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에 집착하는 풍토 탈피해야

그런데 이 말은 오늘날 상황에는 전혀 맞지 않는다. 요즘 우리 사회는 외모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통해 뉴스나 정보를 검색하다 보면 젊은 연예인의 사진을 무수하게 접하게 된다. 각종 매체는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이들의 외모를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얼짱’이니 ‘꽃미남’이니 듣기에도 생소한 말은 물론이고 ‘유혹’, ‘도발’, ‘볼륨’, ‘꿀’ 같은 낯 뜨거운 표현이 서슴없이 등장한다.
이러다 보니 청소년은 인간의 성품이나 재능이 아닌 외모를 중시하게 되고 정형화된 신체적 특징을 동경하게 된다. 몇 해 전인가 어느 젊은 여성이 방송에 출연해 키 작은 남자를 ‘루저’(loser·인생의 패배자)라고 해서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의 인식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듯 보인다.
필자는 외국의 젊은이를 접할 기회가 많은 편인데, 이들은 종종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그렇게 키나 생김새를 중시하는가”라고 묻곤 한다. 외국의 청소년이라고 외모에 관심이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나치다. 선천적 기형이나 사고에 의한 훼손이 아닌 경우에도 멀쩡한 얼굴과 몸을 수술로 바꾼다. 그들 중 다수는 직업상 외모에 큰 비중을 두는 연예인도 정치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다. 심지어 취업을 위해 성형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수려한 외모를 무시하라는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외모는 어떤 면에서 인종이나 혈액형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키나 얼굴 같은 신체적 특징은 인간의 노력에 따라 변화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외모지상주의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변인을 통해 인간을 평가하는 비인간적이고 반문명적인 사고방식이다.
외모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 특히 내적인 가치를 보지 못한다. 이런 이들에게 ‘노트르담의 꼽추’ 같은 명작이 부담스럽다면 ‘미녀와 야수’ 같은 동화라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인간의 위대함이 아름다운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노벨상은 미인대회로 대체하면 될 것 아닌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심미적 기준의 획일성 또한 문제다. 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규격화된 정형성을 거부하면서 실제로는 획일화된 틀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키는 최소한 얼마가 돼야 한다’든지 ‘얼굴은 어때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나오는 것인지 황당무계하다.
링컨 대통령의 참모들이 그의 경쟁자가 짧은 다리의 소유자임을 구설에 올리며 링컨에게 “사람의 다리 길이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요”라고 질문했다. 아부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링컨은 “땅에 닿을 정도면 되지요”라고 대꾸해 이들을 겸연쩍게 만들었다고 한다.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은 탁월한 지적 능력, 숭고한 덕성, 그리고 건전한 신체의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며 오늘날 서구문명의 초석을 다졌다. 그들은 예술품을 통해 가는 허리나 각선미보다는 건강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인간에게는 분명 인체의 미를 동경하고 감상하는 본성이 있다. 그러나 인간 특유의 위대한 정신력과 고결한 영혼이 결여된 신체적 아름다움은 한낱 껍데기일 뿐이다. 이제 껍데기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내던지자.
중앙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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