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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 무맥] 얕잡아 보던 倭의 검술 익혀 ‘민족 무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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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7-02 11:52:45 수정 : 2009-07-02 11: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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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왜검, 그리고 일본의 무사도
‘무예도보통지’의 십팔기(十八技)에서 조선 이외의 나라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왜검(倭劍)’의 일본이다. 임진왜란을 겪은 조선은 이제까지 무시했던 왜의 검술을 제대로 연구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숙종 때 군교(軍校) 김체건(金體乾)은 사신을 따라 일본에 들어가 검보(劍譜)를 구해 와서 검술을 익혔다. 여기에 교전보(交戰譜)를 만들어 추가했다. 이는 왜의 것을 우리 것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왜검은 우리가 필요해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무예이다. 이는 일제 때 이식된‘검도(劍道)’와는 입장이 다르다. 김체건은 숙종 앞에서 무예를 시험하였는데 검술의 능수능란함은 물론, 나중에는 엄지손가락으로 거꾸로 서서 걸었다. 그의 무예는 아들 김광택(金光澤)에게 전수되었고, 김광택은 다시 정조 때 백동수(白東脩)에게 전해져서 ‘무예도보통지’에 들어가게 된다. 그가 실기를 시범하여 민족무예의 전범을 남기게 된다. 왜보(倭譜)는 대개 네 종류가 있다. 토유류(土由流), 운광류(運光流), 천류류(千柳流), 유피류(柳彼流)가 그것이다. 이 중 유피류는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토착된 검술로 검(劍)의 기법인 찌르기보다는 도(刀)의 베기 위주의 살상력(殺傷力)을 중시하는 기술이다. 대륙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이 있으나 그 구체적인 경로를 확인할 수 없다. 주로 산속에서 수련하는 무사(野武士)들과 낭인무사들이 구사하여 체계가 없는 구전형태의 검술이지만 어떤 형보다 실전에 강하고 위력적인 고검술(古劍術)의 유파이다.

◇패도와 소도와 자도를 지닌 전형적인 일본 무사의 모습.
일본도(日本刀)는 크기와 길이가 한결같지 않다. 사람마다 한 자루의 장도(長刀)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패도(佩刀)라고 한다. 그 도(刀) 위에 소도(小刀)를 끼워서 편리하게 필요에 따라 쓴다. 또 자도(刺刀)라는 것이 있는데 길이가 한 척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고 길이가 한 척 남짓한 것을 급발(急拔)이라 한다. 이 세 가지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적절하게 쓴다. 칼이 강경하고 날카로워서 동아시아 삼국 가운데서 가장 강하였다. 이 칼의 문화는 발전하여 일본 문화의 대표성으로 자리 잡는데 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할복(割腹)의 문화’로 성숙한다. 칼의 문화는 흔히 한국의 붓의 문화와 비교된다. 칼의 문화와 붓의 문화는 서로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극명하게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구별되는 것은 칼의 문화는 승패가 분명하고, 승자에게 승복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붓의 문화는 승패가 불분명하여 역사적 평가에서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또 재미있는 것은 칼의 문화는 죽음을 통해, 다시 말하면 죽음이 배수진을 치게 하여 현재의 삶을 보다 성실하고 분명하게 한다. 이에 비해 붓의 문화는 때로는 현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을 변명하게 하고 회한에 잠기게 한다. 여기에서 문화의 역설을 발견하게 되는데 죽음을 두고 일본의 ‘죽음의 미학’과 한국의 ‘생존의 미학’이 서로 반전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현재에서 최선을 다하게 하고, 죽음을 스스로 택함으로써 죽음을 미래지향적으로 운용하는 반면, 한국은 삶에 연연하다가 도리어 과거와 과거의 귀신에 매달려 과거지향적으로 회한이 회한을 낳게 하는 점이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다양한 투구.
일본의 전통 도(刀)에는 반드시 자루에 이름과 자호(字號·옥호)를 새겨 가문의 명망을 나타냈다. 창검(槍劍)도 그러하다. 일본의 ‘상고도(上庫刀)’는 일본 천하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각 섬의 명장(名匠)들을 모두 창고 안에 가두고 솜씨를 경쟁하도록 하여 만든 칼이다. 명검 중의 명검은 ‘영구(寧久)’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있으면 최상의 신분을 나타냈다. 일본인의 칼에 대한 정성은 거의 신앙에 가깝다. 이것은 일본의 즉물주의(卽物主義)와도 통하는 것이지만 그들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어떤 것을 하더라도 그것에 신명을 다하여 도(道)에 이르는 것을 목표한다. 그래서 도(道)자를 쓰기를 즐긴다. 검도, 다도(茶道), 서도(書道)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도(道)의 문화’이다.

오늘의 검도는 일본의 전통적인 검도와는 다르다. 검도는 이미 경기체육화된 것이고, 오직 격법(擊法) 한 가지만으로 누가 먼저 머리·허리·손목을 맞히느냐로 승패를 가리는 스포츠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진검을 들었다 해도 무예로서의 법식(法式)은 찾아보기 어렵다. 왜검과 검도의 차이점은 전자는 일본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한국화됨으로써 우리의 정신이 배어 있는 것이고, 후자는 아직도 한국화의 과정 중에 있다는 점이다. 검법에도 그 나라의 정신과 문화가 스며 있다. 발끝까지 가리는 긴 치마바지를 두르고 칼을 휘두르는 검도는 아직도 한국문화엔 어딘가 어색하다.

동아시아 삼국에서 검(劍)을 말하면 단연 일본이다. 물론 임진왜란 때 조선은 일본의 조총과 함께 검의 매운맛을 보았다. 멀리서 적이 가까이 오기 전에 활을 쏘아서 주로 대적하여 전쟁의 승패를 삼았던 조선은 총의 등장과 함께 치명적인 약점을 노출한다. 포물선을 이용하는 활에 비해 직사하는 조총은 빠른 것은 물론이고 파괴력에서도 위력적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3년 전인 1589년, 조선에도 조총이 소개되었다. 하지만 당시 강력한 화약무기를 다량 보유한 조선은 조총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조총에 큰 피해를 본다. 이에 1593년, 마침내 조선도 조총을 제작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 조총과 조총의 개량에 힘을 쓰지 않았다.

◇평상복 차림의 어린 사무라이.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는 순간까지도 조선군의 주력은 임진왜란 당시 성능과 다를 바 없는 조총만 15만정을 보유한 게 고작이었다. 신미양요 때는 미군이 강화도 광성진에 어재연 장군과 1000여명의 병사를 향해 일방적인 함포사격을 한 후 650명의 해병으로 포위공격을 했다. 이에 조선군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350여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바다로 몸을 던지게 된다. 고종에 이르러 외국의 근대식 소총을 수입하여 사용하지만, 당시 선진국이었던 일본·미국·독일·러시아·영국 등의 소총을 수입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결국 무기체계의 후진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이른다. 새로운 문명의 이기에 대해 무지하면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된다.

일본인은 개인적으로 만나면 양과 같이 양순하고 예의 바르다. 그러나 집단이 되면 호전적으로 돌변한다. 겉으로 보면 이는 매우 상반된 이중적인 인격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섬나라인 데다(다른 지방으로 도망갈 수 없다. 설사 도망가더라도 제대로 살 수 없다) 무사(武士)를 중심으로 하는 수직의 ‘종(縱)’사회에 길들여진 품성과 봉건영주(藩主) 간에 끊임없는 전쟁을 겪었던 사정에서 비롯되는 것일 것이다. 일본의 양반은 전통적으로 무사였다. 이는 한국의 양반이 문사(文士)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무사가 양반이 되는 것은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한국이 이상한 것이다. 인류사를 보면 오랜 기간 동안 사(士) 계층은 모두 무사(武士)였다. 그 뒤에 문사가 나온다. 무사란 무술을 잘하는 전문 직업집단이라는 뜻이다. 중국은 춘추시기부터 소위 문사가 등장했다. 유가(儒家)의 창시자인 공자도 무사집단 출신이다. 공자는 키가 9척6촌이나 되는 무골이었으며 대단한 힘의 소유자였다. 다시 말하면 양반에게서도 무사가 먼저였다는 뜻이다. 국가라는 것의 등장은 물론 무기체계의 경쟁을 수반하는 전쟁을 통해서 부족국가가 연맹이 되고 다시 국가로 통폐합과정을 겪으면서 완성된다.

무사들 간의 치열한 경쟁과 권력획득 과정이 취약하면 문화의 하부구조가 튼튼하지 못하다. 일본은 서양과 같이 중세 봉건주의를 제대로 거쳤다는 점에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하는 데에서도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유리하였다. 일본을 두고 ‘동양의 서양’이라고 빗대어 하는 말은 역사적 과정이나 무사도를 존경하는 점에서도 합당하다. 일본의 무사도는 서양의 기사도에 비해 전혀 손색없다. 일본은 한국이 선비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을 그대로 무사에게 요구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무사는 단순히 칼잡이가 아니다. 말하자면 한국의 선비와 같이 보면 된다. 이 점을 한국인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본은 무사도를 통해서 신(神)과 접하고 영혼을 구원한다.

일본인에게 검은 단순히 무기가 아니다. 검은 일본인의 신앙이다. 이는 한국의 선비가 사서삼경을 섬기는 것과 같다. 검과 경전을 어떻게 같이 비교할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일본의 ‘검 신앙’은 우리의 ‘경전 신앙’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다. 일본인은 검의 정신을 통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논한다. 무사의 인은 정(情)에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장수는 상대가 되지 않는 젊은 무사에게 이겼더라도 목을 치지 않고 돌려보낸다. “쫓기는 새가 품에 들어왔을 때는 사냥꾼도 이를 쏘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무사들은 인(仁)을 배양하기 위해 ‘하이구’(俳句)라는 시를 짓는 공부도 한다. “의(義)가 지나치면 굳어지고, 인(仁)이 지나치면 약해진다”는 말도 있다.

◇일본 무사들의 전투 묘사도.
일본 무사는 명예를 중시한다. 명예를 잃으면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울지 않는 새’를 두고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일본 영웅들의 개성을 엿보는 속담이 있다. 혼란기였던 일본 센고쿠 시대를 평정한 오다 노부나가는 “울지 않는 새가 있으면 죽여라”라고 했고,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울지 않는 새가 있으면 울게 만들어라”라고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에도막부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울지 않는 새가 있으면 울 때까지 기다려라”라고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력을 높이 사는 대목이다.

일본 무사의 충효관은 다음의 속담에서 잘 드러난다. “충이 아닌 것을 바라면 효가 되지 않고 효가 아닌 것을 바라면 충이 되지 않는다.” 정권이 타락하면 “문신은 돈을 좋아하고, 무신은 목숨을 아까워한다”는 속담도 있다. 사실 어느 나라든지 무신이 목숨을 아까워하면 그 나라는 존속하기 어렵다. 일본 무사들은 흔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지만 때로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할복 혹은 절복을 한다. 이것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다.

“명예를 잃었을 때는 죽음조차 구할 수 없다. 죽음은 치욕보다 확실한 피난처이다.”

일본 무사도의 마지막엔 야마도 정신, 즉 대화혼(大和魂)이 있다. 이것은 일본 무사도의 이상이다. 대화혼은 일본 최초의 신무천황(神武天皇)이 ‘대화’(일본의 ‘나라’) 지방에서 건국한 데서 비롯되는데 개성보다 협동, 부분보다 전체를 중시하여 화합·조화·통일을 꾀하는 정신을 의미한다. 일본은 대화혼을 서양의 기사도나 신사도와 비교한다. 일본인은 ‘어떻게 살까’보다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죽을까’를 생각하다 보니까 도리어 삶에 충실하고 삶을 극대화하는 기회를 맞는다.

일본의 무사도는 일본의 국화인 벚꽃과 자주 비교되는데 참으로 닮은 점이 많다.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라는 말이 있다. 벚꽃은 아름다움 아래에 장미처럼 가시나 독을 지니고 있지 않다. 자연스러운 멋에 생명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꽃이다. 그 색은 결코 화려하다고 할 수 없지만 담담한 향기는 질리는 일이 없다. 바람이 불면 수많은 꽃잎이 흩날리고 짧은 순간에 향기를 내고 영원히 사라진다. 이것이 무사도와 같다. 모토리 노리나가는 이렇게 대화혼을 읊었다.

“일본의 야마토 마음은 아침 해에 향기를 풍기는 산 벚꽃나무.” 여기서 산 벚꽃나무라고 한 것은 일본풍토에서 자라나는 야생성을 강조한 것일 게다.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코드는 몇 개가 있다. 그중 역시 검을 통하면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맛이 있다.

한국의 정신을 대표하는 것을 흔히 선비정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선비정신이라는 말에 무사와 농공상(農工商)을 업신여기고, 사대주의가 숨어있는 것은 참으로 우리의 치명적 약점이다. 무(武)의 주체와 독립이 없는 선비정신은 실은 자칫 잘못하면 사상누각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때론 쓸데없는 공리공론에 주력하게 하는, 명분론에 집착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명분론이라는 것은 실은 역사에서 매우 안이한 태도로 실익을 잃기 쉽고, 어떤 도그마의 노예가 되기 쉽다. 이때 도그마가 외래의 것이면 이는 치명적이 된다. 외래의 것으로 자신의 것을 바꾸는 주객전도가 된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이런 주객전도는 쉽게 말하면 ‘남의 조상을 섬기면서 자기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몸은 한국 사람인데 정신, 즉 혼은 다른 나라 사람이다. 혼은 한번 빠져버리면 고치기 어렵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제 조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다시 다른 남의 조상을 섬겼으면 섬겼지 제 조상을 섬기지 못하는 체질이 된다. 이것이 사대주의다. 사대주의는 ‘반(反)문화주의’는 아니지만 주체적이지는 않다. 사대주의는 주체성의 결여로 인한 심리적으로 보상받기 위해 문화의 내용에서 항상 권력에 저항하는 ‘반(反)문화’를 숨기고 있다.

실질이나 실익을 추구하면 항상 현실이나 현재에 충실함으로써 새로운 시대에 주체적으로 적응하게 되고,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땅에서부터 새롭게 일을 정리해가는 착실함을 가지게 마련이다. 외래문화를 토착화하는 힘도 강해진다. 일본의 무사도와 대화혼을 통해서 보면 우리의 ‘숭문(崇文)사상’과 ‘사대(事大)주의’가 무인을 멸시하고 장인정신의 결여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맹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박정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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