기 쉽다. 더욱이 문 숭상이라는 것은 지배당한 민족의 사대적 자위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하면 큰 나라에 지배당하였기 때문에 문을 숭상하고, 지배당한 결과가 문 숭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한국인은 이러한 해석을 싫어하고 외면한다. 외세 무력에 의해 식민지가 된 아픈 경험이 있으면서도 여전히 무(武)를 싫어하는데 이는 사대주의가 체질화된 때문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것은 자신의 힘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구한말 나라의 힘이 없으면서도 외세를 조종하여 독립과 정권을 유지하려 하다가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에서 ‘생존의 미학’과 ‘죽음의 미학’은 문무에 못지않게 두 문화를 구분 짓는 개념이다. 한국의 속담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사무라이의 할복(割腹)에서 보듯이 죽음을 미화하는 버릇이 있다. 록히드 뇌물사건 때에 다나카 전 총리가 구속되어 궁지에 몰리자 수사 대상에 떠오른 그의 비서가 연이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뇌물수수를 은폐하기 위해 자살하는 것은 탐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은 자신이 모시던 상사(이를 주군이라고 할 수 있다)가 위기에 몰리면 부하(가신)가 자살하는 전통과 신뢰의 경험들이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일본식 해결방법, 미덕이기도 하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경우 구한말, 1910년 일제의 강제병탄이 일어나도 책임지는 신하도, 자살하는 선비도 드물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1855∼1910년 9월 7일)이 아니었으면 참으로 얼굴을 들기 어려울 뻔했다. 그는 강제병탄 일주일 후 절명시를 남기고 구례의 집에서 음독했다. 을사보호조약 때는 시종무관장이던 민영환(閔泳煥·1861∼1905년 11월 30일)이 자결하여 부끄러움을 겨우 면했다. 나라를 잃고도 책임을 지는 관리나 지식인이 부족했다. 사육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임금에 대한 도전은 목숨을 걸고 하였는데, 외세에 나라가 망하는 데에 목숨을 건 경우는 드물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실패한 것을 300여년 뒤에 성공하게 된다. 대내적 투쟁은 치열하지만 대외적 항쟁은 취약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임금에게 목숨 걸고 직언하고 의병장이 된 선비들도 적지 않았지만 구한말에는 나라가 망하려니까 인의(仁義)를 실천하는 자는 드물었다.

선비는 본래 선행기언(先行其言: 말보다 실천을 먼저 한다)하는 게 원칙이지만 말을 먼저 하다 보면 문약(文弱)에 흐르기 쉽다. 무(武)의 결단력이 없으면 선비정신도 완성되지 못한다. 반대로 문(文)의 인내력이 없으면 무단(武斷)에 흐르기 쉽다. 한국과 일본은 서로 반면교사가 되면 좋을 것이다. 한국의 경우 외래 이데올로기에 대해 너무 순종적이고 때로는 맹목적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자랑삼아 말하기도 한다.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주의를 찾으려면 한국에 와야 한다.”

선진 문물을 재빨리 받아들이고 이를 토착화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해외 학맥이나 학파들이 학문의 발전을 위하기보다는 도리어 나라를 당파로 온통 뒤흔들어 놓는 수도 있다. 과학의 시대에 학파·학맥의 동종교배는 한국 문화의 발전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특정 학파의 권력 독점은 결국 학문보다는 정치 과잉으로 전문화의 부재와 기초연구의 부실로 이어져 사회 곳곳을 병들게 한다. 한국사회의 문제점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소위 지식인들과 권력 엘리트들의 당파성과 학문의 도그마화일 것이다. 정치는 많은데 정작 정치는 없다. 이는 대개 상무정신의 결여와 연결된다. 우리 민족은 차라리 무반이 더 힘을 쓸 때 도리어 문무균형을 이루는 특성을 보인다.

◇(왼쪽)어진도와 거의 같은 모양의 조선 시대 어도(경인미술관 소장).◇(오른쪽)잡귀를 물리친다고 하여 선비들도 인검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인검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28수 별자리와 검결이 새겨져 있다(고려대 박물관 소장).
조선 중후기로 오면서 주자학의 명분론이 우세해지면서 문무균형은 다시 문반 쪽으로 기운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맞게 되고 7년간 전화에 시달리게 된다.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에서 계속 전쟁을 걸어오는 것은 역시 약하게 보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를 흔히 인류학자들은 우뇌좌파형 문화라고 한다. 우뇌는 감정적임을 나타내고 좌파는 반체제적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감정은 풍부하고 인정은 많은데 삶은 반골이 많다는 뜻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수많은 외침을 받은 탓도 있지만 평소에 권력 엘리트들이 백성을 수탈하여 권력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또다시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자기모순과 배반에 빠진다.

집단 무의식으로 한국 문화를 보면 다분히 여성적이고 모성적이다. 이것은 한국 특유의 ‘생존의 미학(철학)’과 결부된다. 생존의 미학은 멀게는 고대의 정기신(精氣神)의 기철학적 전통과 관련을 맺는다. 이것은 권력에 도전하는 가부장적·국가적·남성적 의미의 이(理)와 달리 모성적·족벌적·여성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사회적으로 지배자의 위치에 서는 것보다 권력에 저항하는 반체제적인 양상을 보인다. 외침에 대해서도 저항하기도 하지만, 정권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하는 재야·민중세력들이 항존하고 있는 나라이다. 크게 보면 안으로 저항하고 밖으로 사대하는 것은 고질이다.

일본에서는 집단 전체는 가부장적이고 개인에겐 ‘죽음의 미학’을 강요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집단 전체는 모성적이고 개인에겐 오히려 ‘생존의 미학’을 가르친다. 일본 사람은 매우 집단적이고 한국인은 개인적이다. 일본 사람은 집단적 위계와 충(忠)에 의해 살지만, 한국인은 개인적 연줄이나 효(孝) 그리고 사회적 인정(人情)에 의해 산다. 연줄이나 인정이라는 것은 실은 마을사회의 덕목이다. 이러한 마을사회의 덕목이 마을사회를 넘어서면 법(法)과 규칙을 무시하고, 사적(私的) 네트워크에 의해 공적인 부문을 사유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당파이다. 이런 경향을 싸잡아 여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적 네트워크에 의한 당파는 사회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의 명분 뒤엔 바로 당파가 숨어 있다.

생존의 미학은 다분히 이(理)보다는 기(氣)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삶의 철학이다. 기철학은 쉽게 말하면 물이 많으면 물길이 저절로 생긴다는 자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때의 물은 기(氣)이고 물길은 이(理)이다. 말하자면 이(理)는 부차적이다. 이는 노장(老莊)철학적 도(道), 혹은 불교의 원융이나 반야사상 등과 긴밀한 내적 관련을 맺고 있다. 이것은 집단적으로는 평화주의를, 권력적으로는 여성주의를, 환경적으로는 자연주의를 표방하게 하였다. 우리 민족의 기(氣)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그 반대가 되는 이(理)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인 퇴계 이황 선생은 한국에서 태어났다. 퇴계 선생의 ‘경’(敬)철학은 일본에 건너가서 꽃을 피웠다. 일본 사무라이정신은 실은 바로 경철학에 의해 근대적 의미로 완성되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한국의 풍류도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무사도가 되었다는 주장과 백제의 무사조직인 ‘싸울아비’가 일본으로 건너가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때 항몽(抗蒙) 전쟁을 끝까지 벌이던 삼별초 가운데 증발한 주력부대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무사도를 발전시켰다는 설도 있다. 혹시 상무정신을 우리는 일본에 전해주고 잊어버렸는데 일본은 가진 것이 아닌가. 앞으로 더욱 연구가 필요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때로는 적대감으로 바라보는 일본의 사무라이정신이 실은 한국문화와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흔히 2차세계대전 때 악명이 높았던 가미카제(神風)의 무사정신은 고대의 우리 문화와 혈연성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한국의 선비정신은 문약(文弱)으로 흐르고, 일본의 무사정신은 무단(武斷)으로 흐른 것이 구한말 조선과 일본, 양국의 식민과 지배, 그리고 일본의 패망으로 얼룩진 역사를 연출하였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둘 다 문무균형이라는 문화의 대법칙을 위반하였던 셈이다.

일본의 사무라이는 귀족출신인 무사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더 정확하게는 12세기 후반 무가(武家)정권을 세운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한 무사계급을 지칭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들은 극기주의라는 절도 있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에는 ‘선(禪)불교’가 사무라이정신을 더욱 세련되게 하는 데에 일조한다. 무사들이 불명예나 패배를 당했을 때 할복을 택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일본의 무사계급은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 초기까지 대체로 인구의 10% 정도였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도쿠가와 막부의 250년간 평화로 인해 사무라이들은 2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무술을 사용할 기회가 없어서 관리가 되거나 다른 생업을 가져야만 했다. 이 기간에 우리의 선비정신과 같은 ‘하가쿠레’(葉隱)사상이 완성된다. 하가쿠레는 효(孝), 의(義), 명예, 극기 등의 내용도 있지만 ‘무사도는 죽는 것이다’라는 ‘죽음의 미학’을 내재하고 있다.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1871년 봉건제도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을 때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지위도 상실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출신들은 1870년대에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새로 창설된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다.

일본 무사계급은 자신들끼리 권력을 다투었지만 결코 왕권을 넘겨다 보지는 않았다. 이것은 근대화의 초기에 다시 왕정복귀가 이루어지게 하였으며 일본으로 하여금 입헌군주국이 되게 하였다. 메이지유신이라는 것도 이것의 산물이다.

일본에서 천황은 신과 같은 존재이다. 일본은 천황이 있으면 아무리 피폐하게 되어도 다시 살아나는 민족이다. 사무라이정신은 다도(茶道)·꽃꽂이와 함께 일본 고유 문화예술로 자리 잡는다. 사무라이정신은 이제 계급의 의미는 사라지고 일본 정신, 혹은 일본 엘리트의 정신으로 변신하여 “어떤 한 가지 일에 목숨을 걸고(장인정신) 죽음으로 스스로 명예를 지키는 정신(할복)으로 남아 있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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