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정보 안주면 무용지물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흔히 수학시험을 통해 분석적 사고와 논리적 추리력을 평가한다고 한다. 그런데 분석적 사고와 논리적 추리력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비전문가에게는 분명치 않다. 명쾌히 규정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다음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는 특성이나 능력을 직접 평가할 수 없다는 데 더 큰 난점이 있다. 신체적 특성이나 능력의 경우, 정교한 기계를 통해 키와 몸무게를 측정하고 100m를 달리는 데 걸린 시간을 재면 된다. 그러나 분석적 사고와 논리적 추리력은 아무리 발달된 장비를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직접’ 잴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대학전형같이 사회적인 관심이 지대하고 다수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선발의 경우, 평가의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해마다 수능 때가 되면 ‘너무 쉬웠다’ 혹은 ‘너무 어려웠다’며 교육평가 담당자에게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평가전문가라고 모두를 만족시킬 묘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
대입전형의 체계와 방식을 이리저리 바꿔보며 개선을 모색하는 와중에 등장한 것이 소위 입학사정관제라는 제도다. 전통적인 필답시험 위주의 양적 선발에서 탈피해 지원자의 질을 중시하는 체제로 전환한다는 발상은 다분히 의의가 있다. 문제는 이 제도가 마치 기존의 문제를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처럼 과대포장돼 왔다는 데 있다.
현재 우리의 대학이 활용하고 있는 입학사정관제의 원형은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미국 대학, 특히 소위 명문대학에서는 지원자의 당락이 입학사정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대학의 입학사정관은 대다수가 학사학위 소지자이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엄청난 재량이 주어지는 배경은 그들의 전문성과 그들에게 제공되는 정보의 신뢰성과 정직성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입학사정관제의 올바른 정착을 위해 가장 핵심적인 여건은 신뢰구축이다. 이 같은 신뢰구축을 위해 필수적인 것은 바로 정직성이다. 학부모, 학생, 교사가 정직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한다면 입학사정관의 전문성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신뢰와 정직은 단기간에 증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미국에서도 이 제도가 자리를 잡는 데 수십 년이 걸린 것이다.
입학사정관제에 대해 한 가지 더 첨부한다면, 미국 대학도 양적인 평가를 전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입학사정관의 주관성이 임의성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이 내리는 판단의 근거자료가 모두 질적인 것은 아니며 미국식 수능성적, 내신성적 등 다양한 양적 자료도 중요 자료로 활용된다. 더욱이 절대다수의 미국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이 제도를 완벽한 제도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필자는 입학사정관제의 조급한 확산에 대해 우려를 표명해 왔다. 이 제도의 전면적인 확대보다는 부분적이고 점진적인 활용과 지속적인 점검 및 개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이제야말로 숨을 고를 때다. 더 이상 입학사정관제가 우리 교육의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것 같은 환상을 주입해서는 안 된다. 입학사정관은 평가의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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