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여성 국내 박사 1호’, ‘용기 있는 국제 여성’으로 대변되는 이애란(48) 경인여대 식품영양학과 겸임교수는 방학 중인데도 매일 초청강연과 방송활동, 북한 요리강습, 탈북 대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육, 각종 행사 참여 등으로 빡빡한 하루 일정을 보낸다. YBM 시사영어사 사무국장, 탈북자 여성단체 모임인 (사)하나여성회 대표도 맡고 있는 그는 공중파 방송과 케이블 TV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다. 또 각종 위원회와 협의회, 대학 등 5곳에서 위원이나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강의를 의뢰한 곳 대부분이 정부기관이나 공무원교육원, 연구소, 종교재단 등 내로라하는 기관이나 단체일 정도로 유명인이 됐다. 수상경력도 2010년 미 국무부가 수여한 ‘용기 있는 국제 여성상(Award for International Women of Courage)’을 비롯해 고운(皐雲)문화상(선행자) 등 굵직한 것만 10개가 넘는다. 탈북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인사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유다. 그의 성공은 그냥 쉽게 온 것이 아니다. 출신성분 탓에 천대받던 북한생활과 탈북자로 겪어야 했던 한국사회의 냉대를 밑거름 삼아 일궈낸 드라마틱한 인간승리였다.
![]() |
이애란 교수가 과거 북한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
나무를 베어 당국에 공급하던 산림지역인 삼수는 창살 없는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1년 중 6개월을 산 속에 들어가 벌목을 해야 했고 그는 어머니와 동생 3명과 화전을 일구어 감자를 심어 연명해야 했다.
“평균기온이 영하 28도가 넘고 전기조차 없는 산림지역의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봄이면 고사리를 뜯게 한 뒤 여름이면 농사에 동원하고, 가을에는 약초를 캐도록 했고 겨울에는 땔감을 해오게 했어요. 또 학생 1인당 1년에 토끼가죽 30장을 내도록 했지요. 여기서 그치지 않고 ‘70일 전투’, ‘100일 전투’ 등 각종 노역에 동원됐습니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자급자족을 위해 산으로 올라가 화전을 일구고 감자를 심어야 했으니…”라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어린 나이에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탈출구를 찾던 그는 인민학교(초등교)를 졸업하고 5년제 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자 시간나는 대로 수학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김일성이 ‘과학자 우대정책’을 표명해 ‘세계적인 과학자가 되면 생활이 나아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비상한 머리와 특유의 집중력을 가진 그는 북한 내 200여개 고등중학교 졸업예정자 7만여명이 참여하는 수학경시대회에서 25위 내에 들었다. 이 등수면 출세길이 열리는 김일성대학에 우선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지만, 그는 출신성분 탓에 입학 자격은커녕 학교 측으로부터 충격적인 힐난을 들어야 했다.
그는 대학을 갈 수 없다는 좌절감에 농약을 마시고 자살을 기도했고, 다행히 배급표를 정리하기 위해 잠시 집에 들른 어머니에 의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이 같은 와중에 벽돌공장 노동자 경력을 인정받은 아버지가 당국이 설립한 건설회사에 차출돼 양강도 혜산시로 배치되자 아버지를 따라 1981년 혜산시로 나왔고, ‘울며겨자 먹기’로 전문대학인 혜산고등경공업전문학교 식료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 북한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혜산시 품질감독원으로 일하던 그는 4년제인 신의주 경공업대학에 편입해 같은 분야 공부를 한 뒤 1989년 졸업했다. 하지만 난관은 또다시 그를 찾아왔다. 미국에서 소설가로 활동하던 사촌 여동생이 출간한 소설이 문제였다. 한국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월남한 할머니 등 그의 가족을 소재로 했는데, 가족의 실명, 편지 등이 그대로 게재됐다.
“가뜩이나 출신성분 문제로 감시의 눈길을 받고 있는 우리 가족은 정치범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결국 결혼 1년 만인 1997년 8월 남편을 제외한 가족 9명이 야음을 틈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4개월 된 아들을 머리에 이고…. 이후 3개월간 중국 대륙과 베트남을 헤매다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 도착해 1개월여 종교시설에 몸을 의탁하던 그는 정부에서 임대주택을 마련해 주자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맨 처음 잡은 일자리가 호텔 청소부였다. 하지만 월급 50만원으로는 생활이 안 돼 그는 무작정 다른 직장을 찾아 나섰다.
![]() |
이애란(왼쪽 두번째) 교수가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에서 강사들에게 북한 음식 요리법을 설명하고 있다. |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그는 회사에서 주는 보험대상자 자료를 직능별, 소득별로 분류하고 시간대별로 만나기 쉬운 사람들을 정리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거쳐 본격 영업에 나섰다. 오전 10시30분부터 사람을 만나기 시작해 11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입사 2개월째는 첫 월급의 2배가 넘는 186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그는 보험설계사 생활 2년 만에 이 회사의 전국 설계사 6만명 가운데 매출 9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회사 역사상 최단기간에 설계사 최고등급인 수퍼급에 올랐고 월급이 2700만원을 넘어섰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처참했던 북한 생활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밤을 새워 자료에 있는 예비 고객들의 직능별·수준별 특성을 파악하고 상대에게 이익이 갈 수 있는 방안을 찾아 제시했더니 고객이 늘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던 중 배우자에게조차 밝히지 않았던 ‘숨겨둔 자금’의 운용을 상의하는 고객까지 생겨나면서 일에 자신이 붙었고 매출액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북한과 달리 (한국은) 노력하는 만큼 벌 수 있는 사회라는 걸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가 한국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우뚝 서는 신호탄이었다. 자신감을 갖게 된 그는 자신이 더 잘할 수 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건강음식점을 열었다. 북한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한 데다 한국 음식문화와 북한 음식문화를 접목하자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 토끼음식 특허도 냈다.
그러던 중 2003년 9월 이화여대에서 북한 관련 강의요청이 왔고, 그것이 계기가 돼 이대에서 석사학위를 마쳤다. 강의를 듣던 한 교수가 “소양이 있다”며 공부를 권유했다. “등록금이 500만원이나 되는 데다 하나 있는 아들 뒷바라지할 시간도 없어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연간 장학금을 준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1년만 다니려고 했는데 결국 졸업까지 하게 됐고, 내친 김에 박사학위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학과수업은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지만 박사 논문이 문제였다. 박사논문을 위해서는 토플 성적이 필요했지만 북한에서는 러시아어나 중국어를 가르치기 때문에 영어를 배운 적이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실향민 출신의 한 어학원 원장의 도움으로 하루 6시간씩 영어를 공부해 나갔다.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 정도 붙을 무렵인 2005년 2월 그는 온몸이 마비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수술까지 해야 했지만 특유의 자생력을 발휘해 우여곡절 끝에 2008년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2009년 졸업했다. 박사 도전 6년여 만이었다.
그는 2008년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평생 바람인 (사)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을 설립했고, 2010년에는 경인여대 겸임교수에 지원해 47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이미 2만명이 넘는 탈북자들에게 교육을 시켜 주고 직장을 마련해 줘 남북통일의 주역으로 키우자는 뜻에서다.
이를 위해 탈북인들이 모인 곳이면 어디나 찾아갔고, 영어를 공부했던 어학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