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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로 알려진 역사 속엔 '허구'도 있다

입력 : 2008-03-30 13:17:21 수정 : 2008-03-30 13: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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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역사/구본창 지음/채륜/1만2000원
‘660년 7월18일. 신라와 당의 연합군 18만명이 사비성까지 밀고 들어오자 부여 부소산으로 피한 의자왕의 삼천궁녀는 쫓기다 결국 낙화암에 몸을 던져 죽음을 택했다.’ 이것이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있는 백제의 슬픈 최후다.

그러나 지은이는 ‘패자의 역사’에서 삼천궁녀란 존재하지 않은 허구라는 주장을 편다. 그 같은 주장의 근거는 이렇다. 백제 멸망 당시 수도인 사비성 인구는 5만명에 불과했다. 당시 남녀 구성비를 반반으로 볼 때, 여자는 2만5000명, 그중에 궁녀가 될 수 있는 연령대인 15∼25세 여자는 약 4000명이다. 그런데 그중 3000명이 궁녀였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호구지책으로 사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도 지인들과 ‘대중역사연구소’를 설립, 기존의 주류역사학에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해 온 지은이는 ‘완전한 허구’가 역사가 되는 것은, 역사는 항상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대부분 승자는 선이고 패자는 악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같은 사건, 같은 인물이라도 누구의 시선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승자에 의해 기록된 역사만을 배워왔기에 편향적인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 책은 이 같은 시각을 완전히 뒤집고,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해 패자의 입장으로 역사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의 허구와 왜곡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독립문은 1896년 청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동시에 조선을 독립시켜준 일본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한 징표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8월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하자 그를 조선 독립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지칭하며 독립문이 새겨진 은쟁반까지 선물했다. 을사오적인 이완용이 독립협회장으로 활동했고, 부친과 같이 2대째 대를 이어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윤치호도 회장을 지내는 등 독립협회 인사들은 독립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독립신문’은 우리가 알던 순수 애국 계몽신문이 아니라 반민족·반민중적 신문이었다. 심지어 항일 독립군을 ‘비적(匪敵)’으로 표기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당연하게 여겼던 김유신의 삼국 통일, 고려 시대의 민란, 조선 시대의 항일 투쟁사 등 역사적인 사건의 진실에 의문이 생기면서도 재밌다.

“우리의 역사는 찬란했다는 추상적인 자부심만을 전해주는 역사에서 탈피,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삶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하는 살아 있는 역사가 돼야 한다”는 게 지은이가 이 책을 통해 한결같이 주장하는 내용이다.

“우리 역사는 왕조와 정권은 수없이 교체되었어도 결국은 늘 기득권자들에 의해 움직여 온 주류 역사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류의 시각으로 바라본 역사만을 배웠고, 또 체제 순응적인 역사만을 배웠습니다. 더구나 일제 36년을 거치는 동안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주도와 친일 사학자들이 만든 식민사관의 잔재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어 역사 왜곡까지 덤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은이의 말이다.

박태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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